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회: 4권 - 009. 휴식 -->
네오 테크비전.
플루토 투자그룹의 계열사가 아니라 오롯이 성진 자신의 자산으로 투자된 회사였다.
비록 박천중 회장이 물러나면서 성진에게 회장직과 더불어 지분의 상당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줬지만, 그것은 플루토 투자그룹의 회장직분을 수행하는 데에만 사용할 수 있는 지분이었다.
사적으로 남용하는 것은 성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될까.’
성진의 방사능 제거 기계가 우크라이나에서 놀라운 성능을 입증한 만큼, 입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해외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내인 만큼, 국내 여론을 움직이는 데도 긍정적인 작용이 이루어질 것이다.
성진은 앞으로의 일을 기대하면서 직원들을 일별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회장님. 어쩐지 피곤해 보이시네요.”
옆에서 따라 걷던 혜영이 염려의 말을 건넸다.
“응? 피곤이요?”
성진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신체가 강화된 이후, 아무리 격무를 거듭해도 육체적 피로를 느낀 적이 없었다.
“몸은 괜찮아 보이셔도, 어쩐지 정신적으로 피곤해 보이셔서요. 너무 일만 몰두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던 거 같네요.”
생각해 보니 최근 지나치게 일에만 몰두하면서 성진 자신의 개인 시간을 갖지 못했다.
혜영의 지적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찾아봬야 할 분이 생각났네요. 고마워요 혜영 씨. 아니 박 비서님.”
성진은 찡긋 윙크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뒤에서 콘도 숙박권이 든 하얀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혜영이 울상을 지었다.
‘에휴. 같이 여행을 가자는 뜻이었는데.’
도대체 성진은 자신의 마음을 언제 알아줄지 갑갑한 혜영이었다.
한숨을 쉰 혜영은 문득 벌써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성진을 보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앗! 회장님! 같이 가요.”
* * *
모처럼 휴식 시간을 가진 성진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성진이 회장직에 올랐다는 걸 이미 알게 된 부모님의 기쁨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지만 젊은 나이에 너무 빠른 출세를 하는 아들에 대해 걱정하는 충고도 잊지 않으셨다.
“항상 아랫사람들 잘 살피고, 윗사람이니까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예 아버지. 걱정 마세요.”
성진은 부모님 말씀을 늘 경청했다.
한결같이 공짜로 자식 사랑을 내려주시는 부모님의 말씀이었다.
성진으로서는 앞으로도 부모님이 오래오래 건강히 사시기만 바랄 뿐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당분간 집에 못 옵니다.”
“응? 아니 왜.”
어머니의 물음에 성진은 웃으며 말했다.
“여행을 가려구요. 이번에 큰일을 하나 끝내고 나니까 휴식이 필요할 거 같아요.”
“휴식? 그래. 하긴 일을 열심히 했으면 쉬는 것도 필요하지. 맘 편히 갔다 와라.”
아버지는 선선히 웃으시며 지갑을 꺼내셨다.
“이거 참 몇 푼 안 된다만…….”
쑥스럽게 웃으시는 아버지가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건네셨다.
“용돈이다. 나중에 가다가 음료수라도 사먹어라.”
“에이 아버지. 용돈은 제가 드려야죠.”
“됐다, 인석아. 왜? 적어서 그러냐?”
“아휴 아니요, 아버지.”
성진은 양손으로 공손하게 용돈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셨다.
“호호홋! 회장님한테 용돈 주는 사람은 당신뿐일 거예요.”
“아니 얘가 뭐 회장이야? 내 앞에서는 그냥 아들이야. 아들.”
“호호호호. 당신도 참.”
아들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아버지를 보고 어머니는 한참을 웃으시더니 성진에게 물으셨다.
“여행은 혼자 가니?”
“예.”
“성진아. 넌 애인 없어?”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물음에 성진은 허를 찔린 듯 얼굴이 붉어졌다.
