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13화 (11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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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호 전무는 성진의 도덕적인 결벽성을 신경 쓰면서 조곤조곤 말했다.

    냉혹한 대기업에서 반생을 보내온 그가 보기에 성진은 지나치게 도덕적인 기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 나라의 어떤 기업 오너도 성진만큼 도덕적인 가치관을 실제로 행하려 들기란 힘들었다.

    ‘조금 융통성을 발휘하시는 게 편할 텐데…….’

    자신은 측정하기조차 힘든 능력의 소유자인데다가 그러한 능력을 말도 안 되게 젊은 시절에 가졌다.

    그래서인지 박윤호 전무는 성진이 일부러 험한 길을 가려는 오기를 부리는 듯해서 마음이 안쓰러웠다.

    “걱정 마세요. 박 전무님. 저도 일부러 나서서 산통을 깰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서 제가 입 한마디 잘못 뗐다간 주가가 주저앉아서 괜한 원망이나 사겠죠.”

    성진은 자신을 걱정하는 박윤호 전무의 내심을 읽고 빙긋 웃었다.

    “절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바보가 아닙니다.  제가 세운 원칙은 불필요한 손해를 살 만큼 대책 없이 어리석은 게 아닙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지나친 기우였습니다.”

    성진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부하 직원들이 성진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일일이 불안감을 느끼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지도자로서, 조직의 최고 수장으로서 항상 분명한 원칙과 질서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을 주지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참, 여기 계신 임원 여러분께 알려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어떤 소식을 말씀이십니까?”

    임원들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봤다.

    “방사능 제거 기술을 수출하는 데 조만간 정부 차원에서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오오-.”

    “역시! 정부에서도 진가를 알아봤군요.”

    방 안에 모인 임원들은 과연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이들은 애당초 방사능 제거 기술 같은 역사적인 과학기술을 정부가 등한시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방사능 제거 기술은 엄청난 대박이 보장된 기술이었다.

    “하긴 벌써부터 외신에서 난리들이었는데 정부에서 가만 내버려 둘 리가 없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하고, 또 위험합니다. 여러분들 모두 한 명 한 명이 힘을 모아서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진의 간곡한 부탁에 임원들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쳤다.

    “예. 회장님!”

    *   *   *

    성진이 유명세를 타면서 덩달아 성진의 가족 또한 엄청난 주목을 끌게 되었다.

    때문인지 기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부모님의 집 근처에서까지 진을 쳐댔지만 성진의 회사 법무팀이 각 언론사에 전화를 돌리자 금세 사라져버렸다.

    -다 처리했어요. 성진 씨. 이제 언론에서 집 근처까지 쫓아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수고했어요. 혜영씨. 고마워요.”

    -고맙기는요, 뭘. 잘 쉬세요?

    쪼옥-. 입술 빠는 소리가 들리면서 전화가 끊어졌다.

    성진은 이런 혜영의 마음표현이 점점 싫지 않게 느껴졌다.

    ‘흐흥. 확실히 늘 같이 있어서 그런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한 다른 여성들도 모두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요즘은 유독 혜영이 여자로 느껴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집어넣으면서 미소를 짓는 성진을 보고 어머니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눈총을 보내셨다.

    “그 아가씨가 내 며느릿감이냐?”

    “예?”

    성진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어머니. 아직 그런 거 아닙니다.”

    “아직? 음. 그래…….”

    노련한 눈빛으로 성진을 샅샅이 훑어보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성진은 위험 신호를 느꼈다.

    ‘이런.’

    성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저 오늘 좀 볼 게 있어가지구요……. 전 제 방에서 좀 있을게요.”

    허겁지겁 방으로 피하려는 성진을 어머니가 혀를 차시며 노려보셨다.

    “에잉, 나이가 아직 젊으니 장가가라고 성화를 부릴 수도 없고…….”

