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04화 (10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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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평가

어스름한 새벽 공기를 헤치고 대형 여객기 한기가 인천공항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은 적고 기상도 안정적이었다. 공항이 눈 아래로 조금씩 보이자 기장은 최고조로 긴장을 올리면서 관제탑에 교신을 걸었다.

“토리프항공 2567. 착륙 허가를 요청한다.”

-토리프항공 2567. 확인했다. 2번 활주로로 유도하겠다. 안전한 착륙을 빈다.

“잘 부탁한다.”

관제탑의 지시에 맞춰 기장은 서서히 고도를 낮춰갔다.

“기내 방송 부탁하네.”

부기장이 마이크를 들고 안내방송을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기장님.”

-승객 여러분. 본 항공기는 곧 인천 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분실물 발생에 주의하시고 안전벨트를 매 주십시오. 편안한 비행이 되셨길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객실에 울렸을 때였다.

비즈니스석 한쪽에서 미동도 않고 곤히 잠을 자던 반백의 노인이 몸을 뒤척이면서 눈을 떴다.

“도착인가?”

“예, 단장님. 내릴 준비를 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음.”

비서의 말에 노인은 상체를 일으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문득 뒤돌아 본 창밖 아래로 낯선 나라의 모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이라…….”

올해 나이, 일흔에 가까워지는 그의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전쟁의 참상만이 강하게 남아 있는 나라였다.

“이게 바로 인연이라는 건가.”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린 노인은 안전벨트를 바로 매고 착륙을 준비했다.

*   *   *

UN에서 오는 과학자 그룹을 기다리기 위해 마중 나와 있던 성진은 공항 VIP라운지에서 가만히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멍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실상 성진은 의식 속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문서들을 읽어내고 있었다.

-긴급한 사안 위주로 우선 결재목록을 검토했습니다.

‘잘했어.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짬짬이 업무를 처리해야 할 테니까 계속 정리해 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가 미리 선별해 놓은 서류를 결재한 성진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성진은 딱히 노트북이나 기타 업무 용품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듯 보여도 인공지능이 눈앞에 출력하는 결재 서류들을 직접 보고 검토할 수 있었다.

라운지에 앉아 있는 한 시간 동안 검토한 서류만 해도 셀 수가 없었다.

성진 자신의 두뇌 능력 또한 일반인의 경지를 상회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어서 그의 업무 효율은 초월적인 수준이었다.

그에 올라가기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결재 서류들 때문에 직원들은 성진이 잠도 안 자고 일을 하는 일 중독자라 믿고 있었다.

때문인지 보기 드물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성진을 바라보던 혜영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회장님. 응접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습니다. 박 비서님.”

“수고는요. 당연히 제가 할 일인걸요.”

혜영은 생긋 웃으면서 성진을 바라봤다.

가만히 서 있으면 도도하고 성숙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커리어우먼의 자태.

그러나 가끔 보조개가 피도록 웃어 보이면 풋풋하고 귀여운 느낌이 드는 상반된 매력이 있었다.

요즘 들어서 여성을 대하는 데 한결 익숙해진 성진은 그런 혜영을 마주 보면서 대놓고 칭찬을 건넸다.

“오늘 박 비서님 아주 예쁜데요? 유엔에서 오시는 과학자분들이 혜영씨 미모에 넘어갈 거 같아요.”

“어머, 참 회장님도. 요즘 들어서 갈수록 여자 마음을 흔드시네요?”

“제가 그랬나요? 음.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요.”

“어머머? 회장님 그러다 큰일 나요. 제가 회장님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거 뻔히 아시면서 그러시네요?”

몸으로 교태를 흘리면서 다가오는 혜영이 은근한 협박을 건네자 성진은 고개를 돌리며 발을 뺐다.

“허험. 아, 이거 도착시간이 다 됐네요. 슬슬 나가보죠.”

