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18화 (11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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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각

    한국 최고의 재벌그룹인 강후그룹 회장실.

    그곳의 주인인 하재혁은 최근 들어온 보고에 마음이 언짢았다.

    “결국 잡혔다? 꼬리는 확실히 잘랐고?”

    “예, 회장님. 잡힌 녀석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절대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보고를 올리는 비서실장은 하재혁의 눈치를 살폈다.

    “좋아. 긁어 부스럼 없도록 뒤처리 잘하고,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돌봐주도록 해.”

    “예. 회장님.”

    “그리고…….”

    하재혁이 잠시 망설이며 입술을 곱씹다가 말을 이었다.

    “어르신……. 그 양반한테 연락 좀 넣어봐.”

    *   *   *

    한참이 지나서야 연락이 닿은 노인과의 통화에 하재혁은 은근한 불만이 들었다.

    ‘내가 연락하자고 한 지가 한참인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노인의 목소리가 지극히 평온해서 더더욱 마음이 안 좋았다.

    이 나라 최고 대기업의 총수인 자신을 기다리게 할 정도로 위세를 부리고 싶은 걸까.

    하재혁은 이런 문제로도 퍽 감정이 상하는 자신이 유치하다고 느꼈지만, 상대가 문제였다.

    실제로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동맹자였기에 더더욱 태도에 신경이 쓰였다.

    -하 회장. 오랜만이오.

    그 느긋한 목소리에 하재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받았다.

    “예.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무슨 일이요?

    “한성진이 감시하는 거 그만둬야겠습니다.”

    -어허. 하 회장. 고작 그런 잔챙이들 걸렸다고 소심해진 거요?

    노인은 바로 하재혁이 말하려는 본론을 짚었다.

    분명 하재혁이 무슨 의도로 전화한 것인지 따로 조사를 한 다음 연락을 넣은 게 분명했다.

    ‘이 망할 노인네가 딴 꿍꿍이 피우느라 연락을 늦게 했구만.’

    하재혁은 짜증이 났지만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뭐, 아실 테니 더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전 소심해서 나라의 정보기관하고는 못 싸웁니다. 뒷일은 어르신이 처리해 주십시오.”

    -으흠. 하 회장 그렇게 안 봤는데……. 보기보다 소심하구만. 알았소. 내 뒤처리는 해 드리지.

    빈정거리는 노인의 말투가 거슬려서 하재혁도 저도 모르게 마주 빈정거렸다.

    “저같이 소심한 장사치가 어르신만 한 분과 배포를 겨루겠습니까. 잘 좀 이해해주십시오.”

    -오호? 하 회장. 상처받으셨나? 그 나이에 원. 클흘흘. 그래요, 내 말조심해 드리지. 하하하.

    노인의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놀림에 하재혁은 금방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이렇게 마음을 유치하게 드러내서는 안 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황태자였다. 중년에 이르러 강후그룹의 총수가 된 뒤로 자신과 맞먹는 이들과는 겨뤄본 적이 드물다. 때문에 하재혁은 노인과의 기 싸움이 불편하다.

    더 이상은 말려들어 갈 수 없다고 생각한 하재혁은 서둘러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나중에 찾아뵙지요.”

    -아! 하 회장. 끊지 마시오. 내 따로 할 말이 있거든.

    “……무슨 말씀을 하시려구요?”

    -그 한성진이라는 녀석. 정공법이 어려우면 다른 방향으로 찔러야 하지 않겠소?

    “다른 방향이요?”

    -그게 말이오…….

    뇌까리는 듯한 노인의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울려왔다.

    *   *   *

    우크라이나 협상 체결 이후 윤진만 변호사에 대한 인지도는 착착 상승하고 있었다.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 수시로 여론 조사 결과를 보고받으며 흡족해했다.

    “나쁘진 않네.”

    단기간 급격하게 이미지와 인지도가 상승한 것을 감안하면 괄목할만한 발전이었다.