    허나 서둘러 방문을 닫는 성진을 보면서 어머니는 싱긋 미소를 지으셨다.

    *   *   *

    재계는 결국 돈과 이익이 힘이 되는 세계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이목은 성진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한성진 회장님 언제 오십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언제 오실지 시간이라도 미리 말씀해 주시면…….”

    정부와 네오 테크비전 사의 전격적인 협력 계약이 체결되는 자리.

    언론인들은 물론이고 재계의 인물들까지 나타나 네오 테크비전 사 관련 직원들을 상대로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 글쎄 회장님 도착 시각은 저희도 모릅니다. 일정에는 늦지 않게 도착하실 겁니다.”

    “혹시라도 일찌감치 도착하시면 저희가 잠시 만나 뵙게 될 수 있을까 해서…….”

    “무슨 정신 나간 소릴 하는 거예요? 저희 회장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아휴 아닙니다. 다만 저희로서는 그저 한 번이라도 직접 뵙고 말씀을 여쭤봤으면 하는 바람이라…….”

    중견 이상의 규모를 가진 회사 관계자들이 네오 테크비전 사 직원들과 가벼운 승강이를 벌였다.

    그들은 최근 내내 성진에게 사업 참여 의향을 밝히면서 계획서 등을 신청해 온 회사들이었다.

    물론 성진이 단박에 거절해서 되돌려 보냈기에 그들로서는 몸이 달았다.

    성진의 방사능 정화 기술 수출 사업은 파급될 경제 효과만 수조 원대를 헤아리고 있었다.

    기업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런 모습을 느지막이 도착한 성진이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성진의 질문에 직원들이 황급히 다가왔다.

    “다른 기업들에서 나온 직원들이 회장님을 뵈었으면 한다고 무리하게 요청 중이었습니다.”

    “나를요?”

    성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적당히 제지하시고, 큰 소란 피우면 경찰에 도움 청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돌아서서 들어가는 성진을 향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한성진 회장님!”

    다급한 목소리였지만 성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무리한 접근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아직 성진을 만만히 본다는 증거였다.

    성진은 굳이 상대해 줄 필요를 못 느꼈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지.’

    대접받고, 오만하게 구는 행동은 성진의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남들의 눈에 쉽고 가볍게 보이는 건 손해가 많은 일이었다.

    차분히 협정식 준비가 진행 중이던 연단이 마침내 최종 점검을 끝내고 곧이어 시간에 딱 맞춰 온 정부의 고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성진은 직원들과 함께 다가가 악수부터 건넸다.

    “예. 한 회장님.”

    협정식을 맡은 국장급 공무원이 성진과 힘찬 악수를 나눴다.

    그 모습을 도처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카메라에 담았다.

    *   *   *

    잠시 후 연단식 한가운데에서 협정 계약서를 펼쳐 보이며 성진은 마주 잡은 악수를 훤히 보이고 포즈를 잡았다.

    다시 한 번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가 지나가고 성진은 다시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향후 계획은 어찌 되십니까.”

    “협력 업체 선정이 초미의 관심사인데 어떻게 정해졌습니까?”

    “해외 여론이 좋지 않은데 정부 측과 어떤 대책을 짜셨습니까?”

    갖가지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자 성진은 차분히 웃으며 한 가지씩 대답했다.

    이제는 여러 기자 앞에서 의견을 밝히는 것 자체가 익숙해서 인공지능 팔찌의 근육 이완과 신경 제어도 필요가 없었다.

    성진은 차츰차츰 인공지능 팔찌의 의존도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물론 해외의 악의적인 여론몰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조치를 취해 나갈 겁니다. 그리고 이 기술은 우리나라의 국익과 더불어…….”

    묘한 박력과 이지적인 울림을 주는 성진의 목소리는 현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또렷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이 또한 육체 강화의 결과로 발현되는 작용임을 성진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 이것으로 기자 회견을 마치겠습니다.”