성진이 걸음을 서두르며 라운지를 나섰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바짝 따라붙으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이미 성진 또한 유명인사가 된 지 오래였다.

전 국민적 주목을 끌었던 신기술을 발표한 주인공인지라 성진의 행보에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더욱이 UN에서 직접 과학자들이 온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퍼지자 기자들은 해가 뜨기 전부터 공항에 진을 치고 나와 있었다.

주변 기자들의 눈을 피하고자 경호원들도 여행객 차림으로 위장한 채 흩어져서 성진을 경호하고 있었지만, 개중 노련한 기자가 지나가는 성진의 얼굴을 쓱 훑어봤다.

“어? 저거……!”

기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저기! 한성진 회장이다!”

“뭐? 한 회장?”

기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진에게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구름처럼 사방을 에워싸는 기자들로부터 경호원들이 잽싸게 모여서 스크럼을 짰다.

모두들 탄탄한 근육질에 운동으로 단련된 경호원들이었건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기자들의 열띤 취재경쟁을 감당하기는 은근히 힘에 부쳤다.

“여러분. 위험하니까 밀지 마세요.”

“물러서세요. 물러나십시오!”

경호원들이 소리 높여 경고해도 기자들은 물러날 줄 몰랐다.

도리어 언성을 높여가면서 성진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한성진 회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유엔 과학자단 방문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 겁니까?”

“과학자단의 인증이 끝나면 즉시 유엔과 계약이 이루어질 거라는 소문은 맞습니까?”

“한 회장님. 한 말씀 해주십시오.”

성진에게 질문이 퍼부어지자 더 이상은 외면만 하기 힘들어졌다.

성진은 카메라 앞인지라 최대한 성실해 보이는 인상을 꾸미고 기자들 앞에서 말했다.

“이번 과학자단 방문은 유엔 원자력 감시기구의 요청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차후에 기자회견장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진이 간단히 대답했지만, 그 정도로 기자들이 물러날 리는 없었다.

“한 회장님!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방사능 제거 기술의 경제 규모가 엄청날 거라던데 유엔에서 제시하는 계약 금액이 어떻게 되실 것으로 보십니까.”

“어허! 이보세요들. 물러나시라구요, 좀!”

여전히 옥신각신 경호원들과 승강이를 벌이면서 성진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 기자들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힘들게 걸음을 옮긴 성진이 공항 입구 앞에 다다르자 갑자기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뚝 그쳤다.

대신 공항 입구를 향해 무수한 플래시가 터졌다.

입구를 나오는 수십 명의 이국인들.

그 맨 앞에 나서는 초로의 노인이 헛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이런, 이런. 발 딛자마자 환영 세례가 요란하구만.”

그는 원자력 감시 기구의 파견 과학자단 단장인 슈르트 피셔.

빈 공과대학에서 핵물리학을 가르치던 그는 이 극동에 위치한 나라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얼마 만인가. 대체…….’

감회에 젖어 있는 그에게 성진이 다가와 유창한 오스트리아 어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피셔 교수님. 한성진이라고 합니다. 네오 테크비전 사의 대표입니다.”

“슈르트 피셔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성진 회장.”

피셔 단장이 성진에게 악수를 건네자 곧 마주 잡은 두 손이 힘차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여지없이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성진은 눈앞의 슈르트 피셔 단장을 바라보았다.

오스트리아에서 평생을 보내다시피 한 그는 의외로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는 6ㆍ25 전쟁 직후 한국에서 오스트리아로 입양된 입양아 출신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인생의 말년에 다시 출생지를 찾은 노년의 입양아는 성진을 보며 말했다.

“내 출신에 대해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성진 회장.”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성진은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한국 출신인 것은 사실이지만 평가는 아주 엄정할 겁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족함이 없도록 철저하고 완벽하게 준비해 놨습니다.”

성진의 당당한 태도에 슈르트 피셔 단장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기자들의 카메라가 여지없이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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