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19화 (119/185)
  • <-- 119 회: 5권 - 마각 -->

    물론 그런 직구에 당황할 만큼 광호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에헤. 초면에 이 정도 살펴보지도 못합니까? 팍팍한 성격이시구만.”

    너스레를 떠는 광호를 보면서 남자는 피식거렸다.

    “하아. 그래요. 뭐 내가 이런 자리에서 우리 정 사장님이랑 길게 말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더니 자켓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뽑았다.

    “받아요.”

    명함을 받아든 광호가 내용을 확인하자 절로 표정이 달라졌다.

    [강후전자 대외홍보전략 2팀 / 팀장 차진석]

    열이 팍 오르는 듯한 아찔한 느낌. 머리에 김이 서리는 기분이었다.

    “가, 강후전자……. 강후전자에서 저 같은 사람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광호의 질문에 차진석은 반문했다.

    “글쎄요. 왜 찾을까요? 우리 정 사장님이 쓸데없이 그런 이유 고민하는 것보다는 내려온 동아줄을 감사히 받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마디로 질문할 생각 말고 고분고분 말 들으라는 소리였다.

    광호는 순간 성질이 뻗쳐서 뭐라 한마디 지르려다가 차진석을 보는 순간 마음을 접었다.

    ‘젠장. 참자. 강후전자라잖냐.’

    세계 최고의 전자 회사이자 이 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대기업인 강후 전자.

    강후 그룹의 핵심이기도 하고 그만큼 국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한 기업이었다.

    ‘만약 진짜라면……. 이건 정말 기회다.’

    광호는 잠시 성질을 누그러뜨리기로 결심했다.

    “강후 전자에서 저같이 별 볼 일 없는 놈은 왜 찾으시는지 놀라서 그렇지요 뭐. 헤헤.”

    연예계에서 밑천도 인맥도 없는 광호였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고개 숙이고 아첨하는 것은 너무 익숙했다.

    그런 광호의 모습을 차진석은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질구레한 소리는 됐고 내일 오전 10시까지 강후 전자 본사에 찾아오세요. 좋은 제안이 있으니까. 그럼 내일 봅시다.”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돌아서는 차진석을 보면서 광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좋은 제안이요? 어어? 아니 팀장님 뭐 구체적인 얘기라도……. 팀장님?”

    광호의 부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진석은 묵묵히 걸어가 사라질 뿐이었다.

    “어어, 팀장님!”

    그때 광호의 밴 문이 열리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다인이 뛰어 내려왔다.

    “사장님! 뭐하세요?”

    사람들 앞이라고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다인을 보니 광호는 새삼 기가 막혔다.

    ‘이 천상 요물 같으니…….’

    결국 광호는 쫓으려다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다인을 데리고 들어서는 떠들썩한 촬영장 마무리 분위기 속에서 광호는 손안에 들어온 명함만을 만지작거렸다.

    “강후전자……. 차진석 팀장이라…….”

    너털웃음을 흘린 광호는 옆에 가는 다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널 위해서라면야 까짓 거 뭔들 못하겠냐.”

    “엉?”

    의아해하는 다인이 작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대체 새삼 뭔 헛소리세요? 피곤해?”

    “으이구. 몰라도 된다, 인마.”

    광호는 작게 메롱을 날리는 다인을 뒤에 두고 조용히 손안의 명함을 지갑에 챙겨 넣었다.

    *   *   *

    다음날 강후전자 본사로 찾아간 광호는 경비원의 안내를 받으며 홍보전략실 사무실로 들어섰다.

    각종 기계음, 서류 넘기는 소리, 업무 지시 등으로 수런거리는 사무실을 가로질러 전략 2팀이라 명패가 박힌 사무실 문 앞까지 이르렀다.

    “여깁니다.”

    정중히 묵례하고 돌아서는 경비원을 뒤로하고 광호는 사무실 문앞에서 홀로 땀을 훔쳤다.

    ‘아 놔 씨. 괜히 긴장되네.’

    일생을 배짱으로 살아온 그였지만 막상 국내 최고 전자 대기업 본사 건물에 들어오자 목구멍에 침이 고였다.

