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회: 4권 - 011. 스포트라이트 -->
과학기술에 대한 열망과 관심이 어느 때보다 큰 시대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이미지로 반도체, 조선소 등을 떠올리게 된 지 오래.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는 것이 곧 국력이고 국가적 자존심임을 일반 국민들도 알게 된 것이다.
“얼마 전에 비록 결과는 안 좋았습니다만, 줄기세포 기술에 전 국민적인 열광이 있었단 말이죠.”
나이 지긋한 교수와 유명인사들이 나온 tv프로그램.
이들은 지금 새롭게 등장한 기술을 가지고 토론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방사능제거기술도 거의 그러한 조짐을 보이고 있어요.
사실 줄기세포 기술 못지않은 파급효과가 있다, 이런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요즘 방사능 공포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성진은 먹음직스러운 닭다리살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역시 치킨은 다리가 최고다.”
“형. 인간적으로 하나는 남겨줘요, 좀.”
옆에 있던 영식이 성진을 보면서 혀를 내밀었다.
“영식아. 옛말에도 있잖니? 먼저 집는 놈이 임자다.”
“형 다리만 벌써 3개째예요.”
닭다리살을 가지고 투닥거리는 화창한 주말 아침.
성진은 방사능제거기술을 화제로 삼은 tv프로그램들이 즐비하게 나오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런데 저거, 방사능제거기술이라는 게 뭔지 계속 나오네요? 저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영식은 줄기차게 나오는 방사능제거기술과 관련된 화제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성진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대단하지. 저런 기술은 여태까지 누구도 만들어 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당장 옆 나라 일본이 방사능오염으로 문제가 되고 있잖아.”
“흐음. 그렇구나.”
확실히 성진의 방사능제거기술이 각광받는 이유에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겪고 있는 방사능 공포에도 그 이유가 있었다.
“영식아, 다리 남은 건 네가 먹어.”
성진은 다른 닭다리살을 영식에게 건네고 잠시 방으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자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회장님? 기사 기똥차게 뽑았죠? 이거 진짜 헤드라인에 박아달라고 제가 난리 피워서 이렇게 된 겁니다.”
곽정수에게 성진이 건 조건은 헤드라인에 기사를 게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과학 이슈로 보일 수 있는 기사를 헤드라인에 걸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초라한 수준인 우리나라에서, 메이저급 일간지 헤드라인 기사에 과학기술 관련 이슈를 싣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진짜 편집장님이랑 푸닥거리 직전까지 갔어요.”
곽정수의 엄살에 성진은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일개 평기자가 편집장과 맞설 수는 없는 일.
편집장의 판단으로도 어느 정도 이슈가 될 만한 일이라 여겼기에 이렇게 된 것이리라.
“그나저나 어떻게, 생각보다 빠르게 이슈화됐는데요. 이거 운이 아주 좋으십니다.”
“예. 제가 이런 쪽은 운이 좀 좋더라구요. 아무튼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뭘요. 저도 덕봤습니다. 나중에도 종종 이런 일 있으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 회장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참, 정혜주 기자가 회장님 생각을 많이 하던데 혹시 애인 있으십니까?”
“예?”
“아. 제가 괜한 소릴. 실례했습니다. 아무튼 정말 감사했습니다.”
전화가 끊기고 성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정혜주의 귀엽고 당찬 모습이 생각난 성진은 순간, 다시 혜영과 미란, 희진의 모습이 연달아 떠올라 겹쳤다.
“끄응.”
그녀들이 자신을 두고 서로를 노려보는 광경이 떠오른 성진은 엄습하는 심란함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 * *
다음 날 성진은 네오 테크비전 사의 신축 사옥으로 출근했다.
“어라. 이거 귀찮게 됐는데.”
성진은 혀를 찼다.
회사 앞에서는 벌써 기자들이 진을 치고 성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비원들이 뛰어 들어와 길을 터느라 애를 써서 성진의 차가 가까스로 정문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거 너무 큰 이슈화가 돼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주말 내내 방사능제거기술이 톱 화제가 되어서 매스컴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보고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제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다들 긴장하세요.”
“예. 회장님.”
기실 이렇게까지 크게 이슈화가 된 데에는 성진의 뒷 공작이 컸다.
인공지능 팔찌가 인터넷 곳곳의 게시판에 그럴 듯한 게시물을 꾸며 박아 넣는 물량 공세를 펼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설득력 있는 소스가 필요했다.
그래서 곽정수 기자에게 헤드라인으로 넣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본격적인 공개를 빨리 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박윤호 상무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빠른 시일 내에 기자회견 날짜 잡죠.”
그 외에 몇 가지 지시를 전달한 뒤 성진의 집무실에서 직원들이 빠져나갔다.
“지난번에 말했던 방사능 방호복은 어떻게 됐어?”
