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22화 (122/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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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진석이 성진을 안내하기로 한 30층은 비즈니스 회의실이 위치해 있다.

    성진이 들여다본 차진석의 머릿속 계획에는 비즈니스 회의실로 성진을 유인한 후 마약을 탄 음료수를 먹여서 다른 방으로 성진을 데려갈 심산이었다.

    성진의 몸속에서 마약 반응까지 검출시킬 계획을 세운 까닭이었다.

    ‘그 방이 여기쯤……이었나?’

    차진석의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간 성진은 복도를 이리저리 헤맨 뒤 문제의 그 방에 도달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커다란 양 문이 고급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성진은 문제의 그 방이 초호화 스위트 룸이라는 걸 알았다.

    ‘기업인이 스위트 룸에서 여자를 끼고 마약반응까지 검출된다라…….’

    차진석은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기자들을 불러 성진을 단번에 몰락시킬 작정이었다.

    그야말로 걸리기만 하면 빼도 박도 못할 철저한 재기불능의 수단.

    동서양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이 정도의 암수에 걸려들면 사회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극도로 제한된다.

    인간사에서 가장 추잡한 꼬리표를 달 수 있는 성적 추문과 마약 문제를 달고 나타난 인간을 지도자로 인정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누가 지시한 일인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는 몰라도 성진의 사회적인 몰락을 바란 게 틀림없었다.

    ‘뒷배경이 어떤지는 나중에 꼭 밝혀내야 할 일이고…….’

    성진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일단 어떤 여자인지 한번 얼굴이나 볼까…….’

    성진은 스위트 룸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   *

    스위트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인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각오를 다졌다.

    몸을 데우려고 목욕 가운을 걸쳤지만, 그 안에는 속옷 위에 얇은 실크 블라우스만을 걸친 상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더군다나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은 지극히 노골적이다.

    이 상황을 선택한 건 다인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다 각오한 거니까.’

    자신이 연예계에 몸담으면서 상상했던 가장 최악의 순간이었다.

    기왕지사 일을 벌였으니 자신을 안고 싶다는 그 젊은 사업가 앞에서 최대한 당당해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재수 없이 변태가 걸리더라도 비굴하게 굴지 말자고 다짐한 다인이었다.

    “누군지 빨리 오기나 하라고.”

    초조함에 지친 다인이 볼멘소리를 뱉은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스위트 룸의 문이 열리면서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다인이 앉아 있는 침실은 스위트 룸의 출입문이 보이지 않는 반대편 위치다.

    점차 다가오는 구두 소리에 집중하면서 다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침내 인기척이 코앞에 다가왔다 싶은 순간이었다.

    고개를 든 다인의 눈에 정장을 입은 듯한 남자의 윤곽이 잡힘과 동시에 목 뒤로 손이 올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응?’

    그와 동시에 눈앞이 깜깜해진 다인의 의식은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   *   *

    다인의 시선이 성진을 바라보려는 그 순간.

    성진은 잽싸게 다인의 수혈을 짚어 의식을 잃게 했다.

    “일단 댁은 자고 있어.”

    쓰러지는 다인의 등을 받친 성진은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그러자 흐트러진 목욕 가운 너머로 도발적인 모양새의 속옷이 비쳤다.

    여성이 속옷만을 입은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 직접 본 건 처음인지라 성진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크흠흠.”

    괜히 콧김을 뿜으면서 목욕 가운을 조심스럽게 정리해놓은 성진은 그녀의 얼굴로 시선이 갔다.

    ‘이 아가씨 어디서 봤더라?’

    회사를 꾸리게 되면서 TV나 미디어는 주로 경제, 정치 시사 뉴스만을 접하는 성진이었다.

    요즘 들어 제법 유명해지기 시작한 다인이었지만 아직 누구나 알아볼 만큼 톱스타의 위치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성진의 눈에 바로 비친 다인은 잘 나가는 연예인이라기보다는 다소 예쁜 편인 일반 여성 같은 느낌이었다.

