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96화 (96/185)
  • <-- 96 회: 4권 - 009. 휴식 -->

    “어? 고맙구만. 허허.”

    음료수를 받아든 표학선 관장은 바로 캔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지간히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햐아. 시원하구만 아주.”

    “관장님. 오늘 제가 드릴 깜짝 선물이 있습니다.”

    “음? 선물이라니?”

    “아까 운동 용품을 사와도 된다고 허락하셨죠?”

    “어! 으음. 그랬지.”

    “그래서 지금 배달이 온다고 하네요. 아마 좀 있으면 도착할 거 같습니다.”

    “어 택배 말인가? 허허. 거 빠르구만. 주문하자마자 당일에 오고 말이야.”

    “아니요 그게…….”

    성진이 애매한 웃음을 지으면서 설명하려는데 도장 현관문이 열렸다.

    “배달왔습니다.”

    청년 한 명이 들어오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 한성진 씨가 누구십니까?”

    “아! 접니다.”

    성진이 바로 일어나 다가가자 청년은 사인지를 내밀었다.

    “물목 확인해주시구요, 여기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예.”

    성진의 사인지를 받자 곧 짐더미를 든 배달원들이 한명씩 들어왔다.

    3명의 배달원이 차례대로 큼직한 박스를 들고 와 도장 안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물목 확인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성진이 박스 커팅을 하는 사이 갑작스런 일에 이목을 판 관원들이 다가왔다.

    “어어? 성진 씨 이거 다 뭐야?”

    “무슨 운동 용품 박스 같은데?”

    “뭔데 그래?”

    주변에서 다가든 관원들을 보고 성진은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도장 운동 용품 바꿀 겁니다.”

    “그래?”

    “이야! 이거 당분간 운동할 맛나겠는데.”

    “이거 관장님이 간만에 무리하셨네. 이거 죄다 메이커 브랜드인데?”

    그런 관원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표학선 관장이 다가와 물었다.

    “음? 이게 다 뭐냐?”

    “관장님. 그 지난번에…… 그겁니다.”

    성진이 어색하게 웃는데 표학선 관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허. 이렇게까지…… 자네도 참…….”

    “관장님. 이거 그렇게 됐습니다.”

    “크흠. 흠.”

    표학선 관장은 이내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네.”

    “예.”

    제자와 스승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눈웃음을 나눴다.

    성진의 지금 능력이라면 더 큰 보답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선은 표학선 관장이 거절하니 성진으로서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저기 이것 좀 같이 꺼내주실래요?”

    “어 그럼. 물론이지.”

    성진이 다른 관원들에게 부탁하자 관원들은 너도나도 앞다퉈 용품들을 꺼냈다.

    새 물건을 보면 꺼내서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곧 박스를 개봉해서 물건들을 꺼내자 새 용품들을 보는 관원들이 감탄했다.

    “이야. 한가득이네.”

    “우와 한결같이 메이커 브랜드!”

    한창 감탄하던 관원들은 표학선 관장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관장님. 이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그 말에 표학선 관장은 살짝 무안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감사는 무슨. 운동하러 와주는 여러분들한테 내가 감사하지.”

    “하핫. 이거 진짜 좋은 물건들인데요. 글러브, 샌드백, 제가 대충 아는데 다 비싼 물건들인데요?”

    운동 용품에 유독 관심이 많은지 청년 하나가 아는 척을 했다.

    “아니 그렇게 비싼가?”

    표학선 관장이 놀라 묻자 관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대충 봐도 수백만 원은 넘겠는데요. 관장님 모르셨어요?”

    “음? 아니. 내가 산 건데 당연히 알지. 허허. 흠.”

    그러면서 표학선 관장은 성진에게 가벼운 눈총을 줬지만 성진은 난처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이거 열심히 운동하셔야겠어요. 새 용품이니까 빨리 길을 들여야죠.”

    성진의 너스레에 다른 관원들도 맞장구를 쳤다.

    “아 그럼. 이거 아주 운동할 맛 제대로 나겠어. 하핫.”

    다만 표학선 관장의 눈총에 성진은 눈치가 보였지만 말이다.

    * * *

    관원들이 모두 떠난 늦은 저녁.

    성진은 텅 빈 도장 여기저기를 정리하면서 용품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새 물건들을 들여놓으니까 제법 번듯해 보이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안에 들어가 있는 물건이 번듯하니 낡은 도장 전체가 조금이나마 환해진 느낌이었다.

    낡은 물건이라도 운동만 잘하면 된다지만 그래도 새 물건이 기분상 더 나은 건 분명했다.

    “이거 괜히 큰돈 쓰게 한 거 같아서 미안하구만.”

    관장은 성진을 흘깃 노려보면서도 혀를 찼다.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에이, 미안하시다뇨. 저한테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수백만 원이 적지는 않지.”

    표학선 관장은 성진이 수백만 원이나 지출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에이, 사부님. 저한테는 정말 별 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자꾸.”

    성진은 그런 표학선 관장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실상 표학선 관장이 좀 더 욕심만 부린다면 더 큰 보답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로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부담스러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정말 고맙게 받겠네만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게.”

    “예.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래. 아무튼 내 고맙게 사용할게. 고맙네.”

    “고맙긴요. 당연한 겁니다, 사부님.”

    성진으로서는 그저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표학선 관장은 기분 상해하는 일 없이 성진의 성의를 받아들였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표학선 관장의 도량을 보이는 부분이었다.

    제자로부터 받은 선물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 크게 책망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참. 자네 요즘 하는 일이 있다면서?”

