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15화 (115/185)
  • <-- 115 회: 5권 - 해외 진출 -->

    “우리나라 역사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 협상에서도 그런 동질감을 바탕으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협상 테이블에 윤진만 변호사가 끼어든 것은 순전히 성진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아무리 요즈음 재야에서 인기 좋게 뜨기 시작하는 변호사라 한들 이런 중차대한 프로젝트에 윤진만 변호사가 끼어드는 상황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관계자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성진은 윤진만 변호사를 장차 대통령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포부를 잊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아주 기억에 남을 만한 활약보다는, 일본 거래를 대비해서 인상을 남긴다는 선으로 임하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지나친 과욕은 피해야겠지요.”

    윤진만 변호사는 성진의 말이 무엇인지 잘 알아듣고 있었다.

    어차피 회의 실무는 다른 사람들이 진행한다. 진짜 협상과 실무적인 일들은 다 따로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

    윤진만 변호사나 성진이 온 것은 결국 얼굴마담이었다. 여기서 메인은 성진이지만 따라서 같이 얼굴값이 팔리는 윤진만 변호사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게 관건이었다.

    “차후 대선, 몇 년씩 남았다고 하지만 순식간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꾸준히 공천 제안 받고 계시죠?”

    “예. 받고는 있지만 모두 거절하고 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벌써 끌려 다닐 필요는 없지요. 확고한 대선 후보로 자리매김할 순간이 곧 옵니다. 윤 변호사님.”

    “믿고 있습니다. 한 회장님.”

    윤진만 변호사는 성진을 신뢰감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보이겠다는 성진의 약속은 두근거리는 면이 있었지만 사실 처음에는 허황되다고 느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윤진만 변호사는 자신의 명성이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대신 그는 성진이 불어넣은 더 큰 야망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이 되면 많은 걸 바꿔 나가도록 할 겁니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윤진만 변호사님이 법조인이셔서 더 잘 아시겠죠. 대통령은 그저 권력의 일부라는 걸.”

    “예.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윤진만 변호사님이 바꿔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힘을 즉시 실어드릴 겁니다. 민주주의가 실현된 이후로 어느 대통령도 갖지 못한 힘을요.”

    성진의 자신만만한 응원에 윤진만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항상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성진은 윤진만 변호사와 대화를 마치고 등받이에 기대 누웠다.

    윤진만 역시 남은 비행의 지루함을 달래려 몸을 뉘였지만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대통령이라…….’

    불과 몇 년 전에는 감히 꿈도 꿔 본 적 없는 거대한 야망.

    그리고 이제는 곧 잡힐 듯 선명해져 오는 꿈이었다.

    대통령을 향한 첫 행보가 될 우크라이나에서의 일정을 떠올리면서 윤진만 변호사는 애써 눈을 감았다. 그런 윤진만 변호사를 보면서 성진은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   *   *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성진 일행은 곧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협상을 위한 실무진이 따로 먼저 접촉해서 일정을 조율하고 얼굴 마담격인 성진과 윤진만 변호사는 기자들 앞에 회견을 가지며 우크라이나의 미래와 향후 양국 공동의 내일을 맞자는 투의 외교적인 언사를 던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지면서 성진은 일부러 윤진만 변호사에게 비중을 양보했다.

    “사진 잘 나오도록 얼짱 포즈 지으세요.”

    성진이 농담조로 귓속말을 건네자 윤진만 변호사는 성진의 장난이 웃겼는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 또한 연달아 터지는 카메라 셔터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   *   *

    협상은 일사천리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격 부담이었지만 방사능 제거의 대가는 체르노빌 석관 공사비용을 대기로 한 유로 투자 은행이 고스란히 관련 예산을 결재하기로 합의했다.

    물론 일시불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의 철강 자원 수출 등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거래 파트너로 참여하는 등 이익을 거두는 방식으로 계약이 성사되어가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 계약 마감은 며칠 뒤에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성진이 유창한 우크라이나어로 말하자 협상 실무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협상 실무진들과 함께 회의장 건물을 빠져나온 성진은 옆을 지키던 윤진만 변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관광 안 하시겠습니까?”

    “허헛. 저는 됐습니다. 외국에서 중임을 맡다 보니 이거 괜히 긴장되네요.”

    피로를 호소하는 윤진만 변호사가 손사래를 쳤다.

    “아하. 이거 아깝네요. 모처럼 이국인데.”

    “회장님은 한번 가볍게 돌다 오세요.”

    “그래야겠습니다. 이거 모처럼 해외로 나왔는데 선물이라도 안 사가면 가족들이 섭섭해 할 거 같아요. 하하하.”

    “아직 젊으시니까 심심하시겠죠. 일단 저는 호텔로 들어가겠습니다.”

    “예. 살펴 가십시오.”

    윤진만 변호사가 협상단, 우크라이나 측의 경호 인력과 함께 숙소로 향하는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남겨진 성진은 조금씩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우크라이나 도심 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우크라이나의 비밀 경호원들이 따르는 것이 성진의 초감각에 포착되었다.

    ‘이런…….’

    성진은 귀찮았지만, 굳이 따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간 괜히 의심을 사겠지.’

    천천히 걷던 성진은 관광 용품을 파는 조그마한 가게의 진열대에 몸을 기울였다.

    독특한 모양새의 우크라이나 도자기와 보드카가 같이 진열되어 있는 독특한 가게였다.

    “혹시 선물을 고르시는 거예요?”

    감미롭고 낮은 미성.

    “누구시죠?”

    성진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돌아봤다.

    백금색 머릿결에 전형적인 북구 미인상.

    선명한 이목구비에 언뜻 도도해 보이는 인상의 여인이 은은한 미소를 품고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관광객이신가 해서요.”

