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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95화 (95/185)

<-- 95 회: 4권 - 009. 휴식 -->

“아닙니다, 사부님. 저한테는 이게 최고의 휴식입니다.”

“허허. 말이라도 고맙구만.”

두런두런 근황을 얘기하는 사이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진이 밥값을 계산하고 나오는데 표학선 관장이 물었다.

“자네 말일세. 앞으로 며칠은 도장에 묵는댔지?”

“예. 사부님. 그럴 겁니다.”

“음. 잘됐구만. 자네한테 진득허니 가르쳐주고 싶은 것도 있고.”

“예 사부님. 그동안 제가 참 격조했습니다.”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성진에게 표학선 관장은 손을 저었다.

“아니야. 자네가 일이 많다는 건 나도 아네. 바쁜 사람 늘 붙잡아둘 수는 없는 세상 아닌가.”

표학선 관장은 성진의 불성실함을 탓하지 않았다.

이미 그로서는 성진의 자질이나 인성 모두 만족스러웠다.

‘태합유문의 전인으로 이만한 재목을 찾기 힘들지.’

성진이 보여준 자질은 극상이다.

무도인에게 자질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기에 내적 성격 또한 크게 모나지 않는 합격선이었다.

“바쁜 일 끝내자마자 나를 찾아와줘서 고맙구만. 기왕 왔으니 스승으로서 자네한테 전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올라가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예. 스승님.”

오늘따라 유독 표학선 관장의 말에는 진중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결코 가벼운 얘기는 아닐 것이다.

성진은 살짝 마음의 각오를 하고 표학선 관장을 따라 나섰다.

* * *

“내가 자네한테 우리 태합유문의 기술을 전수했지만 진정 아쉬운 점이 있어.”

“어떤 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우리 태합유문의 역사와 내력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점이야.”

“아! 그렇군요.”

성진은 표학선 관장의 말에 자세를 바로 했다.

결코 가볍게 대할 만한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어찌 보면 성진 자신의 부족함이기도 했다.

태합유문의 절기를 전수받아 잘 써먹고 있으면서 정작 태합유문의 역사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았다.

“말씀해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성진의 진지한 태도에 표학선 관장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내가 제자를 바로 들였어.’

표학선 관장은 곧바로 태합유문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 태합유문은 일인 전승의 원칙을 지키며 유지되어 왔다네.”

“예.”

태합유문의 전통은 성진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깊었다.

고려 시절까지 거슬러 내려가는 태합유문의 선조들은 철저히 일인전승의 원칙을 지켜가며 천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지탱해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우리 태합유문의 일인전승 원칙이 단 한 차례 깨진 적이 있네.”

“원칙이 깨졌다면, 한 명 이상의 제자를 더 받아들였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보통 상황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어. 왜냐하면 일인전승의 원칙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결코 세력을 만들지 않는다는 선조들의 맹세 때문이었거든.”

세력을 이루지 않는다.

그것은 태합유문이 순수한 무도 수양의 일맥으로서 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보통 상황이 아니라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길래 맹세가 깨진 겁니까?”

“나라가 망한 상황이었지. 바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시기였네.”

“아…….”

성진은 탄식을 흘렸다.

그만한 상황이라면 일문의 원칙을 깨트릴 만한 이유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라가 망했으니 당대의 선조님은 마땅히 힘을 보태야 한다는 판단을 하셨다네. 그런데 문제는 일제 군대와 싸우다 계승자를 잃게 되면 태합유문의 명맥도 끊긴다는 게 문제였지.”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래서 제자를 더 받으신 거군요.”

“그렇다네. 선조께서는 본래 기르던 제자를 일제 군대와 싸우기 위해 독립군에 보내셨네. 그리고 남은 세월 동안 또 한 명의 제자를 기르셨다네. 그분이 바로 나와 자네의 선대 스승이시지.”

표학선 관장이 말한 태합유문의 내력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대단한 사정이 숨어 있었다.

천 년에 달하는 역사도 놀라웠지만 일제강점기에 얽힌 사연을 들으니 비장함이 한층 더했다.

“그러면 그 독립군에 참가하신 선조께서는 이후에 만나지 못하신 겁니까?”

