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14화 (11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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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진출

    우크라이나. 프리파야트.

    한때 인구 5만 가까웠던 도시는 이제 빈 건물만 남긴 채로 스산한 적막이 지배했다.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보이지 않는 악마가 체르노빌 발전소로부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이 대도시에까지 날아와 군림하고 있었다.

    이 죽음의 도시를 향해 일단의 차량 행렬이 움직이고 있었다.

    *   *   *

    -도착까지 약 30분 남았습니다.

    -좋아. 다들 긴장 놓지 말고, 복장 점검을 항시 철저히 하도록.

    -옛!

    비록 방독면의 진동음이었지만 무전기 너머로 씩씩한 호응이 들려왔다.

    그들은 민간인 출신의 지원자들이었다. 방사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크라이나에서 나고 자란 이라면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국을 위해 이 죽음의 대지로 가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쌀쌀한 초봄 날씨임에도 무척 더위가 느껴졌다.

    긴장일까. 아니면 불안일까.

    올해 나이 42살의 전직 공병 장교인 그는 체르노빌 발전소의 추가 석관 보강공사 작업을 위해 현장 감독이 되었다. 엄청난 위험과 불안을 떠맡고 가야 하는 장소였다.

    그 말고는 고급의 지휘능력을 갖춘 사람 중 나서려는 이가 많지 않았다.

    특별한 애국심을 갖췄다고 자부한 적은 없지만 오랜 세월 군인으로 생활하면서 쌓아온 직업적인 소명이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잠시 후에 프리파야트 시가를 지나면 체르노빌이 나옵니다.

    -알았다. 다시 한 번 철저히 점검하도록.

    추가 지시를 내린 그는 주변 상황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드디어 차량단은 체르노빌에 접근했다.

    -목표 지점입니다!

    방독면의 무감정한 진동음임에도 긴장과 두려움이 전해졌다.

    -하차!

    -예정된 시뮬레이션대로 작업을 속행한다!

    -옛!

    차량에서 신속하게 내린 인부들이 주어진 임무대로 시설을 향해 내달렸다.

    시간이 황금과도 같았다.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피폭 한계량을 관리하고, 시간이 다 채워진 조원들은 2군으로 빠져서 차량을 타고 즉시 세면장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곧이어 방사능으로 인한 기기 고장 때문에 복잡한 전자 장치를 일부러 제거한 굴착기들이 힘차게 구동을 시작했다.

    -쿠르르르

    뒤이어 레미콘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인부들이 시멘트 제조와 운송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다른 상황들을 수시로 점검하면서 지휘자인 그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보이지 않는 악마와 싸우는 우리 용감한 전사들을 보호해주소서.

    독실한 동방 정교회 신자인 그는 하늘에 계신 주님께 대원들의 안전을 빌었다.

    그때였다.

    -어엇!

    무전기에서 비명 섞인 경악이 터져 나왔다. 즉시 폭음이 울려 퍼지고 시야 먼 끝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냐!

    그의 부하직원이 서둘러 차를 몰았다.

    전속력으로 달려간 그의 차량이 사고 현장 앞에 다다랐다.

    그러자 곧 끔찍한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닥쳤음을 깨달았다.

    ‘주여…….’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의 다른 인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십억 달러가 집행되어 겨우겨우 쌓아 온 체르노빌 석관.

    그 한 귀퉁이가 흉물스러운 이빨을 드러낸 채 함몰되어 있었다.

    *   *   *

    성진을 비롯한 방사능 기술 관련 인사들은 요즘 부쩍 청와대 출입이 잦아졌다.

    본격적으로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모든 정부 관계자들이 긴장의 각을 세운 채로 치밀한 실행계획을 정리 중이었다.

    그러던 찰나 날아든 비보는 외교통상부 전체를 긴장하게 했다.

    “확실하지?”

    국제 통상 분야를 책임지면서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 인원들은 긴장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오늘 새벽에 현지 공사 정보 라인으로 바로 들어왔습니다.”

    “이거 절대 지체되면 안 되겠네. 바로 보고 올려.”

    “예. 알겠습니다.”

    서둘러 보고서를 타이핑하는 직원은 제목을 먼저 뗐다.

    보고서의 제목은 급보!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석관 공사 붕괴였다.

    *   *   *

    이른 새벽 시간, 육정철 대통령은 즉시 프로젝트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성진 또한 새벽 잠자리를 등져야 했지만 본래 수면 자체에 크게 구애되지 않는 편이라 피곤함은 없었다.

    -마스터. 신체 각 부위에 대한 수면 부담 관리를 위한 나노 로봇을 작동하겠습니다.

    ‘응. 그렇게 해.’

    -세포 활성화 머신 작동 시작.

    혹시라도 모를 몸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인공지능 팔찌는 성진의 뇌세포와 각 주요 장기 세포들을 세심하게 관리했다.

    육체 강화가 이루어지면서 장기간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신체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수면 시간 한계에 도달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측정해보지 않았지만 대략 일주일 정도는 수면을 연속으로 취하지 않아도 성진은 실생활에 지장을 느끼지 못했다. 인공지능 팔찌가 운전하는 성진의 차량이 깜깜한 새벽 시간 중 청와대 후문을 통해 진입하자 경비 요원이 즉시 성진의 차량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성진의 차량 창문을 내리자 곧 사전에 지시받은 서류와 성진의 얼굴을 확인한 경비 요원이 가벼운 경례를 했다.