    -똑똑

    손등을 들어 노크를 하자 곧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 익숙한 얼굴이 앉아 있었다.

    어제 본 것처럼 말끔한 정장 차림.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훑어보는 듯한 기분 나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광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다시 소개하죠. 차진석입니다. 어제 명함 받았으니까 바로 본론 갑시다.”

    차진석은 손을 뻗어 소파 쪽 자리를 권하고 광호를 앉혔다.

    마주 앉은 광호를 두고 차진석은 본론을 꺼냈다.

    “우리 정 사장님은 한성진 회장이라고 아십니까?”

    “한성진 회장이요?”

    광호는 익숙지 않은 이름에 퍼뜩 머리를 굴렸다. 그러자 곧 뉴스에서 스쳐 지나간 장면이 떠올랐다.

    “아아! 예. 그 얼마 전에 우크라이나에서 협상 마치고 왔다는 그 젊은 회장 말입니까?”

    “역시 아시네요.”

    “예, 뭐 저도 뉴스는 보고 사니까요.”

    “좋아요. 그 한성진 회장하고 우리 강후 전자가 사업 협력을 맺는 게 내가 맡은 목표입니다.”

    “사업 협력이요?”

    “그렇습니다.”

    물론 속내는 따로 있었다.

    ‘댁 같은 사람은 알 필요 없는 얘기가 있지.’

    바로 한성진 회장을 개인적으로 얽어매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구상되어 있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험한 내막을 광호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런 일에 왜 저 같은 사람이……. 저는 아무런 힘도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인데요.”

    “어허 이거 참.”

    차진석은 입술을 샐쭉 비틀었다.

    “알만하신 분께서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뭐 정 사장님 보고 나서달라고 합니까? 정 사장님 쪽에는 그……. 아리따운 다인 양이 있지 않습니까.”

    “다인이를요?”

    “예.”

    소스라치게 놀라는 광호를 보고 차진석은 피식거렸다.

    “거 참. 내숭 떨지 맙시다. 알 만한 사람들끼리.”

    “어어. 아니 그, 이게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광호는 당황한 척 허둥거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냉정하게 상황을 재려 애썼다.

    ‘다인이를 원한다고? 도대체 왜? 설마 한성진 회장하고 우리 다인이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광호는 차진석을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진석도 광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 사장님. 정광호 사장. 일생에 기회라는 것이 많이 오질 않아요. 한두 번 오고 마는 거지. 그리고 그 기회를 어떻게 날리느냐에 따라 똥우박이 떨어지기도 하는 거야. 뭘 그렇게 튕기세요?”

    차진석은 고압적인 자세로 은근히 광호를 압박했다.

    물론 고작 그런 말수작에 놀아날 광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이 자리에서 쉽게 답을 짓고 끝낼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차 팀장님.”

    “왜요?”

    광호는 윗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팀장님 하시는 말 모를 만큼 저도 멍청한 놈은 아닙니다.”

    “아하. 그러셨어요? 그래서요?”

    실실 웃는 차진석을 보면서 순간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광호는 참고 말을 이었다.

    “저 다인이하고 말 좀 해봐야겠습니다.”

    “음. 좋아요. 정 사장. 대신에…….”

    차진석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정 사장. 생각 똑바로 해야 할 겁니다. 만약에 어리석은 결론을 내리면 내가 정 사장하고 맞대면한 게 헛수고가 되니까 그만한 대가를 줄 거예요. 내 직함이 그 정도 힘은 있거든요?”

    생긋 웃는 차진석을 보면서 광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 명심해야지요. 헤헤.”

    속없는 표정으로 웃으면서도 광호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으로 뜨거워졌다.

    *   *   *

    돌아온 광호는 곧바로 다인을 불렀다.

    사무실 아래에 비치된 운동기구장에서 한창 몸매 관리를 위해 운동 중이던 다인이었다.

    땀에 절은 피트니스복 차림새로 광호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심각한 표정의 광호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

    연예인, 특히 배우는 주변 파악능력이 직감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이다. 그녀가 본 광호의 상태는 심각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즉각 느껴졌다.

    “다인아.”

    입을 연 광호가 다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미안한 얘기 좀 해야겠다.”