    -현재 윤진만 변호사에 대한 차기 대선주자로서의 평가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향후 대선 정국에서 윤진만 변호사를 후보로 상정하는 분석 기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인공지능 팔찌의 보고에 성진은 안도했다.

    여론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씩 잔물결이 되어 성진이 가리키는 단 한 곳을 향해 일렁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잔물결이 조금씩 모여 파도가 되는 순간이 조만간 올 것이다. 오고야 만다. 성진 자신이 꼭 그렇게 만들 것이다.

    “회사로 가자. 네오 테크비전으로.”

    -예.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가 모는 성진의 차는 네오 테크비전 사를 향해 달려갔다.

    *   *   *

    고요한 강변. 두 명의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며 걷고 있었다.

    청초한 눈빛이 반짝이는 아리따운 숙녀, 그리고 그녀 옆에서 따라 걷는 상처투성이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

    아름다운 숙녀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사랑해요.”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의 입맞춤.

    입술은 열정적이었지만 표정에는 수줍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커어~트! 좋앗! 아주 좋앗!”

    호쾌한 중년 남자의 음성. 그리고 숨죽인 채 지켜보던 주변 청중들의 환호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방금 전까지 다정한 연인의 모습으로 키스를 나누던 두 남녀는 황급히 떨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다인씨.”

    남자가 정중히 숙이며 악수를 건네자 여자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뭐에요? 내 악수 안 받아주는 거예요?”

    남자가 눈웃음을 치며 여자를 노려보자 그제야 여자는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그럴 리가요. 고생했어요. 준혁씨.”

    여자, 다인도 마주 보며 생긋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눈만은 웃지 않았다.

    ‘이 망할 자식이 진짜!’

    남자가 다인의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손가락을 움직여 살살 손을 긁고 있었다. 그 느낌이 마치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라 짜증이 치솟았다.

    더더군다나 평소에도 은근히 추근거리던 남자였기에 다인의 불쾌감은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표정에 미동조차 없었다.

    아직 20대 초반 나이에 벌써 올해 여자 우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그녀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연기의 프로!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손을 빼낸 그녀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우아하고 선한 미소를 지으면서 총총히 밴을 향해 걸었다. 주변의 구경꾼들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보낼 때 의식한 듯 아닌 듯 미소를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은청색 밴을 향해 들어가 문을 닫았을 때 기다리던 여성 매니저에게 바로 손을 뻗었다.

    “물수건! 빨랑 줘!”

    “어, 여기 있어.”

    잽싸게 물수건을 건네받은 그녀는 한 손에 수건을 꾸욱 쥐고 악수한 손을 벅벅 문질러댔다.

    “아오오오! 재수 털려 정말! 이 망할 자식이이…….”

    그악스럽게 이를 북북 갈아붙이는 그녀를 아마 밖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리라.

    맑고 순수할 것만 같은 천사 같은 외모의 그녀를 세상 사람들은 박다인이라 불렀다.

    18살에 데뷔해서 올해 23살인 5년 차 연기자.

    그리고 방금 마지막 장면 촬영을 끝낸 드라마를 통해 2달 연속 시청률 1위의 기염을 토한 주연급 배우였다.

    “오빠. 아니, 사장님. 다음부터 절대 최준혁 저 자식이랑 일 잡지 마. 나 절대 안 할 거야.”

    콧김을 씩씩대면서 눈을 부라리는 그녀를 보면서 조수석에 앉아 있던 30대 남성이 피식 웃었다.

    “인마. 네가 아직 일 가려서 받을 급이 돼?”

    “어머? 왜 안 돼? 나 올해 연기 우수상 후보 물망 오른 거 몰라?”

    “얼씨구. 누가 들으면 우수상 이미 받은 줄 알겠다. 시청률 잘 나와서 후보자리 넣어준 거야. 아직은 몰라. 그리고 그거 받는다고 네가 갑자기 위세 부려도 될 거 같아? 너 아직 톱스타 자리에는 못 올라갔다.”

