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08화 (108/185)

<-- 108 회: 5권 - 국제 이슈 -->

데면데면한 분위기였다.

어색하게 대화를 끝낸 장희원은 정중히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그로서는 성진이 이런 종류의 폭탄선언을 던질 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뭐가 됐든 내 손해는 아니지.”

해외에 기술을 비싼 값에 팔아넘길지도 모른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정부에서 빠른 지원을 얻지 못한다면 입장이 애매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은 결국 사람과 만나야 이루어진다.’

성진으로서는 꼭 굳이 대통령을 만나는 건 기대하지 않았다. 일부러 크게 던진 것이다. 대신 차선으로 상당히 비중 있는 인물과의 만남을 기대했다.

그게 안 된다면 이 나라 정부는 성진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의지가 없다는 뜻이니 깨끗하게 미련을 털어버리고 다음 수를 구상하는 게 나았다.

“판은 반드시 내가 만든다.”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은 성미에 내키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성진의 본성이다.

*   *   *

-해외 뉴스 소식입니다. 국내에서 개발된 방사능 제거 기술에 대한 기술 원조 요청에 대해 해당 기업이 거절한 것으로 드러나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많은 인명과 직결된 방사능 제거 기술을 가지고 흥정한다는…….

성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나오는 TV 뉴스에서 석연찮은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할 방사능 제거 기술을 어서 빨리 내놓지 않고 피해가 늘어나도록 방치한다는 뉘앙스였다.

‘여론을 악화시켜서 압박하려는 수작이군.’

얼마 전 산업스파이로 의심되는 직원들이 대거 퇴출당하고 나서 직후에 터지기 시작한 뉴스들이었다.

내용은 하나같이 성진이 개발한 방사능 제거 기술은 인류를 위해 사용되어야 함에도 값을 올려 받기 위해 기술 원조를 거절한다는 내용이었다.

“언론 플레이를 하시겠다?”

강대국의 입김이 작용한 탓일까.

많은 언론들이 성진을 돈에 눈멀어 인류의 생명을 담보로 장사하는 양아치로 묘사하고 있었다.

“형. 괜찮아요? 뉴스에서 계속 안 좋은 말이 나오는데요.”

곁에서 지켜보는 영식도 마음이 안 좋았는지 성진의 눈치를 살폈다.

요즈음 TV만 보면 성진과 성진의 회사가 마치 인류를 위해 쓰여야 할 귀중한 방사능 제거 기술을 가지고 가격을 흥정하는 사악한 악당들로 묘사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허나 성진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웃었다.

“왜? 멋있잖아. 세계구급 악당으로 알려지는 것도 폼나지 않냐?”

성진의 엉뚱한 소리에 영식은 기가 차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형. 진짜 배짱 하나는 끝내주네요.”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살면서 욕 몇 마디쯤 얻어먹는 거야 뭐 어때? 인생 길다.”

성진은 가볍게 말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여론을 움직이려는 수작은 성진에게 어떤 위협도 주지 못한다.

어차피 엿 길이는 엿장수 마음대로다.

기술을 가진 건 성진인데 판매조건이 어떻고 요란을 떨어봤자 성진이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여론을 움직여서 압박하려 한들 결국 방사능 문제로 골치를 앓는다면 성진에게 교섭을 재차 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무력을 동원하는 건데…….’

설마하니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편인 한국에서 세상의 이목이 몰리고 있는 성진과 성진 주변인들에게 직접 위해를 끼치려 드는 건 분명 걸리는 게 많은 무리수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가족들과 주변 친인척들에게는 나노 로봇을 심어두고 최고의 경호원들을 고용해서 주변을 지키게 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경호를 수행 중이었지만 아마 전문가들이라면 경호원들을 알아볼 것이다.

“아무튼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서 걱정이네요, 형. 전 솔직히 좀 불안해 보이는데요.”