    *   *   *

    한참이 지난 후 모든 얘기를 들은 다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얘기 들으려고 아침부터 나간 거야?”

    서늘한 그녀의 목소리를 광호는 묵묵히 받아 들었다.

    “사장님. 아니……. 오빠 이런 사람이었어? 이제까지 5년 동안 나 오빠 믿고 달렸는데 이제 와서 이런 걸 가져와? 그래?”

    “다인아…….”

    고개 숙인 광호는 쓰게 웃었다.

    “그 얘기 들었을 때 나도 기분 드러웠다. 열 받았어. 근데 말이다.”

    광호는 고개를 들어서 다인을 바라봤다.

    “어쩌면 나 이런 순간을 기다려온 게 아닐까 싶기도 하더라.”

    손이 떨려왔다. 앉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광호는 움직이기 힘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으면서 다시 말했다.

    “너 민증 나오기 전부터도 네 몸뚱이 한번 품어보겠다고 돈 보따리 내미는 인간들 많았다. 근데 그때마다 나 단칼에 쫓아냈다. 그런 푼돈에 팔아먹기에는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어. 네가 톱스타가 돼서 전 국민이 네 얼굴을 알아보는 그날만을 생각했다. 근데…….”

    “그래서? 그 얘기 들으니까 눈깔이 뒤집히디?”

    다인은 이를 갈아붙이면서 소리를 질렀다.

    광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눈깔 뒤집히는 건 아니더라도 귓전이 확 트이더라. 혹하더라. 솔직히 강후전자 얘기야 그렇다 쳐도 너랑 직접 엮는다는 그 한성진 회장, 어마어마한 거물 아니냐.”

    광호는 지난 세월을 생각했었다.

    소위 말하는 빽도 돈도 없이 시작해서 맨몸뚱이로 굴러가며 애지중지 다인을 키워온 지난 세월이었다.

    다인을 만나기 전부터 굴러 온 밑바닥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광호는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나도 너도, 이제 고생 좀 그만 하고 엘리베이터 좀 탔으면 싶더라.”

    “뭐? 그게 할 소리야!”

    다인은 소리를 꽥 질렀다.

    “이제 주연 자리까지 올랐잖아. 연기상 후보도 올랐고 조금씩 올라갈 기회가 보이잖아. 근데 이제 와서 엘리베이터 타고 싶다고?”

    “기회가 눈에 보이는데 마음이 안 동할 수가 있냐? 다인아. 어차피 결정은 네가 내리는 거다. 난 그냥 따를게. 6년 전에 나 만났을 때도 네가 결정했다. 결정은 네가 하는 거고 판은 내가 깔았어. 이번에도 그렇게 하자.”

    광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동안 다인은 앉은 자리에서 계속 이를 갈았다.

    “이 나쁜 새끼가…….”

    결정은 자신이 내리라니. 다인은 기가 막혔다.

    광호는 다인을 잘 안다. 낳고 기른 부모보다 다인의 본성을 잘 알 것이다.

    그런 다인에게 결정권을 주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광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이 새끼 정말…….”

    그래서 다인은 이를 북북 갈았다. 한참을 그러던 다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6년 전, 어여쁜 소녀가 광호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저씨. 나 부자로 만들어줘요. 나 예쁘지 않아?’

    소녀는 자신이 예쁜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무기가 되고, 돈이 된다는 것 또한 알만큼 영특하고 영악했다. 또 그걸 알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사채를 떠맡기고 자살해버렸으니까.

    광호는 그 소녀가 흘렸던 무시무시한 독기를 기억했다.

    그 힘으로 6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하는 모습 또한 지켜봤다.

    그래서 다인이 어떤 답을 내릴지 잘 알았다.

    “아저씨.”

    문을 열고 나온 다인이 말했다.

    “하자. 까짓것…….”

    다인의 표정은 담담했다.

    “다인아…….”

    그 사이에 울었는지 약간 부은 눈을 손으로 가리면서 다인은 고개를 돌렸다.

    광호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광호를 외면하면서 다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차피 나 같은 년 팔자에 뭐…….’

    광호도 다인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다인아…….’

    그렇게 두 사람은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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