그 순간 혜영과 희진, 미란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 어머니 그게…….”
“있긴 있구나? 관심 가는 아가씨 있으면 집에 좀 데려와. 엄마가 한번 살펴보게.”
“아휴 어머니도 참. 그런 거 아니에요.”
성진은 손사래를 치면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머? 쟤가 정말 있긴 있나 보네.”
어머니는 한손으로 입을 가리시고 재미나는 듯 웃으셨다.
성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도 참……..”
그러고 보니 세 여성ㅇ게 받는 관심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어쩐지 전보다 더 친밀한 감정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흐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성진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여인은 아직 없었다.
그렇다고 세 여인들에게 ‘나를 그만 좋아해라’ 하고 말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었다.
“에휴, 모르겠다.”
머리를 저은 성진은 옷장을 꺼내 간단한 의복을 챙겼다.
여행을 핑계로 댔지만 목적은 따로 있었다.
당분간 성진은 표학선 관장에게 찾아가 태합유문의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많이 못 찾아뵈었으니 이번에 가봐야겠지.”
표학선 관장이 성진에게 베푼 가르침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사제의 연을 맺었으니 이번에는 여유가 되는 대로 아예 찾아가 묵을 생각이었다.
미리 연락한 표학선 관장으로부터는 대환영이라는 대답을 받았다.
성진은 표학선 관장의 근엄한 모습을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짐을 챙겨들고 집을 나선 성진은 차를 몰고 표학선 관장의 태합 종합 유술 도장으로 찾아갔다.
“계십니까?”
도장의 철제 현관문을 당겼다.
문이 열리는 게 아예 잠그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부님. 계세요?”
그러자 잠시 뒤에 관장실 문이 열리더니 가벼운 잠옷 차림의 표학선 관장이 나왔다.
“어, 성진 군. 벌써 왔나?”
그런데 입고 있는 잠옷이 특이했다.
귀여운 양 그림이 그려져 있는 땡땡 무늬 잠옷이었다.
“사부님. 잠옷이 꽤 귀여운데요?”
성진의 말에 표학선 관장이 껄껄 웃었다.
“허허. 관원들이 나한테 선물로 사준 거라네. 처음에는 디자인이 좀 그렇긴 했는데 뭐 입다 보니 괜찮아. 옷 질도 좋고.”
“하핫. 그러고 보니 제가 변변한 선물 하나 해드린 게 없네요. 나중에 더 좋은 걸로 사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거 없네.”
표학선 관장은 손을 저었다.
“사제지간에 오가는 답례는 물질보다 마음일세. 이렇게 여유 되는 대로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예. 알겠습니다, 사부님.”
성진은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표학선 관장이 필요로 할 만한 물품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운동 용품들이 낡은 거 같기도 하고.’
샌드백이나 다른 안전장구들, 각종 운동기구가 있는 구석에 눈길이 갔다.
특히 구석에 매달린 샌드백을 보니 청 테이프가 잔뜩 도배되어 있었다.
‘음…….’
아무래도 도장에 샌드백 몇 개는 사드려야 할 모양이었다.
“사부님. 아직 아침 안 드셨죠? 나가시죠. 맛있는 데로 모시겠습니다.”
“음. 그럴까? 그럼 잠시만 기다리게.”
관장실로 다시 들어간 표학선 관장은 금세 말쑥한 외출복 차림으로 관장실을 나왔다.
“자, 가지.”
“예, 사부님.”
* * * * * * * * * * * *
뽀얀 설렁탕 국물이 꽤 먹음직스러웠다.
표학선 관장이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맛있겠구만. 잘 먹겠네.”
“예. 사부님.”
식사하는 동안 표학선 관장은 안부부터 건넸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일을 좀 많이 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잠시 휴가입니다.”
“오호. 그래 열심히 일한 뒤에 휴식이라. 좋구만. 그런데 이거 귀한 휴식 시간을 이런 데 와서 쓰면 아까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