인공지능 팔찌에게 지시하자 곧 성진의 시야 한가득 거대한 설계도면과 기술 서류 등이 떠올랐다.
현재 제작이 가능한 수준으로 설계를 마쳤습니다.
인체 착용 시 움직임에 제한이 없고, 무게 부담도 최대한 줄이는 설계를 했습니다.
성진은 방사능 정화 기술만을 팔 생각이 아니었다.
방사능에 관련된 관리를 위해서는 방사능을 완전 차단할 수 있는 방호복이 필수였다.
그러나 현재 방사능 물질을 완전 차단할 수 있는 방호복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좋았어. 이 정도면 현재 다른 방사능 방호복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격차가 날까?”
비교가 무의미합니다. 다른 방사능 방호복의 경우 고도의 방사능오염 지역에서는 착용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군.”
방사능 정화 기술과 방사능 방호복. 모두 기존 기술력과는 격차가 월등하다.
성진이 방사능 관리 시장을 석권한다면 그 이윤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이것도 상용화할 수 있도록 서류를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 외에 직접 나머지 지시 사항을 챙기러 성진은 회사 곳곳을 누볐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현관 부근에 모인 기자들은 다른 곳으로 갈 줄을 모르고 진을 치고 있었다.
“저 사람들 어떻게 하죠?”
이제는 다시 네오 테크비전 사의 보안을 관리하는 전진수는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흠. 저렇게 계속 두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제가 직접 가서 얘기하죠.”
“예? 회장님이 직접 말씀이십니까?”
“괜찮아요.”
싱긋 웃은 성진은 걱정스러워 따라나서는 전진수와 함께 직접 현관으로 다가갔다.
“어엇? 저기 나온다. 나와!”
“저 사람이…… 한성진 회장이네? 저기 회장님!”
“회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여기저기서 성진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성진은 입을 열었다.
“여러분!”
그 순간 주변을 확 제압한 한 강렬한 일성이었다.
정신없이 떠들어대던 기자들이 그 순간만은 이상하게도 입을 다물고 성진을 바라봤다.
태합유문의 기공을 응용한 일종의 음성파가 사람들의 이목을 확 사로잡은 것이다.
“발표는 다음달 10일에 할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절대 어떤 외부 노출도 없을 거라 약속드립니다. 돌아들 가주십시오.”
말을 마친 성진이 다시 건물로 들어가 사라진 짧은 시간.
기자들은 홀린 듯이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어, 어라? 이거…….”
김이 팍 샜다고 해야 할까.
기세등등하던 기자들은 서로 한두 마디를 나누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흩어져갔다.
지금까지 수많은 유명인사에게 어떻게든 취재를 따냈던 닳고 닳은 기자들이 스스로 취재를 포기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더 이상 캐묻기가 어쩐지 몹시 어색한 기분이었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박윤호나 전진수에게는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기자들이 스스로 포기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저도 저렇게 순순히 가줄 줄은 몰랐습니다.”
성진도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태합유문의 기공을 담아 외친 것은 단순히 자신의 말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그것이 성진이 가진 특유의 존재감, 위압감과 더불어 기자들의 취재 의지마저 꺾는 효과를 선사한 것이다.
‘혹시 내가 가진 힘 중 일부인가.’
성진은 2단계 육체 강화를 겪으면서 자신이 가진 잠재력이 어느 정도일지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흠……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는걸.’
성진은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앞으로 천천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약속된 기자회견 당일.
성진은 미리 준비한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세련되면서도 안정감 있는 느낌을 주는 갈색 슈트에 푸른색 넥타이, 갖가지 고급 장신구를 찬 성진은 완연히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이었다.
마스터. 이제 출발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음. 가야지.”
인공지능 팔찌의 메시지에 성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성진이 향하는 네오 테크비전 사옥에서는 현재 직원들이 발표회 준비로 초긴장 상태일 것이다.
차에 올라탄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에게 운전을 지시했다.
“가자.”
알겠습니다 마스터.
곧 시동이 걸린 성진의 차량은 주차장을 떠나 도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기자회견을 위해 임시로 마련된 발표회장에서는 기대와 활기가 흘렀다.
저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미리 질문 목록을 점검하는 기자들, 서로 향후 추세를 논하는 기자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성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주변의 이목을 끄는 사람은 단연 방사능제거기술을 최초로 국내 보도한 곽정수 기자였다.
“이야, 정수 너 제대로 한 건 터트렸다.”
대학 시절 동기였지만 이제는 경쟁 신문사 기자가 된 친구들이 곽정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운이 좋았지, 뭘.”
적당히 겸손을 피우던 곽정수는 성진과의 친분을 묻는 친구 기자들을 상대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속으로는 성진에게 일방적으로 이용당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성진의 거래를 제안받으면서 그도 어떻게든 유리한 조건을 따내려고 애썼지만, 성진은 한 치의 타협도 없이 곽정수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뭐, 덕분에 결과는 좋게 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