“불안할 거 없어 영식아. 저런 논리가 통한다면 값비싼 개발비가 들어간 의약품들은 사람 목숨이 귀하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만 지급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개인이 부담하지 않더라도 국가는 의료기금으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게 의약품이다. 그게 국가의 책임인 거야. 방사능 피해가 염려된다면 그것 역시도 방사능 피해를 낸 국가의 책임이다. 나한테 덮어씌울 만한 일이 아니야.”

“알았어요. 그래도 조심해요, 형.”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다.”

성진은 그렇게 영식을 안심시키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영식이 기특해서 씨익 웃어 보였다.

*   *   *

회사로 출근한 성진은 즉시 박윤호 상무를 호출했다.

“언론 플레이는 언론 플레이로 맞서야죠. 우리도 우리 입장을 변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 회장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희 입장을 변호해줄 만한 인물들을 물색 중입니다.”

“우리가 내세울 입장은 이렇습니다. 국가의 방사능 피해는 엄연히 해당 국가 책임입니다. 우리가 값비싼 돈을 들여 개발한 기술을 무조건 제공하지 않는 걸 비난하는 건 날강도 심보죠. 이런 문제점에 대해 논할만한 시민단체나 저명한 학자들을 위주로 접촉하세요. 비용은 아낌없이 푸시구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해외 유력 언론사와 접촉해서 직접 우리 입장을 전달하도록 하십시오. 우린 죄인이 아닙니다. 쫄 필요 없어요.”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회장님. 기술을 가진 건 우리인데 우리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다만 강대국 정부를 상대로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는 게 사실입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박윤호 상무였다.

성진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저런 모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전 앉아서 당해줄 만큼 멍청하지 않거든요. 곧 소용없다는 게 드러나면 제대로 협상을 하게 될 테니 준비하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여론이 좋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기업이 자기 이익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음. 인정합니다. 사실 그렇죠.”

박윤호 상무가 지적하는 사실은 정확했다.

성진 또한 논리적으로 방어는 가능해도 사람들 사이에 악화된 감정을 돌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저쪽에서는 우리가 사람들 생명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고 몰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여론몰이가 장기화되면 이미지에 정말 치명적일 거 같습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저쪽이 하라는 대로 따라가면 그건 그것대로 얕잡아 보이게 되는 겁니다. 이런 문제는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합니다. 우리한테 정말 이익이 되는 게, 우리 고객이 될지 어떨지도 모를 일반 대중들한테 무조건 잘 보이는 걸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조건 남 좋은 일 하려고 이렇게 일을 벌인 건 아닙니다.”

“음…….”

박윤호 상무는 자세를 바로 하고 성진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 기술을 사갈 사람들은 결국 국가 정부입니다. 악명을 떨쳐도 잘 나가는 다국적기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우리가 그런 기업들처럼 되면 안 되니 이미지 관리는 아주 중요하죠. 다시 말하지만, 어차피 이런 종류의 모함은 시간이 지나면 걷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누군가에게 위해를 끼친 게 아니니까요. 저쪽에서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는 만큼, 우리도 저쪽을 길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박윤호 상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고 성진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약간 답답한 느낌이 있었다.

“도대체 정부에서는 언제 연락이 오는 거야?”

끝내 이 나라 정부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정말 최악이다.

물론 성진 입장에서 정말 고스란히 끝장나는 건 아니다.

성진은 어차피 버티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시간이 걸리고 향후 과정이 어려워지는 건 사실이다.

문제는 정부가 그렇게 소극적으로 나온다면 자신이 가진 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정부가 기가 막히게 무능하다는 소리가 된다.

병역을 마치고, 세금 내고 살아가는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흠. 그래도 일단 연락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성진의 능력이라면, 그리고 인공지능 팔찌가 가진 정보력과 기능이라면 터무니없는 모함이 들끓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만큼 성진이 많은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성진은 다른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내가 직접 정부 요인들을 설득해 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

성진이 마음만 먹는다면 비리 사실을 들춰내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협박을 해서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대로 금품을 뿌리며 로비를 벌인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다른 세력들로부터 공격의 구실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성진 자신이 아주 혐오하는 방식 중 하나다.

“하아. 나노 로봇의 금제 능력도 한계가 있고. 안타깝네.”

