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16화 (116/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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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

우크라이나 정부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성진은 즉시 협상단을 이끌고 귀국했다.

비행기가 드디어 공항에 착륙을 끝내자 일행들은 벨트를 풀고 내릴 준비를 했다.

그때 스튜어디스가 다가왔다.

“한 회장님. 공항에 취재 기자단이 몰려와 있습니다. VIP전용 비밀 출입구가 있는데 이용하시겠습니까?”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문으로 나가겠습니다.”

성진이 이 일을 벌인 자체가 윤진만 변호사가 사진이 찍혀서 얼굴을 팔리게 만들 심산으로 벌인 일이었다.

그런 마당에 일부러라도 불러야 할 기자들을 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예.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스튜어디스가 정중히 인사하고 잠시 뒤로 물러서서 휴대폰으로 연락을 했다.

상황 보고가 이어진 후 스튜어디스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죠?”

성진이 심드렁하게 말하는데 승무원이 긴장하며 말했다.

“취재단이 생각보다 너무 많습니다. 일반 승객들을 먼저 입국시킨 뒤에, 회장님 일행분이 나서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을 들어보니 이건 오히려 성진이 당연히 감수할 문제였다.

자신들을 취재하러 온 기자단 때문에 일반 승객들에게 불편이 돌아가선 안 될 일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무슨 상황인지 잘 알겠습니다.”

성진이 도리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자 승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돌아선 승무원은 총총히 걸어 나가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대규모 기업 총수들은 젊든, 나이가 많든 간에 자존심이 대단히 세다.

이런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기업 고위 임원 정도만 되어도 승무원에게 막 대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곤 할 정도였다.

‘후우……. 다행이다.’

욕까지 먹을 각오를 했는데 다행히 상황이 무사히 넘어갔다.

베테랑 승무원인 그녀의 목덜미로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잘 됐습니다. 이해해 주신다고 합니다.”

-알았어요. 수고 많았습니다.

휴대폰으로 보고를 올린 뒤에야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그녀였다.

*   *   *

 초감각에 대한 금제를 일부 해제한 성진은 그 상황을 알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성진이 당연히 이해해야 할 문제였다.

부당한 요구도 아니었고 무리한 요구도 아닌 요청.

그런데 왜 승무원이 저렇게 긴장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눈치를 볼 일인가?’

성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인지라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옆에서 성진을 수행하며 눈치를 살피던 회사 임원 한 명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항공기 안에서 진상 부리는 VIP승객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원칙적으로 무조건 친절해야 하는 게 승무원 역할인데다 일이 벌어져도 쉽게 가부를 밝히기 어렵습니다. 고위 직책을 가진 사람이면 배경이 탄탄하니까요.”

“하긴 서비스업이니 그런 어려움이 있겠군요.”

“예. 회장님.”

진상 손님은 백화점이나 편의점을 떠올렸지 설마 항공기 같은 특수한 공간에서 그런 짓을 벌이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의외네요. 항공기 내에서도 그런 짓을 벌이는 인간이 있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윤진만 변호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사람들 때문에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있는 거죠.”

“윤 변호사님은 그런 사람은 안 되실 거라 믿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미소를 짓는 윤 변호사를 향해 성진이 손을 내밀었다.

“슬슬 가시죠. 오늘의 개선장군님!”

*   *   *

공항 게이트 근처에는 다른 날과 달리 유난히 취재진들로 북적였다.

이유는 성진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드디어 안티 라디오의 기술 수출이 체결됐다는 소식에 매스컴은 흥행의 조짐을 봤다.

나라 안팎에 어차피 희망이라고는 없는 판국이었다.

사람들한테 번듯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희망, 뭔가 새로운 돌파구처럼 보이는 그런 그림이 필요했다.

청와대와 정부의 의도는 국민들에게 그런 그림을 보여주자는 거였고 언론에서도 고대하던 바였다.

“한성진 회장님! 여기 좀 봐주십시오!”

“회장님 여기 시선 좀 부탁드립니다!”

여기저기서 성진을 연호하며 플래시를 터트렸다.

그런 와중에 성진은 윤진만 변호사가 돋보이도록 위치를 잡으며 옆에서 속삭였다.

“이따가 변호사님 활약을 강조할 테니까 적당히 겸손하게 말씀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성진은 주변에 모인 기자들에게 적당히 반응해주면서 공항 한 켠에 마련된 프레스룸으로 장소를 옮겼다.

*   *   *

회견의 중심 내용은 단연 경제적 성과였다.

과학 기술의 우수성, 경제적인 파급효과 등등에 대해서 정부 관계자가 일장 연설을 하고, 다음 회의 과정에서 에피소드 같은 것으로 화제가 옮겨갔다.

