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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127화 (127/185)

<-- 127 회: 5권 - 열도를 향하여 -->

부정하는 하재혁이었지만 이미 내심이 들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알고 있었다.

-실망이 크겠지요. 이해합니다. 그래도 아직 기회는 넉넉해요. 이번에 그 아이 일본에 간다고 합니다.

“일본이요?”

-그래요. 해외라면 손을 쓸 기회가 풍부합니다.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때처럼 쉽게 들어오기도 힘들 거고, 더더군다나 일본이라면 나와 통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 그렇겠지요.”

노인은 이 나라에서 알아주는 일본통이다.

그런 노인이 일본에 가는 성진에 대해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하재혁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노인은 평소 하재혁이 노인 자신에게 품은 불만을 인식하고 마치 어린 손주를 달래듯 조곤조곤한 어조로 하재혁을 설득하고 있었다.

완벽히 심리적으로 압도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으시오. 껄껄.

“예. 어르신.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하재혁은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면서도 성진의 일이 말끔히 해결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결 가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말마따나 좋은 소식을 기다려야겠지.”

하재혁은 피곤해진 몸을 푹신한 등받이에 묻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들려올지는 과연 두고 볼 일이었다.

*   *   *

출국 일정이 잡히자 성진 일행은 새벽 공항에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성진과 윤진만 변호사, 기타 정부에서 파견한 엘리트 외교관들과 협상 실무진들이 성진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리고 그 말미에 특이한 인물이 따로 따라붙고 있었다.

바로 과거 ‘청소부’라는 이명으로 뒷 세계에서 활동했던 해결사. 차영석. 이제는 김형석이라는 이름으로 박천중 회장의 곁을 지키던 남자였다.

그러던 그가 성진의 은밀한 부름을 받고 임시 휴가를 얻어 일본행에 따라붙은 차였다.

그 나름대로는 성진의 이번 부름에 많은 각오를 하고 온 상황이었다.

‘쉬운 일을 시키지는 않겠지.’

하지만 어차피 자신은 이 순간을 위해 성진이 준비한 칼이다. 부르면 따라가는 것이 마땅했다.

북녘에 남겨진 가족들을 구출하는 데 성진이 건네준 돈을 거의 다 써가고 있었다.

이제 한꺼번에 구출 소식이 들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은혜를 위해서라도 김형석은 기꺼이 성진을 위한 임무에 자신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출입문 게이트에 들어서면서 남몰래 성진과 살짝 눈빛을 교환했다.

성진 또한 김형석을 눈길로 일별하면서 주변에 있던 일행들을 이끌었다.

“자. 취재를 피하기 위해서지만 다들 이른 시간에 나오느라 고생했습니다. 이제 일본에서 여러분은 정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목표와 사명, 잊지 말아 주십시오.”

성진의 말에 외교관들과 행정 관료들을 이끌던 중년의 공직자가 말을 받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 회장님. 저희 역시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해 전념하겠습니다.”

“그래요. 부탁드립니다.”

성진은 해당 공직자와 여러 인사를 보며 눈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자, 갑시다. 일본으로!”

*   *   *

현해탄을 가로지른 지 얼마 안 되어 성진 일행이 탄 비행기는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추운 겨울을 막 지나서 봄의 생생함이 이 열도 땅에도 서서히 어리는지 바람은 한국에서보다 훈훈했다.

“생각보다 날씨가 따뜻하군요.”

“예. 하네다가 이렇게 따뜻한 거 보니 도쿄 도심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일본 영사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외교관이 성진의 말을 받았다. 훈기가 어린 하네다 공항이 따뜻하게 성진 일행을 맞아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기서 앞으로 지지고 볶고 해야겠지만 일단은 날씨가 따스하니 좋군.’

앞으로 성진이 방사능 제거 기술을 무기로 일본 내각, 혹은 그 이상을 향해 한창 싸워나갈 전쟁터의 입구다. 입구가 따뜻하다고 마음을 놓을 일은 없지만, 기분이 나쁠 까닭도 없다.

“미리 섭외한 버스가 대기중일 겁니다. 공항을 나서는 대로 버스에 올라서 호텔로 갑시다. 주 회의실로 쓸 스위트 룸과 여러분 각자 묵을 방을 예약해 뒀습니다.” 

성진이 말을 하면서도 일행 중 말없이 성진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위장한 국정원 요원들로, 이들은 기본적인 업무지원과 경호 임무 외에도 감청 방지 임무를 띠고 사전에 정해진 숙소에서 도청, 도촬장치를 탐색, 폐기하거나 차단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탐색장비는 수화물 검사에서 걸릴 우려 때문에 따로 특수 포장되어 항구를 거쳐서 택배로 호텔 근처 사설 사물함에 미리 배달되어 있었다.

