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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성진은 재차 자신이 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십니까?”
“간단하네. 외교적 협상 테이블에서 옵션으로 자네 기술을 거는 거지. 상대방에게는 큰 먹잇감이자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 될 거야.”
성진은 정부 측이 무슨 생각인지 알 거 같았다.
그리고 일부 수긍도 같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었다.
“전투기 기술처럼 전략 기술로 관리하겠다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저희 회사의 관련 소규모 사업까지 관여하시겠다는 겁니까? 또, 그렇게 해서 저희 회사가 얻는 혜택은 있습니까?”
기왕지사 조국을 위해 기술이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성진이 원하는 건 더욱 많았다.
게다가 성진은 정치가를 기본적으로 믿지 않는다.
육정철 대통령은 성진이 다루기 힘든 타입이다.
오만하고, 자신이 기본적으로 남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성격이다. 게다가 오랜 정치 생활로 단련된 본능적인 노회함으로 인해 본심을 숨기는 데도 능숙했다.
‘호구처럼 휘둘려 줄 수는 없지.’
성진은 분명히 얻어내야 마땅한 부분은 얻어내고자 선을 그으려 했다.
“방사능의 대규모 정화는 국가적 규모의 외교 옵션으로 걸어 놓는다고 해도 관련 방사능 방호복 기술이나 소규모의 방사능 정화 사업은 저희 회사가 마음대로 실행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음. 그건 이 자리에서 단정할 수 없는 조건일세.”
육정철 대통령은 일단 발을 빼려 했지만 성진은 무른 인간이 아니다.
“이 조건이 무조건 관철되지 않으면 저희는 정부 측과 협약 자체를 거부합니다. 이 정도면 정말 많은 양보를 한 게 아닌가요?”
“음…….”
육정철 대통령도 더는 억지를 쓸 수 없다고 감을 잡고 있었다.
성진은 어르고 달랠 수 있는 애송이가 아니라는 걸 이미 확실히 깨달았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그리고 또 하나. 저희가 사업을 실행하고 얻은 매출에서 세금 공제 혜택을 주십시오.”
“뭐라? 아니, 세금을 공제해달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세금으로 연구하지도 않은 기술을 국가 외교 수단으로 써먹겠다는데 저희 회사가 일방적으로 희생만 해드릴 수는 없지요.”
“허! 그래. 좋아. 자네 뜻은 알겠네.”
육정철 대통령은 화가 난 어투로 말했지만 사실상 성진의 말을 인정한 것임을 성진은 알았다.
“감사합니다.”
“음. 그래 솔직히 말해서 자네가 이렇게 순순히 협조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고맙게 생각해야겠군. 이건 진심일세.”
의외로 육정철 대통령은 순순히 성진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속으로 성진은 실소를 머금었다.
‘이거 경계심은 더 커졌는데.’
자신을 향한 경계심이 더욱 짙어진 육정철 대통령의 고맙다는 말을 성진은 믿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허허. 자네 날 믿지 않는군?”
슬쩍 떠보려는 말일까. 대통령의 질문에 성진은 마냥 미소로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예의상 던지는 겸양의 말이다.
육정철 대통령 역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해 유감이구만. 하지만 내가 먼저 자네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어쩔 수 없네. 그건 내가 질시와 위협 속에서 살아온 정치인이기 때문이지.”
육정철 대통령은 갑자기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성진은 대통령의 이런 대화 자체가 자신에게 나름대로 접근하려는 시도임을 알아차렸다.
‘진심이든 아니든 예의상 들어는 봐야겠지.’
성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시려는 말씀이 있으신지요.”
“자네 말이야. 나란 사람이 어떻게 보일지 알고 있네. 자기 안위를 챙기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보하려 드는 대통령. 그렇게 보이겠지?”
떠보는 듯한 눈초리. 성진은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사실 그대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사실대로 말하게.”
“솔직히 말씀드려서 대통령님께서 무슨 대단한 애국심이나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 계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진의 직설적인 말에 대통령은 낮은 숨을 토하면서 웃었다.
