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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요즈음 들어서 회사의 위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아! 플로티나 호텔에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도심에서 조용한 장소를 찾기가 수월치 않으니 호텔이 적합할 거 같다고 하던데요.”
“플로티나 호텔?”
강후 그룹 소유의 초일류 호텔이었다.
어차피 같은 계열사이기도 하니 성진은 선선히 동의했다.
“좋습니다. 대신 시간은 이쪽에서 정하죠. 오늘 밤 8시쯤. 그렇게 통보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박윤호 전무가 가볍게 묵례한 뒤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성진은 즉시 인공지능 팔찌에게 지시를 내렸다.
“강후 그룹의 동향에 대해 조사해봐. 특히 그 차진석 팀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예.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성진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공지능 팔찌가 수집할 수 있는 정보는 비교적 공개적인 영역, 그리고 전자 정보 쪽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보를 수집하는 영역과 해석하는 속도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어차피 많은 걸 기대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을 매듭지은 성진은 다시 인공지능 팔찌가 제공하는 업무 현황에 집중했다.
* * *
성진이 탄 차가 플로티나 호텔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 50분쯤.
미리 언질이 닿았는지 도어맨이 다가와 성진의 차를 알아봤다.
“어서 오십시오 한성진 회장님.”
정중한 인사와 함께 도어맨이 다가오자 차에서 내린 성진도 마주 인사하며 차 키를 내밀었다.
“수고하십시오.”
“예.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차 키를 받은 도어맨이 성진의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사라졌다.
현관 로비로 성진이 들어서자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서 주변 전파를 감시 중인 성진의 귀로 국정원 요원들의 감시 무전이 잡혔다.
-타겟 현재 플로티나 호텔 정문 진입
-A조 호텔로 차후 진입해서 주변 감시하고 B조는 계속 외부에서 경계한다.
-수신 양호
이렇게까지 감시하는 건가 싶어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웬만한 위협이 닥쳐도 눈 하나 끔뻑하지 않을 성진이기에 이렇게 독대 요청까지 수락한 셈이었다.
‘뭐 별일이야 있으려고.’
그렇게 성진은 느긋한 마음으로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 * *
‘왔다.’
정문을 열고 호텔에 들어온 모든 사람을 체크하던 남자는 바로 뒤에 대기중이던 동료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신호를 받아든 동료가 즉시 휴대폰을 꺼냈다.
“팀장님. 한성진 회장 도착했습니다.”
* * *
전화를 받은 차진석은 씹고 있던 껌을 뱉은 다음 말했다.
“오케이. 잘 모셔두고 있어라. 곧 내려간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옆에서 앉아있던 정광호를 돌아봤다.
“정 사장. 드디어 오늘 주빈께서 오셨어요.”
“예.”
간단히 대답한 정광호는 고개를 떨군 채로 말이 없었다.
그런 정광호를 내려다본 차진석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제 놈도 좋다고 따라와 놓고서는 무슨 청승이야.’
일은 벌여놓고 뒤늦게 착한 척, 후회하는 척이라니.
차진석은 이런 인간들을 제일 혐오했다.
지금껏 강후 그룹에 입사한 뒤로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고 수행해 온 그였지만 이렇게 뒤늦게 후회하는 기미를 보이는 인간들을 볼 때마다 왠지 욕을 퍼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 사장. 댁이나 나나 한세상 열심히 살아보자고 일하는 사람들이오. 그렇게 죽을상을 하면 꼭 나만 나쁜 놈 같잖아?”
차진석의 비아냥에 입술을 깨문 정광호는 마지못해 대꾸했다.
“맞습니다. 차 팀장님 말씀이…….”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댁이나 나나 이제 썩을 대로 썩은 인간이지.’
오늘 정광호는 가족처럼 아껴온 다인을 팔아넘기려고 호텔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물론 선택은 다인이 했지만, 어느 정도 정광호가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라도 다인이 싫다고 뛰쳐나온다면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지만 아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다…….’
염치가 없어서 차마 다인에게는 직접 말하지 못한 사과를 중얼거리면서 정광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차진석이라고 합니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면서 성진에게 다가온 남자.
차진석 팀장을 보면서 성진은 점잖은 미소로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 순간.
‘뇌파 스캔을 가동시켜.’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의 대답과 함께 차진석의 뇌파가 스캔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정신방어를 위한 훈련을 받지 않았는지 차진석의 정보는 수월하게 읽혔다.
그저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 차진석은 자신이 공들여서 입안하고 진행해 온 작전을 송두리째 성진에게 들킬 수밖에 없었다.
‘이 작자가 감히?’
이곳에 오기 전 차진석의 행적을 대충 조사한 차였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간혹 발견되는 게 평범한 샐러리맨은 아니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때문에 혹시나 해서 스캔했더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함정과 마주치게 된 성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하하하핫!”
호텔 로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는 성진을 보고 차진석은 순간 당황했다.
“회, 회장님?”