    이름 박다인. 올해 나이 스물 셋입니다. 최근 20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습니다.

    인공지능 팔찌가 성진의 생각을 읽고 즉시 부연 정보를 출력했다.

    다인의 프로필부터 활동 내역, 주요 작품까지 망라되어서 성진의 시야 한켠에 고스란히 배열되었다.

    “최근에야 인지도가 상승한 배우군.”

    아역부터 시작해서 몇 년간의 무명 기간.

    최근 작품에서 겨우 주연으로 올라선 여배우.

    성진은 침대 위에 쓰러져 있는 이 가냘픈 여성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궁금했다.

    “마약이 끼어든 문제인 걸 알면 배우생활은 끝장일 텐데. 연예인 생활 접을 만큼 큰돈을 받아 챙긴 건가?”

    생각을 정리하는 성진의 표정에 짜증이 어렸다.

    만약 그렇다면 성진은 다인까지 철저하게 응징해 줄 작정이었다.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쯤은 성진이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마약으로 성진을 옥죄려는 일에 동참했다면 결단코 봐줄 이유가 없다.

    “박다인…….”

    여자의 이름을 중얼거린 성진은 성난 발걸음으로 스위트룸을 나섰다.

    *   *   *

    정광호는 대기하고 있던 방 안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어쩌면 일이 잘못 돼서 다인이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 상황에서 결코 다인을 혼자 둘 수 없다.

    이런 지경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광호였지만 우습게도 광호는 다인이 소중했다.

    이제 깨달았지만 다인은 차라리 자신의 혈육 같은 존재였다. 가족, 친동생 같은 존재였다.

    ‘동생을 팔아먹은 셈이지만 말이야.’

    뭐라 변명해도 확실히 자신은 쓰레기다.

    야심을 위해서 다인에게 더러운 길을 주선한 몸이다.

    그런 주제에 죄책감을 느낄 만큼 뻔뻔하지는 않다.

    ‘그래. 끝까지 달려가는 거야.’

    그렇게 되뇌던 와중 방문을 두드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뭐지?”

    정광호는 일이 잘못됐나 싶어 바로 뛰어갔다.

    잠긴 손잡이를 여는 순간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정광호의 이마에 문짝 모서리가 박혔다.

    “으앗!”

    이마를 감싸 쥐고 물러선 정광호가 짜증을 질렀다.

    “뭐하는 짓이오, 이게!”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사과 대신 정광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입 닥치고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살벌한 고함소리에 방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자부하는 정광호지만 이 순간 눈앞의 상대가 질러대는 박력에는 어쩔 수 없이 움츠러들었다.

    “다, 당신…….”

    정광호는 그제야 상대방이 눈에 들어왔다.

    “한성진 회장? 당신이 왜 이 방에…….”

    다인이 있는 스위트룸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거기서 한성진 회장이 뛰쳐나온 지금 상황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로 다인에게 생각이 미친 정광호가 떠듬거렸다.

    “다, 다인이는…….”

    “당신이 데리고 온 그 여배우? 곤히 자고 있으니까 자기 걱정이나 하라고.”

    성진이 눈을 부라리면서 정광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목이 잡힌 정광호가 켁켁거리며 팔을 풀려 했지만 성진의 팔뚝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자기가 키우고 있는 배우를, 그것도 여자 배우를 마약에 성추문을 일으키는 데에 처넣어? 그 여자도 동의는 했나? 얼마 받았지?”

    “무, 무슨 소립니……까? 마약……에 서, 성추문이라니요…….”

    반쯤 잠긴 목소리로 겨우 꾸역꾸역 말하면서 정광호는 일이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성난 얼굴로 눈앞에서 자신을 윽박지르는 한성진 회장의 표정과 말이 이 상황이 절대 장난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알려주고 있었다.

    “시치미 뗄 생각인가? 아니면 어리석게 당했다는 건가?”

    양 눈을 부라리는 성진을 보면서 정광호는 숨을 꺽꺽대며 두 팔을 저었다.

    “아, 아니요. 뭔가 오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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