    여인은 싱긋 눈웃음을 치면서 학생증이 걸린 목걸이를 내보였다.

    학생증에 걸린 이름은 안나 쿠르젠코였다.

    “대학생이시군요.”

    “예. 괜찮으시면 제가 안내를 해드릴 수 있을까요?”

    여인은 사근사근히 대하면서 성진에게 접근해왔다.

    성진은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런. 너무 노골적이잖아.’

    성진은 대번에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의도적인 접근이 분명하다.

    하지만 굳이 피할 이유도 없다.

    우크라이나의 정부에서 파견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이국적인 동유럽 여성 특유의 매력이 있는 여성이었다.

    “그럼 한번 같이 가볼까요?”

    수락을 표시하자 여인은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후회 안 하실 거예요.”

    성진은 웃으면서 자신의 차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사념 파장을 해석했다.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겠지?’

     인공지능 팔찌가 사념 파장을 해석 완료하자 곧 미심쩍은 결과가 나왔다.

    -완전한 해석이 안 됩니다.

    -사념 왜곡형. 특이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곧이어 대사 스캔까지 완료하자 신체 대사 반응을 통해서 심리 반응을 읽어 들였다.

    -약간의 일부 긴장감, 거짓을 말하는 상태와 비슷한 심리 상태가 측정됩니다.

    ‘그래?’

    성진은 그녀 또한 단순한 여학생이 아니라 정보기관 요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흠. 하긴 아무한테나 맡기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정보기관 요원에게 임무를 할당하는 것이 여러 모로 우크라이나 정부 측 입장에서는 편리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정체를 파악해 낸 성진은 어쨌거나 느긋하게 차에 올라탔다.

    “가시죠. 어디로 안내해 주실지 기대되네요.”

    “네. 아주 멋진 데로 안내해 드릴게요.”

    운전석에 오른 여성은 동유럽 여인 특유의 매력적인 눈웃음을 쳤다.

    *   *   *

    “오늘 즐거웠습니다.”

    우크라이나 도심 관광 명소 곳곳을 돌아다닌 성진은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안내역을 맡은 여성은 적절한 설명과 유창한 한국어로 불편이 없게 했다.

    ‘하긴 평범한 여자는 아닌 것 같으니…….’

    애당초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춘 것 자체가 우크라이나에서는 보기 드문 인재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언뜻언뜻 보이는 민첩한 행동은 절대 일반적인 공무원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훈련된 느낌이었다.

    성진의 눈썰미는 그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저한테 접근하신 이유, 협상에 영향을 끼치려는 건 아니겠죠?”

    뜬금없는 성진의 말.

    그녀는 대번에 성진이 눈치 챘음을 깨닫고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사실 필요하다면 저는 당신과 호텔 방에서 같이 묵을 수도 있어요.”

    도발적인 그녀의 말에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이길 바랍니다.”

    “그럴까요? 사실 제 입장을 떠나서 당신은 정말로 매력적인데요? 동양인 남성 중에서 당신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글쎄요. 고맙긴 한데 칭찬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뭐 들켰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체르노빌은 저희 우크라이나에 있어서 엄청난 부담이에요. 국민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구요. 원활한 협조 부탁드립니다.”

    여인은 표정을 진지하게 하고 성진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려 했다.

    성진은 재빨리 정중함을 잃지 않으면서 그녀를 제지했다.

    “아닙니다! 이러지 마세요.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약속드리죠.”

    “감사합니다. 비록 작전은 실패했지만 그 약속, 꼭 지켜주시리라 믿어요.”

    여인은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성진에게 말했다.

    순간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동유럽의 여성들이 아름답다는 말은 들었지만 사실 그녀는 정말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미모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미인계에 동원될 정도니 오죽할까 싶었다.

    ‘정말 예쁘구나.’

    북구 미인다운 희디흰 피부에 뚜렷한 서구적 이목구비를 지닌 그녀가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이라 성진 또한 마음이 잠깐 풀어졌다.

    ‘냉정해야지. 한성진.’

    성진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예. 우크라이나 국민 여러분의 안전을 항시 생각하면서 임하겠습니다.”

    굳게 약속한 성진의 차량은 호텔에 다다랐다.

    *   *   *

    호텔 앞에 도착한 성진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 여성을 차에 태웠다.

    “안나? 본명인지는 몰라도 오늘 즐거웠어요. 잘 들어가세요.”

    “한성진 회장님? 제가 한국에 가게 되면 연락드릴 수 있을까요?”

    “음? 아! 그럼요. 오시면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성진은 밝게 웃으며 정보 요원인지 불분명한 우크라이나 미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택시 차량이 도로 끝으로 사라져가자 호텔 로비에 나와 기다리던 윤진만 변호사가 팔꿈치로 성진을 살짝 쳤다.

    “한 회장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리는 법입니다. 바람은 자제하시죠.”

    “예? 바람이요?”

    성진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박혜영 비서님하고 그런 관계 아니셨습니까?”

    “예?”

    성진은 윤진만 변호사의 오해를 알게 되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저희 그런 관계 아닙니다.”

    “아.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죄송은요.”

    성진은 윤진만 변호사를 잡아끌면서 호텔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혜영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음.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회사에 자주 나오지 않는 윤진만 변호사가 그렇게 알 정도라면 주변에서 혜영과 자신을 어찌 볼지 뻔히 짐작이 갔다.

    ‘음…….’

    엄청난 미모의 우크라이나 여성과 야간 데이트를 즐겼는데도 어쩐지 이국땅에서 금방 혜영의 얼굴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독 이상하게 혜영이 마음에 쓰인다.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려던 찰나 아직 남은 일들을 상기한 성진은 고개를 저어 로비를 나섰다.

    다만 혜영의 선물만은 신경 써서 사 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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