그러면서도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는 차진석을 보면서 성진은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하…….”
차진석은 그저 점잖고 예의 바른 청년의 모습으로 성진을 대할 뿐.
이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뱃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었다.
‘이 새끼!’
터트리는 대신 분노를 참은 성진은 한 손을 올려 차진석의 어깨를 토닥였다.
“차진석 팀장님? 오늘 만나 뵙게 돼서 아주 반갑네요.”
“예. 저도 회장님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음. 그래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 아주 인상 깊은 시간이 될 거 같네요. 갑시다.”
“예. 모시겠습니다.”
정중히 따라붙는 차진석과 주변의 직원들을 훑어보면서 성진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 * *
좁디좁은 엘리베이터 안.
성진을 가운데 두고 차진석과 그의 부하직원들이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차진석이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인 성진은 그저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명백한 무시. 그러나 차진석은 속으로 득의양양했다.
‘좋았어, 한성진. 넌 오늘로 끝이다.’
오늘 일이 지나면 차진석은 강후그룹의 팀장직을 사임하고 해외로 이민 수속을 밟기 위해 준비를 해뒀다.
물론 보수는 넉넉하다. 이제까지 그룹에 입사해서 벌어들인 돈의 열 배에 달하는 액수를 단번에 받는다.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기에 받는 액수다.
바로 이 나라에서 최근 가장 주목받는 기업 네오 테크비전의 주인이자 급속히 거물로 떠오른 한성진 회장을 몰락시키는 임무였다.
‘젊은 나이에 잘 나가니까 눈에 뵈는 게 없겠지? 짜식 한 치 앞을 모르고 잘난 척은.’
속으로 이죽거리는 차진석이었다.
그때 성진이 진석을 돌아봤다.
“차 팀장님?”
“예?”
순간 당황한 차진석이 눈을 끔뻑거리는 그 순간이었다.
성진이 속으로 인공지능 팔찌에게 명령을 내렸다.
‘호텔 중앙 시스템에 침투해서 내 모습을 찍은 감시화면을 지워.’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의 대답과 동시에 호텔 중앙 시스템에서는 아무런 징후 없이 성진의 모습이 착착 지워지기 시작했다.
성진의 명령은 다시 이어졌다.
‘인지 가속을 실행시켜.’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지가속 실행.
직후 성진의 눈앞에 있는 차진석의 얼굴 근육이 정지했다.
숨결, 공기의 흐름, 동공과 옷깃에 달라붙는 먼지의 움직임마저도 정지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의 찰나의 극히 짧은 시간 속에서 오직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성진뿐이었다.
정신은 온전하다.
그러나 성진의 몸은 시간이라는 장벽에 막혀서 느릿느릿 움직일 뿐이었다.
‘흡!’
성진은 안간힘을 쓰면서 사지를 뻗었다.
전력을 쥐어짜면서 움직인 성진의 손이 한 놈 한 놈씩 뒷덜미의 혈관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모든 놈의 뒷덜미를 찍어 누른 후 성진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인지 가속을 풀어!’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지가속 정지.
-두뇌 인지 충격을 조정합니다.
인공지능 팔찌가 인지 가속을 멈춘 그 순간.
눈앞의 시야가 흔들림과 동시에 압력을 견디던 성진의 신체 일부 세포가 급격히 붕괴했다.
“큭.”
즉시 통각 신경을 인공지능 팔찌가 차단했지만, 찰나에 전달된 격통은 견디지 못한 성진은 외마디 신음을 질렀다.
-신체 반응 확인
-각 부위 손상도 점검 및 수복 절차를 진행합니다.
즉각 인공지능 팔찌가 성진의 신체 곳곳에 깔아둔 나노 로봇을 통해 신체 치료에 들어갔다.
성진의 육체가 2단계 발전단계에 접어들면서 웬만한 부상쯤은 나노로봇과 인공지능 팔찌의 조력으로 즉각 치료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시간이 꽤 걸려서 무려 1분의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치료가 완료될 수 있었다.
“젠장. 역시 함부로 쓸 게 못 되는군.”
인지 가속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기술이다.
상대를 꼼짝없이 제압할 수 있고 위험을 피하게 하지만 성진의 신체는 강철이 아니다.
비록 성진의 시야에는 한없이 느릿하게 보이지만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성진의 신체가 막대한 압력과 열압을 견뎌야 한다.
성진은 인지 가속 기술을 쓸데없이 남용할 경우 성진 자신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흐읍.”
치료가 끝난 뒤에야 성진은 엘리베이터 안에 꼼짝없이 널브러진 차진석과 그 부하직원들을 둘러봤다.
녀석들은 모두 세상모르고 죽은 듯이 엘리베이터 벽에 기절해 있었다.
“잘 자고 있어라. 금방 끝내줄 테니.”
마침내 목표한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달했다.
성진은 차진석의 머리를 발로 가볍게 차준 다음 엘리베이터에서 모두를 한꺼번에 끌어내 복도 구석에 숨기고 행동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