“크흐. 자네 정말 대놓고 말하는구만. 자네 같은 친구 처음 봐. 물론 자기 깜냥이 감당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게 가능한 거겠지만?”
“불쾌하셨다면 죄송하지만, 저 자신을 믿는 건 사실입니다.”
성진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육정철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 그런 자세 좋아. 나도 그래서 자네를 믿어보고 싶군. 사실 말이야 난 대통령이 될 때 많은 걸 바꿀 수 있을 거라 기대했어. 하지만 이 자리에 오르면 절대 그렇지가 않네. 대통령도 결국 정치의 일부분이거든.”
육정철 대통령의 말을 성진은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함부로 토를 달거나 맞장구를 치기에는 성진이 확실하게 안다고 할 만한 분야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오르고 나니 가장 두려운 게 있어. 바로 역사에 내 이름 석 자가 어떤 대통령으로 기록되느냐지. 나도 내가 별로 인기 많은 대통령이 아니라는 걸 안다네. 그래서 난 자네가 가진 방사능 정화기술에 기대를 한 번 걸어볼 생각이야.”
“기대요?”
“그래. 나는 그걸 가지고 일본과 협상을 벌일 생각일세.”
육정철 대통령은 성진을 바라봤다.
성진도 육정철 대통령의 말을 듣고 분명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독도 문제를 거론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네.”
“음…….”
성진은 육정철 대통령의 야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려면 다른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업적 하나가 필요하다.
그리고 독도 문제를 해결한 대통령이 된다면 근래의 그 어느 대한민국 대통령보다도 육정철 이름 석 자가 빛이 날 게 분명했다.
“독도 문제를 방사능 정화 기술과 맞바꾸려 한다면 외교적으로 문제가 심하겠군요…….”
“그렇겠지.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고, 자네한테도 피해가 있을 수 있어. 사실 내가 자네를 적당히 다뤄가면서 천천히 꺼낼 생각이었지만 자네는 절대 그런 걸 좋아하는 취향이 아닌 거 같군. 그래서 이 자리에서 단박에 얘기를 하는 걸세.”
“알겠습니다.”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면서 육정철 대통령은 차분히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선택권은 성진에게 다시 넘어왔다. 일반적인 외교 옵션으로 다루겠다는 것과 독도 문제를 가지고 맞부딪치겠다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익을 탐하는 기업이라면 영업에 어려움을 끼칠 문제를 수용하겠다고 나설까?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하!”
육정철 대통령은 단박에 동의하는 성진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자네 진심인가?”
“당연합니다.”
“젊은 사람이 섣불리 판단한 거라면 실망일세.”
“저 역시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나라와 상관없이 제 이익만을 탐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대통령님과 면담을 나누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세계 강대국과 접촉해서 높은 대가를 받았겠죠. 더 큰 권력과 명예도 누리면서요.”
“그렇군.”
육정철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망설이듯 말했다.
“고맙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성진을 보면서 육정철 대통령은 속으로 오히려 경계심이 더욱 강해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 세상에 공짜가 있다면 부모님의 내리사랑뿐이다.
성진이 정말 큰 걸 인정했으니 자신도 이제 봐 줄 차례였다.
“받기만 하고 주는 게 없으면 섭섭하지? 말해 보게. 자네는 나한테 부탁할 게 없나?”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일단 작게나마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긴 합니다.”
성진은 느긋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윤진만 변호사라고 아십니까?”
“음?”
육정철 대통령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확실히 떠오르지 않지만 왠지 최근에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일본에는 그분과 같이 가고 싶습니다.”
“그래?”
곧 육정철 대통령은 노회한 정계의 정점답게 말뜻을 알아차렸다.
‘키우고 싶은 사람인가?’
빙긋 웃은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성진에게 말했다.
“잘 알겠네. 그럼 이걸로 얘기는 잘 됐군?”
“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힘닿는 선까지는 잘 해나가야지. 허허허.”
“하핫. 예.”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두 남자가 흘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집무실을 잔잔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