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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126화 (126/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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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도를 향하여

    청와대에 도착하고 난 뒤 안내인을 따라 성진이 도착한 곳은 으레 만나던 대통령 집무실이 아니라 아담한 실내 정원이 조성된 후원이었다.

    아기자기한 야생화와 꽃잎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서 그 한 켠에 난초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육정철 대통령은 그 난초 몇 가닥을 조심스럽게 돌보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간별일 없으셨습니까. 대통령님.”

    성진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육정철 대통령은 잠시 난초를 돌보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왔구려. 한 회장.”

    가볍게 인사하며 성진을 맞은 육정철 대통령은 난초에 다시 눈길을 주면서 혀를 찼다.

    “쯧쯧. 이거 바빠서 영 손을 못 탔더니 줄기 몇 가닥까지 죽어버렸어요. 에효. 이 야속한 녀석들.”

    “아끼시던 난초였나 봅니다.”

    “예. 나름대로 성의를 가지고 가꿨지요. 헌데 잠시 방심하니까 이렇게 죽어버리는군요.”

    육정철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며 성진을 지긋이 바라봤다.

    “한 회장. 최근에 플로티나 호텔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대충 들었습니다.”

    성진에게 늘상 따라붙는 국정원 경호요원들이 성진의 행적을 실시간으로 보고한다.

    플로티나 호텔에 강후전자의 초대를 받아 들어갔다가 도리어 강후전자의 직원들이 마약 스캔들을 일으켰다.

    표면상으로 성진은 호텔에 들어갔다가 조용히 나왔을 뿐.

    그러나 육정철 대통령은 성진이 뱀처럼 악독한 강후그룹의 암수를 피했다는 걸 확신했다.

    “방심하면 아무리 확신한 일이라 해도 한순간에 망가져 버려요. 난초 키우는 일이든 세상 사는 일이든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아요.”

    말인즉슨 성진이 신변 안전에 대해 방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성진은 자신을 따라붙는 국정원 요원들에 대해 밀착 경호를 거부하면서 지내왔는데 그랬기 때문에 강후그룹같은 엉뚱한 곳에서 성진을 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육정철 대통령 입장에서는 성진이 이제라도 자기 안전에 대해 확실하게 신경을 쓰고 밀착 경호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미 좋든 싫든 나는 이 젊은 친구에게 많은 걸 기대고 있다.’

    길게 남지 않은 임기다.

    마지막 한 방을 보여주려면 성진이 추진하는 일의 성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육정철 대통령을 보면서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방심하면 일을 망칠 수 있죠. 하지만 저는 난초처럼 남의 손을 타지 않는다고 곧 시들어버리는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지금도 이렇게 끄떡없지 않습니까. 하핫.”

    성진의 너스레에 육정철 대통령은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한 회장. 한 회장이 지금 얼마나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지 잊었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한 회장이 한일 외교사를 다시 써야 합니다. 방사능 제거와 독도에 대한 확실한 영유권 인정, 식민지배 사과를 맞바꾸겠다는 그 생각. 반드시 관철해 내야 합니다.”

    성진이 육정철 대통령에게 했던 약속.

    그것은 방사능 제거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와 협상을 벌여 독도에 대한 절대적인 영유권 인정을 받고, 일제 강점기 식민지배에 대한 정식 사과를 얻어내겠다는 말이었다.

    과연 일본이 호락호락하게 성진의 요구를 들어줄지는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일본은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심각한 국가적 위기상황에 봉착해 있다.

    성진의 요구사항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독도 문제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인 인정을 받아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공로를 윤진만 변호사와 함께 나누고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쥔다.

    그것이 바로 성진의 당면한 목표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이 나와도 됩니까? 집무실이 아닌데 도청이 두렵군요.”

    물론 인공지능 팔찌의 강력한 전자방해 능력으로 주변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도청 장비들을 마비시키고 있었지만 육정철 대통령은 그런 속내를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 말에 육정철 대통령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 실내 정원도 근처에 도청 방지 시스템이 작동 중인 보안 구역이에요. 안심해도 좋아요 한 회장.”

    “아하. 그랬군요. 어쩐지 매사 철저하신 대통령님이라면 당연한 일인데 제가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나도 늘 생각합니다. 한 회장이 가진 방사능 제거 기술을 세계 각국, 각 기업들이 얼마나 호시탐탐 탐내고 있는지를. 이쪽 보안은 철통방어 태세에요. 한 회장 몫만 신경 써주면 됩니다.”

    성진을 바라보는 육정철 대통령의 눈에는 염원이 가득했다. 반드시 목표를 이루길 바라는 염원.

    성진을 믿는다기보다는 성진의 목표가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성진의 마음과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비록 완벽한 우정은 아니었지만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동질감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일부분이나마 마음을 나눠 가졌다.

    “명심하겠습니다.”

    성진은 강한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   *   *

    강후전자의 직원들이 일으킨 마약 파문으로 강후그룹 전체의 위상에 손상이 생길 지경이었다.

    워낙 최고의 지위를 놓지 않아 왔던 강후그룹, 특히 강후전자였다.

    그런 강후전자의 직원들 여러 명이서 단체로 호텔 방을 빌려서 마약을 흡입한다니 감히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다른 연예계 가십이나 스캔들이 터져도 여전히 미디어상에 회자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강후그룹의 이름이 같이 거론되는 것도 별수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하재혁은 강후그룹의 명예와 명성에 극도로 예민했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선조, 선친의 피땀이 서린 회사다. 이 회사를 자신의 대에서 욕먹게 했다는 것 자체가 강후그룹의 총수직을 물려받은 하재혁의 입장에서는 참기 힘든 수치였다.

    “그 일 맡은 책임자 이름이 차진석이라고 했나?”

    “예. 회장님.”

    “그 녀석 어떻게 됐다고 했지?”

    “현재 마약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데 현행범으로 잡힌지라 실형을 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망할! 일을 시켜서 보냈더니 지가 당하고 돌아와? 에라이 망할 놈 같으니.”

    하재혁의 입속은 지금 당장이라도 불길이 쏟아질 것처럼 뜨거웠다.

    대외적인 이미지 실추는 그렇다 쳐도 실리조차 얻지 못했다.

    목표였던 성진은 지금도 아무 탈 없이 멀쩡하게 대내외의 신망과 국민적 인지도를 얻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일로 인해 성진 스스로가 자신과 강후그룹의 존재로부터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패를 던졌는데 얻는 건 없고 손해만 와장창 봤으니 하재혁의 입장에서는 분노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영감쟁이가 나를 꼬드기지만 않았어도…….’

    전화기 너머의 노인은 하재혁을 은근하고 노련한 말 몇 마디로 꼬드겨 패를 던지게 만들었다.

    그때는 정말 절실하고 중요한 승부수라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섣부른 계획에 실속 없이 이용만 당한 꼴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부하들 앞이라 체면 상할 만큼의 화는 내지 않게끔 억제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분노가 쉽사리 걷히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비서실장이 다시 다가와 입을 열었다.

    “회장님. 어르신으로부터 전화입니다.”

    “뭐?”

    일이 이렇게 작살이 났는데 무슨 염치로 전화를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이 영감쟁이가…….’

    하재혁은 부아가 치미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비록 계획이 실패해 손해만 왕창 봤지만 하재혁이 지금 당장 기대를 걸만한 사람은 그 노인뿐이기도 했다.

    -나요.

    “무슨 일이십니까.”

    최대한 감정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이제까지 쌓인 열을 배출하느라 거친 숨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많이 흥분한 모양이요?

    “흥분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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