    단상을 내려오는 성진을 보고 누군가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곧 우레와 같은 박수가 번져나가 환호성과 함께 터져 나왔다.

    성진의 연설이 특별히 감동적이어서 박수까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역사적인 업적이 드디어 시작되는 점에 대한 기자들 특유의 찬사였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성진도 가볍게 묵례하며 기자들의 박수에 답했다.

    그렇게 기자회견이 끝나고 성진은 기다리고 있던 고위 공무원들을 향해 접견했다.

    “한성진 회장님의 큰 결단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앞으로 조국을 위해 많은 노고 부탁드립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차피 저도 이 나라의 국민인데 당연히 국익을 생각하는 게 맞지요.”

    성진은 적당한 겸양의 말을 꺼냈다.

    “아무튼, 앞으로 저희 정부 부처 공무원들은 물론, 관련 이하 부서들 모두 안티 라디오의 수출 공무에 적극 협력할 겁니다. 가히, 국가적인 역량이 동원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성진은 공무원들을 배웅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끝났군요. 서둘러 정리하시고 오늘은 일찍 쉬도록 하세요.”

    “예. 회장님.”

    남은 직원들과 진행요원들이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 성진은 다시 집무실에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음?’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성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쉬기는 틀렸군.”

    *   *   *

    청와대.

    외교부의 각 각료와 국제 통상 문제를 전담하는 행정관들, 그리고 예민한 각국 사정을 전담하는 해외 분석 전문관들이 회의 석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에 앉아 회의를 주관하는 이는 바로 육정철 대통령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한 명 더 오기로 한 거 같은데?”

    육정철 대통령이 좌중을 둘러보던 중, 회의실 문이 열렸다.

    “아! 늦었습니다.”

    회의실의 모든 사람이 새로 들어온 이에게 주목했다.

    그는 바로 성진이었다.

    “한성진 회장! 급하게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긴급하게 회의할 문제 같아서 말이오.”

    육정철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면서 정중히 말했다.

    “아닙니다. 대통령님.”

    성진 또한 겸양을 피우면서 정중히 대했다.

    사실 성진이 청와대의 비밀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와 안내를 받긴 했지만, 막상 청와대의 회의석상에 사기업을 운영하는 자신이 직접 참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서 오십시오.”

    정무 수석 비서관이 눈치 빠르게 성진을 자리로 안내했다.

    다른 고위 관료들도 자연스럽게 성진을 응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진은 삼촌, 아버지뻘 되는 관료들을 보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40, 50대가 대부분인 정부 고위 관료 회의 중에 20대 중반에 불과한 성진이 참석하니 기묘한 모양새였다.

    내색은 안 했지만 다들 한참 나이를 먹은 베테랑 고위 공무원들이 젊은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서 회의하는 상황을 어색해하는 듯했다.

    미묘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육정철 대통령이 서둘러 회의 개시를 지시했다.

    곧 개중에 가장 젊은 관료가 앞으로 나와 회의 스크린을 작동시켰다.

    “회의 안건은 앞으로 해외와의 기술 수출 협상 전략입니다. 특히 일본과의 협상 전략에 관건을 뒀습니다.”

    브리핑 자료들과 일본 각국의 정치적 사정, 그리고 방사능 오염도가 실시간으로 지나갔다.

    전문적인 자료들임에도 회의 주제와 실용적인 목표에 맞춰서 간략하게 핵심만 정리되어 있었다.

    과연 국가 최고의 행정 관료들답게 회의 준비는 철두철미했다.

    “한성진 회장. 어때요. 해볼 만하겠습니까?”

    육정철 대통령이 성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직은 미심쩍은 마음을 감추는 그를 보면서 성진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조만간 일본은 우리와 협상에 절대적으로 응하게 될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성진의 대답을 들은 행정 관료들은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젊은 성공가의 치기로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성진의 진면목을 그들이 알게 되는 것은 말 그대로 조만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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