    “예. 사부님.”

    “그 일은 잘돼가겠지?”

    “그럼요. 착실하게 진행 중입니다.”

    “흠. 자네가 무슨 사업을 하는지는 내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표학선 관장은 성진의 유명세가 닿지 않는 인물이었다.

    사실 성진이 어린 나이에 파격적으로 증권 회사 회장직에 오른 사건은 여기저기서 은근히 화제가 되었지만, 다른 가십거리가 워낙 많아 의외로 빨리 묻혀버렸다.

    더군다나 경제 관련 뉴스에 관심이 있는 편도 아니니 표학선 관장이 뉴스나 신문을 봐도 성진의 회사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을 하든 그만한 책임에 걸맞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구만. 우리 태합유문의 명예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믿지만 말이야.”

    “물론입니다, 사부님.”

    “그래. 자네가 다 알아서 해내겠지.”

    표학선 관장은 성진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떤 사업을 하는지는 몰라도 성진이 큰 부담 없이 수백만 원어치 선물을 해줄 수 있다면 경제적으로 곤궁하지는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무술인에게 가장 큰 적은 생활고다.

    현대사회에서 무술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도는 매우 적다.

    적어도 자신의 제자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지 않을 만큼의 재주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내 솔직히 자네가 돈이 좀 있는 거 같아 안심이 되는구만.”

    “예?”

    성진의 물음에 표학선 관장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사람이 가장 쉽게 타락하는 게 바로 경제적인 곤궁함 때문이거든.”

    “아…… 예.”

    성진은 표학선 관장의 말을 이해했지만 선뜻 공감은 가지 않았다.

    그가 만난 타락한 사람들은 곤궁함 때문에 타락하기보다 가진 상태에서 더욱더 가지기 위해 타락한 자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허허. 내가 왜 이런 소릴 하냐면 말일세.”

    표학선 관장은 표정을 조금씩 굳히며 말했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정말 나쁜 길로 빠질 뻔했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아니 그러면 사부님도 돈 때문에 타락할 뻔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음. 그래. 그랬지.”

    표학선 관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태어난 시대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거든.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부족하고 척박했지.”

    “아…… 예.”

    성진은 표학선 관장이 견뎌온 세월의 무게를 깨달았다.

    그의 나이는 이 나라의 장년층 노인들이 감수해야 했던 시대의 아픔이 배어 있었다.

    “나는 부모님 얼굴을 본 적이 없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랐으니까. 그 시절 고아원은 정말 모든 게 최악이었거든. 하루 두 끼 밥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어.”

    표학선 관장의 말에는 진정성이 서려 있었다.

    별 거 아닌 고생담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파란만장했던 과거에 대한 절절한 회한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말이야. 철이 들면서 내 밥벌이를 해야 했거든. 열댓 살만 되어도 고아원에서 나가야 했어.”

    “예.”

    “아무것도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놈이 뭘 할 수 있었겠나? 깡패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려다 자기들 방패막이로 쓰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나도 거기에 끌려들어간 거지.”

    “아니, 그러면 거기서 나오시게 된 건 혹시…….”

    “그래.”

    표학선 관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두목이 하필 상대를 잘못 골랐던 거야. 어떤 낡은 옷차림의 무술을 하는 사람을 혼내주려고 쪽수를 동원했는데 죄다 당해버렸어. 나는 거기서 겁을 먹고 벌벌 떨면서 서 있었는데 그분이 나를 보시더니 그러시더군.”

    “어떤 말씀을요?”

    “근골이 마음에 드니 나한테 무술을 배우지 않겠냐고 하셨지.”

    표학선 관장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 사제지간의 연을 맺으셨군요.”

    “음. 그랬네. 그러면서 나한테 폭력의 잔혹함, 세상사는 도리를 똑바로 알려주셨지. 태합유문의 비기도 전수해주시면서 세상 속에서 재주를 함부로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네.”

    “예.”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답게, 똑바로 살라고 하셨어.”

    표학선 관장은 성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가르침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세상사는 건 참 힘들더구만. 그럴 때마다 솔직히 돈이라는 요물에 너무도 쉽게 흔들리곤 했다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성진은 표학선 관장이 자신을 아끼는 마음을 알았다.

    그래서 성진이 돈 때문에 타락하지 말고 자신을 지키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모쪼록 자네는 꼭 인간된 도리를 지키게나. 태합유문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성진은 고개를 숙여 표학선 관장의 말에 예의를 표했다.

    한참 사제 간에 정담을 나누는데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

    ‘내게 와줘, 베이베, 사랑할래!’

    “음? 여보세요?”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구요?”

    다급한 박윤호 상무의 목소리였다.

    성진은 심상치 않은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회장님. 지금 급히 회사로 오셔야 할 거 같습니다. 방사능제거기술이 바깥에 퍼져서 현재 취재 요청이나 제안 문의가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몇 가지 지시를 내린 성진은 표학선 관장을 돌아보며 죄송스러운 듯 말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당장 급하게 들어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허허. 바쁘구만. 그래 항상 건강 챙기고, 일 열심히 하게.”

    “예. 사부님.”

    성진은 예의를 취해 인사한 다음 급하게 짐을 챙겨서 도장을 나갔다.

    잠시 후 창가 아래 보이는 성진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표학선 관장은 말없이 신뢰의 눈빛을 제자에게 보냈다.

    ‘태합유문의 전승자로서 항상 부끄럽지 않으리라 믿네.’

    그러는 와중에도 표학선 관장은 조만간 자신의 제자가 이 나라에서 유명세를 떨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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