    “아휴. 우리 사장님 참 재미없으시네. 이런 상황에선 좀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니야?”

    투덜대는 다인에게 남자는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아직 멀었다. 네가 나 같은 놈은 우습게 알만큼 톱스타가 되지 않으면 어림없어.”

    “칫. 정말 그러면 삐칠 거면서.”

    “삐치기는. 우리 다인이가 톱스타가 되면 나야 좋아죽지? 하하핫.”

    남자. 올해 나이 서른다섯의 다인이 속한 아누비스 기획의 사장 광호는 껄껄대며 웃었다.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진 호남형의 건장한 체구. 업계에서는 박다인이라는 괜찮은 재목을 우연하게 건진 행운아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다인이 지금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는 데에는 광호의 헌신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이제 작품 끝났으니까 몸 관리 철저하게 하면서 푹 쉬어. 얼굴이든 바디든 한군데라도 소홀히 하지 마라. 늘 말했지? 연예인은 몸으로 먹고사는 거라고.”

    “칫. 나 데뷔 5년 차거든?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래, 이 아저씨가.”

    다인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리자 광호가 낄낄 웃었다.

    “허허. 야, 내가 아저씨냐 오빠냐 대체. 호칭 좀 통일해.”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를 테니까 상관 마셔.”

    기 센 다인은 광호의 험상궂은 인상에도 아랑곳없이 마주 보며 으르렁댔다.

    그만큼 서로 친밀한 신뢰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예계는 화려하고 성공의 기회가 널려 있지만 아차 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다분한 분야다.

    아직 다인 외에는 이렇다 할 스타를 길러 내지 못한 광호에게나, 광호의 회사를 둥지 삼아 조금씩 입지를 쌓아가는 다인에게나 둘은 연예계의 경쟁을 버텨내기 위한 전우관계였다.

    “으이구. 이 선머슴아…….”

    광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 촬영 끝났으니까 스텝들한테 인사는 해야지.”

    “알았으니까 빨랑 나가기나 하셔.”

    “오냐.”

    광호가 차 문을 열고 나오자 드디어 마지막 촬영이 끝난 현장의 훈훈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힘든 고비를 끝낸 동료들이 우의를 다지는 덕담이 이어지는 모습을 광호는 말없이 지켜봤다.

    “그래. 이렇게 또 하나 끝내는 거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이번 작품은 다인에게 아주 좋은 필모그래피가 될 터였다.

    작품의 성공으로 인기와 인지도가 확 올라섰고 차기작 시나리오도 벌써 여러 건 들어왔지만 다인의 장기적인 컨디션을 위해 광호가 반려한 상황이었다.

    드라마 제작투자 비용을 광호가 일부 댈 정도로 모험을 했지만 결국 성공을 해냈다.

    ‘헤헤. 내가 감각은 좀 있지.’

    어려운 선택이 좋은 결과로 돌아오자 광호는 흐뭇했다.

    그때 양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광호에게 다가왔다.

    “정광호씨?”

    “예?”

    “정광호씨 맞으시죠?”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광호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낯선 남자의 모습을 훑어봤다. 나이는 어려 보이는 게 이십 대 중후반쯤 될까 싶다. 옷차림은 펀칭 장식이 세련된 구두에 빛깔이 고급스러운 격식 있는 양복.

    ‘비싸 보이는데…….’

    일단 차림새는 돈 냄새가 난다. 그리고 그다음은 행동거지나 말투다.

    이 바닥을 구르면서 겉모양만 멀쩡한 놈들이 더러운 꿍꿍이로 접근하는 경우를 숱하게 당했다. 그때마다 광호는 세심하게 감별하는 눈썰미와 관찰력으로 조심조심 돌다리를 건너왔다.

    남자는 그런 광호의 눈치를 알아챘는지 입가에 비웃음을 띄었다.

    “날 간 본다고 뭐 알 거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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