성진은 한때 만능으로 생각했던 인공지능 팔찌의 능력에 점점 한계를 느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는 분명 강력한 기능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결국 사용자인 성진의 노력으로 나머지를 채워내야 하는 것이다.

“흐음…….”

답답함에 한숨을 흘리는 와중에도 성진은 시야 한켠에 보이는 업무 내용을 꼼꼼히 읽고 업무 지시를 다시 내리고 있었다.

“이건 시장상황하고는 너무 동떨어진 기획서네. 문제점 체크하고 다시 작성하라고 보내.”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는 성진의 지시에 맞춰서 즉시 업무를 처리하고, 다시 다음 서류를 성진의 시야에 보기 좋게 배열했다.

완벽한 업무 도우미로서 기능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발달한 성진의 두뇌능력이 가장 큰 몫을 했다.

다른 생각으로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성진은 동시에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육체 강화를 이룬 후, 그리고 두뇌 능력 발달을 위한 인공지능 팔찌의 강화작용을 꾸준히 받으면서 성진은 동시에 복잡한 생각을 처리해낼 수 있었다.

“음……. 이건 좀 가능성이 보이는데 근거가 희박하고, 이건…….”

그렇게 한참 업무에 열중하던 성진에게 비서인 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장희원 부장님께서 만나고자 하십니다.

“음? 장희원 부장님이요?”

성진에게서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는 폭탄선언을 듣고 한동안 만날 기회가 없던 장희원 부장이었다.

이렇게 다시 찾아왔으니 희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들고 왔을 게 분명했다.

성진은 곧바로 장희원 부장을 불러들였다.

“바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곧이어 성진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장희원 부장이 들어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는 거 같네요.”

말 속에 뼈가 서린 성진의 심중을 눈치 챘는지 장희원 부장은 껄껄 웃었다.

“그간 못 찾아뵌 건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데 답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음. 그래서 답은 어떤 거죠?”

성진은 차분한 눈빛으로 장희원 부장을 바라봤다.

그 눈빛을 받은 장희원 부장은 마주 보면서 말했다.

“내일 오후 5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오후 5시라구요?”

“예. 만나 뵙고자 하시는 분이 오후 5시에 한성진 회장님을 뵙자고 하십니다.”

“흠……. 장소는 어디입니까?”

“장소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내일 오후 5시에 만나 뵙자고 하십니다. 그때는 제가 찾아와서 직접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초면부터 약속 장소도 안 알려주고 말입니다.”

성진이 짐짓 장난스레 못마땅한 체하자 장희원 부장은 눈치껏 웃으면서 엄살을 떨었다.

“하핫. 봐 주십시오. 그분께서 쉽게 시간을 내실 수 없는 분이라서 말입니다.”

성진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냥 장난입니다. 제가 민망해지니까 그런 건 하지 마세요. 아무튼,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대통령은 아닐 거고, 어디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가 만나봐야겠군요.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나중에 깜짝 선물로 남겨두시지요. 아무튼 만나신다면 부디 대화가 잘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진심으로 얘기가 잘 됐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장 부장님.”

“별말씀을요.”

장희원 부장은 웃으며 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한마디를 보탰다.

“최근에 국제뉴스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는 저희도 계속 주시하고 있습니다.”

“크게 신경 쓰진 않습니다.”

성진의 담담한 태도를 본 장희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시군요. 하긴 한 회장님은 똑똑하신 분이니까요. 그분과 만나시면 그 부분에 대한 답도 들으시게 될 겁니다. 그럼 내일 오후 4시쯤에 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장희원이 나가고 성진은 쾌재를 불렀다.

“좋았어. 이걸로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만나기만 한다면 상대가 무슨 꿍꿍이를 지녔든 성진은 최대한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어 낼만한 자신이 있었다.

정부에서 자신에게 순순히 맞춰 줄 만큼 호의적이진 않으리라.

하지만 성진 또한 만만한 부류는 아니다.

“반드시 일이 굴러가게 만든다.”

성진은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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