“광복 이후에도 선조께서 틈나는 대로 찾아다니셨지만 만나지는 못하신 모양이야. 아무래도 위험한 독립전쟁 과정에서 전사하셨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예……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인 성진은 그 뒤로도 표학선 관장에게 사문의 가르침과 목표 등에 대해 간단히 듣게 되었다.

“옳다고 믿으면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하지 말게. 우리 사문의 가르침은 별 거 없어. 사람답지 못한 짓만 하지 않으면 되네.”

“예. 명심하겠습니다.”

참 간단하고 좋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한성진은 미소를 지었다.

“참. 사부님 태합유술 도장을 좀 더 넓히고 싶으신 생각은 없으세요?”

“음? 이 도장은 왜 말인가?”

표학선 관장은 고개를 기울였다.

“기왕이면 태합유술 도장을 넓혀서 관장님의 깨달음이라든지, 무술적인 노하우를 널리 알리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허허. 그런가?”

표학선 관장은 입술을 곱씹더니 손을 저었다.

“아니야. 자네 마음은 고마운데 내가 그런 욕심까지는 없어.”

“예에.”

표학선 관장은 지금 상황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기실 무도인으로서의 수양에만 힘써온 그로서는 성진을 만나 후학을 전한 것만으로도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나는 여기서 더 바라는 게 없으니 자네는 괜한 신경 쓰지 말게. 모쪼록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고.”

“예. 사부님.”

성진은 표학선 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성진이 보기에도 그는 무도 하나만 파면서 살아온 무도인 그 자체였다.

마치 고련을 거듭한 승려처럼 세속적인 욕심과는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진으로서는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서 표학선 관장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바램이었지만 그로서는 그런 욕망 자체가 아예 없었다.

“사부님. 그래도 제가 간단한 운동 용품 같은 건 선물해드리고 싶습니다. 물건들이 많이 낡았더라구요.”

“응? 운동 용품들 말인가? 그러고 보니 바꿀 때가 되었구만. 신경 쓰지 말게. 재정에 어려움은 없으니까.”

표학선 관장은 이번에도 거절의 뜻을 보였지만 성진은 이번에야말로 확고했다.

“사부님 절대 이건 거절하시면 안 됩니다. 제 조그마한 성의니까요. 이 정도는 제가 선물해드릴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흐음. 자네가 그렇다면야 뭐 편한 대로 하게.”

표학선 관장은 샌드백 한두 개를 성진이 선물해주려는 거라 생각했지만 성진은 아예 운동 용품 전체를 다 바꿀 요량이었다.

“예. 사부님.”

* * *

저녁 무렵에는 직장과 학교를 마친 관원들이 몰려든다.

관원들로 제법 붐비기 시작하는 시간인지라 많은 사람이 하나둘 도장에 자리를 잡았다.

“어어. 그러다 다치네. 너무 과격하게 하면 몸이 힘들어져.”

“예 관장님.”

표학선 관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관원들을 하나둘 찾아다니면서 무리하지 않게끔 지도했다.

특히 개개인이 동작을 완벽하게 숙달하고 자기 체형에 맞춰서 체화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

“자네는 상체에 힘이 너무 많이 몰리는 거 같아. 좀 더 어깨에 힘을 빼고 부딪치는 순간에만 힘을 주게.”

“예. 알겠습니다, 관장님.”

“그래. 그렇게만 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진은 표학선 관장의 절륜한 눈썰미에 감탄했다.

인공지능 팔찌를 가진 것도 아닌 표학선 관장은 개개인의 잘못된 습관이나 문제점을 탁월하게 짚었다.

‘역시 대단하시네.’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의 스캔을 통해 관찰해서 알 수 있는 부분을 표학선 관장은 육안만으로 짚어냈다.

‘오랫동안 수련을 하면 저 정도는 할 수 있는 건가?’

성진에게는 표학선 관장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인공지능 팔찌의 스캔 능력을 빌리지 않고도 상대방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한창 지도가 이어지고 난 뒤 표학선 관장은 구석 의자에 앉아 쉬기 시작했다.

성진은 미리 준비한 차가운 음료수 캔을 표학선 관장에게 내밀었다.

“관장님. 이거 드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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