    “통과하십시오!”

    “예. 노고가 많으십니다.”

    성진이 마주 인사해 보이면서 차를 안으로 몰아갔다.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곧 연락을 받고 뛰어 내려온 직원이 성진을 향해 달려왔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의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많이 급한가요?”

    성진은 짐짓 모른 척을 했다.

    그러나 이미 원인은 파악한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석관 붕괴 소식 때문에 이렇게 된 거겠지?’

    이미 국가 주요 네트워크 시스템에 백도어를 심어놓은 인공지능 팔찌의 정보 수집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사실 그간 인공지능 팔찌는 널리 퍼진 정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가공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인터넷이나 대규모 통신에 오르내리지 않은 신속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국가가 운용하는 긴급 정보 네트워크는 아직 성진이 넘보기 힘들었다.

    대신 그 차선책으로 성진은 대한민국 정부 주요 기관에 인공지능 팔찌만이 이용할 수 있는 백도어를 심어 놓았다.

    처음에는 일반 관공서에 스팸 메일로 시작, 곧 종합 행정 네트워크 시스템 전체에 인공지능 팔찌의 백도어가 똬리를 틀었다.

    “예. 매우 심각하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일로 짐작됩니다. 주요 프로젝트 책임자분들이 전부 소집됐습니다.”

    젊은 직원은 성진의 눈치를 보면서 서둘러 안내를 했다. 대통령인 육정철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기에 성진도 발걸음을 서둘렀다.

    몇 개의 지문, 안구 검사 장치를 지나서 마침내 다시 회의실로 안내된 성진은 긴장이 흐르는 분위기를 읽었다.

    가볍게 묵례만 하고 자리에 앉은 성진의 눈앞에 대통령 양옆에 관료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표정의 육정철 대통령이 졸린 눈을 비비며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가 손짓을 하자 다시 회의용 스크린이 켜지고 브리핑을 맡은 관료가 앞으로 나왔다.

    “이렇게 급하게 모신 이유는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석관 보강 공사 중 큰 사고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큰 사고요?”

    “예. 흐릿한 영상입니다만 붕괴 상황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가 리모컨을 누르자 스크린 상에 곧 낮은 화질의 영상이 출력됐다.

    체르노빌 발전소 전체를 덮는 석관 한 귀퉁이에서 금이 간 채로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방사능 유출이 심각하겠군요.”

    성진은 미리 알고 있던 소식이었지만 다른 관료들의 표정을 살피면서 신중히 말을 꺼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석관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한성진 회장님께서 가지신 안티 라디오 기술이 더욱 크게 주목받게 될 겁니다. 사실 체르노빌 석관을 다시 복구하려면 공사비용만 수십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수십억 달러라!”

    가만히 듣고 있던 육정철 대통령이 감탄을 흘렸다.

    일억 달러에 우리나라 돈으로 천백억 원이다.

    십억 달려면 일조 일천억 원. 거기에 수십억이라면 몇조 원에 달한다는 얘긴데 그만한 돈을 우크라이나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본래 유럽 전체의 공동 자금지원으로 진행 중인 공사가 체르노빌 석관 추가 보강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사능 자체를 근원적으로 없앨 수 있는 안티 라디오 기술의 존재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사태가 달라진 거죠.”

    “우크라이나에서도 저희에게 협상 요청을 했었죠?”

    성진의 물음에 브리핑 관료가 바로 대답했다.

    “예. 그래서 곧 협상에 임할 예정이었고 우크라이나도 진행 중인 공사만 마저 마감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시멘트 자체가 변성된 탓인지, 아니면 보강 공사가 잘못된 건지 이렇게 붕괴하여 버렸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기술을 팔 때가 된 건가요?”

    성진은 육정철 대통령을 돌아보며 말했다.

    성진의 눈빛을 받은 육정철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일본을 먼저 공략할 생각이었지만 우크라이나가 정말 급해졌소. 우크라이나 대사가 직접 오늘 중으로 방문할 예정이고, 외신들도 당장 우리가 가진 기술을 거론하기 시작할 거요.”

    성진은 대통령의 걱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위기 상황인데 가지고 있는 기술을 안 풀면 욕을 먹는단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육정철 대통령은 딱 잘라 말했다.

    “한성진 회장. 직접 우크라이나로 가줘야겠소. 당장 지원은 못 해도, 일단 한 회장이 직접 가서 전격적으로 협상을 타결하려는 제스처를 보여줘야 할 거 같소.”

    체르노빌 석관이 붕괴됐다면 이는 큰 문제였다.

    가뜩이나 세계적으로 방사능 재앙이라 유명한 체르노빌인데 이를 해결할 유일한 타개책인 성진의 안티 라디오가 어떤 이미지로 포장될지 중요한 순간임이 분명했다.

    과연 이 꼭두새벽부터 대통령이 회의를 소집할 만했다.

    “알겠습니다.”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크라이나, 기대되는데요?”

    *   *   *

    회사 직원들로 꽉 찬 비즈니스석 안에서 윤진만 변호사는 창밖을 내려다봤다.

    “우크라이나는 어떤 나라일까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성진이 그런 윤진만 변호사의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어떤 나라였으면 하십니까?”

    “제가 알기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연방에서 떨어져 나온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금은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서 있구요.”

    “복잡한 역사가 있더군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진만 변호사는 그런 성진을 마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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