성진이 재치 있게 말을 받아가며 분위기를 띄우자 이제는 슬슬 윤진만 변호사의 얘기를 꺼내야 할 타이밍이 잡혔다.

미리 성진의 부탁을 받은 대중일보의 곽정수 기자가 슬쩍 눈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윤진만 변호사님이 협상단에 참여하신 건 의외라는 평이 있던데요?”

곽정수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성진의 맞장구를 기다렸다.

곧 성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윤진만 변호사님은 저희 회사 고문 변호사로, 또 검사 출신의 뚝심 있는 법조인이시기도 합니다. 여러 법률적인 도움 면에서…….”

성진은 차분하게 윤진만 변호사의 역할과 도움을 주고받은 일들을 은연중 강조했다.

그 와중에 일반인이 눈치 채기 어려운 성진 특유의 굵직한 존재감이 기자들의 마음속을 건드렸다.

성진은 그동안 자신의 육체적 진화가 어느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지 은밀히 실험을 해왔다.

그 결과 자신이 마음먹고 육성을 냈을 경우 어느 정도 의도한 효과가 발휘될 수 있다는 걸 알아낸 상태였다.

이제 웬만한 기자는 윤진만 변호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좋아. 이쯤 하면…….’

성진은 말을 마치고 윤진만 변호사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곧 윤진만 변호사와의 질의응답이 이어지고 기자들의 격려와 박수를 받으며 회견이 끝났다.

회견장에서 나오는 윤진만 변호사는 처음의 어색한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성진은 그런 윤진만 변호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익숙해지셨습니다.”

“그럼요. 저도 제 몫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 지금도 충분히 잘 해주고 계십니다.”

“허허.”

윤진만 변호사는 잠깐 웃더니 곧 눈빛을 바로 하고 성진을 바라봤다.

“일생에 오기 어려운 이런 큰 기회가 왔는데 허투루 놓칠 수야 없지요.”

“그렇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 정도로도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건 충분하다. 성진은 뒷말을 삼켰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윤진만 변호사는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육정철은 즉각 성진을 청와대로 불렀다.

귀국하자마자 바로 부르는 것이 달갑지 않았지만, 대통령으로서 많이 배려해주는 면이 있었기에 성진은 군소리 않고 달려갔다.

“오랜만입니다. 대통령님.”

“오! 한 회장 미안합니다. 여독이 안 풀렸을 텐데 이렇게 바로 부르게 되었어요.”

“아닙니다.”

성진은 적당히 겸손을 피우면서 육정철을 상대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진도, 육정철 대통령도 눈은 웃지 않았다.

이래나 저래나 마음을 완전히 열기 어려운 것은 피차가 마찬가지였다.

서로 야심이 큰 걸물들이라 만만치 않은 상대방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이에 허례는 여기까지 해도 될 거 같고…….”

육정철 대통령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크라이나는 이제 손을 떠났어요. 나머지는 실무진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논의하면 될 일이고, 이제 다음 차례가 남았어요.”

“다음 차례요?”

“그렇소. 이제 큼지막한 대어가 딸려 나올 때가 됐지. 일본이 남은 거요. 한 회장.”

“일본에 가기 전에 확실히 해둘 게 있습니다.”

성진은 음색을 내리깔았다. 육정철 대통령은 힘이 들어간 성진의 목소리를 듣고 미간을 좁혔다.

“뭐요?”

“다음 대 대선. 그냥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음…….”

대답 대신 침을 삼킨 육정철 대통령은 성진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윤진만 변호사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하는 성진의 뜻은 이미 은연중에 전해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빠르게 욕심을 보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한 회장.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막중합니다. 쉽게 욕심낸다고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요.”

성진의 욕심이 너무 빠르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 말에 빼든 칼을 거둘 성진이 아니라는 것쯤은 육정철 대통령도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님. 전 자신 있습니다. 제가 단순한 객기나 충동으로 저지르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실 겁니다. 전 윤진만 변호사가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성진의 모습에는 단 한 점의 반론도 찔러 들어갈 틈이 없었다. 육정철 대통령으로서는 성진의 뜻을 꺾기 어려웠다.

“일본과의 협상은 육정철 대통령님 개인의 정치적 입지강화에도 의미가 있지만, 저에게는 윤진만 변호사를 대통령으로 만들 교두보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점, 반드시 헤아려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면서 강하게 힘주어 말하는 성진의 말에 육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 성진의 말을 따른다고 그에게 손해가 가는 일은 없다.

다만, 성진이 원하는 것들을 너무 빨리 내주기가 싫었다.

그의 눈에 성진은 너무도 유능하고 젊었다. 달리 말하면 이용가치가 무궁무진하다는 뜻도 되었다.

‘계속해서 붙잡아둘 수 있는 끈이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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