‘사실 도청 걱정은 별로 없을 텐데…….’

성진의 인공지능 팔찌가 웬만한 도청, 도촬 장비쯤은 간단하게 찾아서 박살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국정원 요원들은 나름대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장비를 반입하기 위해 애쓴 상황이었다.

“이제부터 일본에 입국하시면 모든 언행을 극도로 절제하셔야 합니다.”

국정원 요원, 전 영사관이었던 사람이 가볍게 주의를 주었다. 성진 일행 모두 당연한 지적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땅에 발을 내디딘 순간, 아니 어쩌면 일본행 항공기를 탄 순간부터 일본 첩보원들이 성진 일행을 감시하고 있을지 몰랐다. 성진 일행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열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늘 감시받고 있는 상황을 기정사실로 생각해야 했다.

비자 심사와 화물 검사가 끝나고 마침내 입국 게이트를 나서는 성진 일행은 아직 오후가 되지 않은 시각에 공항을 나설 수 있었다.

차분하게 공항 근처에 대기중이던 버스에 오른 성진 일행이 모든 인원의 착석을 확인하자 버스가 조용히 호텔을 향해 출발했다.

버스가 하네다를 완전히 벗어나 도쿄 도심의 혼잡한 사거리로 이르자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윤진만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대단하군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모를 리가 없는데 기자들이 한 명도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나름대로 기삿거리가 될 텐데도 말이죠.”

“아, 그거 말이죠.”

윤진만 변호사의 의견에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일본 정부는 우리 방문이 최대한 덜 주목받았으면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 언론 통제가 가능하다니 대단합니다.”

한국이라면 아무리 보도 통제를 하려고 해도 인터넷, 하다못해 SNS로라도 새어 나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완벽에 가까운 언론 통제능력을 자랑하는 일본 공권력은 언론사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방부가 나서서 엠바고(시한부 보도유보)를 요청했음에도 모른척하며 먼저 군사작전을 보도해버린 전례가 있는 한국과는 그 분위기의 강도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성진과 윤진만 변호사의 대화를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영사관 출신 국정원 요원이 넌지시 말을 보탰다.

“일본은 한국과는 많이 다릅니다. 거리를 보면 자유로운 듯해도, 권력의 입김이 서린다 싶으면 모든 게 일사불란하게 통제되는 분위기입니다.”

“예에…….”

“지금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능이 계속 누출되고 있는데도 국민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잠자코 있죠. 소규모의 간헐적인 시위만 일어날 뿐입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요.”

“허허. 좋지는 않겠죠.”

성진의 생각으로는 아마 우리나라 정부가 일본 정부처럼 방사능 누출 사고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면 어마어마한 정권 탄핵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고위급 공무원들 앞에서 해댈 만큼 성진이 뻔뻔하지는 않았다.

“지금 제가 이 얘기를 드리는 건, 일반 일본 국민 중에서 방사능 위협에 대해 심각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기대보다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데도 지금 현상 유지를 해내고 있는 만큼 한 회장님의 방사능 제거 기술에 대해 큰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국정원 요원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요.”

“정치는 그런 기준으로 잴 수 없는 거니까요. 결국 복잡한 싸움이 될 겁니다. 방사능 문제의 시급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응할 것이고, 아니라면 이리저리 말을 돌리겠죠.”

잠자코 듣던 윤진만 변호사가 요원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데서 그런 말 하시면 어디선가 있을지 모를 일본 첩보원들 귀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국정원 요원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들어도 되고 상관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허허……. 심리전인가요.”

하지만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로 버스에 몰래 설치된 도청 장치를 고장 내버린 지 오래였다.

때문에 해당 버스를 몰래 도청하며 따라붙던 근처 미니밴 속의 일본 정보요원들은 지직거리는 잡음에 한창 고생만 해야 했다.

성진은 곁눈질로 그 미니밴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자신이 전쟁터로 들어왔음을 절실하게 실감했다.

*   *   *

성진 일행을 태운 버스는 도쿄 도심의 트래블랜딩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중간에 버스에서 빠져나간 국정원 요원들이 이런저런 위장을 해서 들여온 도청 방지 장비를 챙겨 들어왔다.

각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국정원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청 장치를 검사하고 방청 장비를 작동시키고 나서야 성진 일행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각 욕실에 5개, 침실, 거실에 10개씩. 많기도 하네요.”

주 회의실 격인 스위트룸만을 뒤져 찾아낸 도청장치들이지만 금세 수북하게 비집고 나왔다.

하지만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 국정원 요원들이 들여온 장비로 탐색하지 못한 더 정밀하고 은밀한 도청, 도촬 장비들을 박살 내버린 지 오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회의 시작하죠.”

성진의 주도와 함께 스위트 룸 가운데 놓인 탁상에서 준비 회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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