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92화 (92/185)

<-- 92 회: 4권 - 008. 성과 -->

운동장만 한 크기의 널찍한 창고.

수십 명의 연구원과 기술자가 여기저기 모여서 주어진 작업에 열심이었다.

실내를 가득 메우는 작업 기계들의 소음과 전자음, 여기저기 모니터에 입출력되는 데이터들이 부산한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에 놓인 독특한 형상의 기계가 기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잘되고 있으십니까?”

성진의 질문에 여러 연구원이 흡족한 미소로 대답했다.

“예. 보내주신 설계도나 기술 서류가 매우 충실해서 몇 달 안 남기고 시제품이 완성될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모여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인공지능 팔찌가 핵심 기술을 제공한 방사능 정화기였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은 모두 인공지능 팔찌가 나노 로봇들을 변형시켜 만들어낸 회로들을, 성진이 직접 가공해서 만든 물건들이었다.

결국 핵심 기술과 부품은 오직 성진만의 차지였다.

나머지 연구원들은 그 부품들을 가지고 완제품으로 만들어내는 정도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었다.

허나 그 과정을 위해 제공받은 기술 서류만으로도 이들은 놀라운 혁신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기술력을 어디서 제공받으신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강석천 박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아무리 비정규직 신세를 면치 못한 과학자라 해도 그들은 내로라하는 이공계의 인재들이다.

학계에서조차 거론되지 않은 기술이 완성된 형태로 제공되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허나 성진은 딱 잘라 말했다.

“그 부분은 회사 기밀입니다. 그리고 원천기술을 연구하는 부서가 따로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리죠.”

“아, 예.”

기밀이라는 말에 강석천과 다른 연구원들의 표정이 싹 굳었다.

학자로서의 호기심 때문에 모처럼 찾아든 파격적인 대우를 걷어찰 수는 없는 법.

이미 이들은 정규직 대우는 물론, 고액의 연봉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물론 그와 동시에 엄중한 기밀 유지 각서와 유출 시 배상 책임을 맹세하게 했지만, 실상 이들이 아는 정도로는 성진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핵심 기술을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지.’

성진은 무조건적으로 마냥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늘 느끼는 것이지만 자신은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사람인 법이지.‘

상황이 달라지면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다.

어느 정도 성진이 은혜를 베풀었다고 느끼게 할 필요가 있었다.

잘나가는 대우를 받던 연구원들 대신, 비정규직의 다소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던 연구원들을 섭외한 것도 그런 까닭이 컸다.

물론 굳이 상대적으로 대단한 연구원들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시제품이 완성되면, 방사능 관련 시료를 얻어서 정화 실험을 할 겁니다. 그때까지 계속 애써주십시오.”

“예! 회장님.”

성진의 당부에 책임을 지닌 연구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 * *

한국의 방사능 물질관리 체계는 매우 엄중하다.

방사능, 원자력 관련 감독기구나 부서만 해도 많아 승인을 여러 번 받아야 하는데다가, 중요한 핵연료 자체인 우라늄은 무기화 가능성이 있어 미국의 감시와 승인을 받아야 한다.

4개의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나라인 만큼 치밀한 감시 체계와 관리 체계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성진은 전혀 생각지 못한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이거 승인이 아주 어렵겠는데요.”

박윤호 상무는 아직 쌀쌀한 날씨임에도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완성된 시제품을 가지고 정화 실험을 해야할 텐데 어떠한 방사능오염 물질도 반출이 허락되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관련 책임자들도 방사능오염 물질을 제공받고 싶다는 말에는 태도가 돌변했다.

“제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네요. 이 정도로 어려울 줄은 몰랐습니다.”

성진은 한숨을 쉬었다.

사전에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 입수한 정보로도 이만큼 어려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대학이나 관련 연구시설 등을 통해 협조를 구할 수 있을까 알아봤지만, 방사능 물질 자체를 가지고 직접 연구하는 곳은 찾기 힘들었다.

‘역시 데이터는 실제 상황과는 틀리다.’

늘 깨닫게 되는 부분이지만 인공지능 팔찌가 수집한 정보를 막상 현실에 적용하려면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결국 현실의 사람은 규범이나 규칙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인 판단을 앞세우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연구용 목적으로 방사능 물질을 제공받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허나 만에 하나 잘못되었을 경우 뒷감당이 힘들기 때문에 일선 책임자들이 승인을 보류하는 것이었다.

“저, 회장님.”

옆에 있던 전진수가 침음성을 흘리며 말을 걸어왔다.

“예. 말씀하세요.”

“사실 우리가 너무 돌아서 가는 거 아닐까요? 쉬운 길이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넌지시 말하는 전진수의 눈빛이 자리에 모인 모두와 마주쳤다.

그 모습을 본 성진이 단칼에 말을 잘랐다.

“뇌물을 쓰자는 겁니까? 그건 안 됩니다.”

이번에는 박윤호 상무도 넌지시 말을 보탰다.

“회장님. 다른 사람들 모두 그러지 않습니까. 바른 길 걷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안 된다는 겁니다.”

“네?”

성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부정한 수법을 쓰면, 그게 나중에 화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기업들이 정부나 검경 눈치 살피는 이유가 뭡니까? 다들 이런 수법으로 어려움을 쉽게 넘기려 들기 때문 아닙니까?”

“맞는 말씀입니다만 다들 하는 방식인데 다소의 융통성이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다들 하는 방식을 우리도 하다가는 우리도 똑같은 처지가 됩니다! 우리가 가진 아이템이 작은 게 아니에요. 엄청난 성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분명 우리한테 압력을 행사하려 하는 움직임이 있을 텐데 겨우 시료 실험 하나 가지고 뇌물을 쓰기 시작하면 나중에 치명적인 빌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진의 서슬 퍼런 강변에 팀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절대 약점을 만들어선 안 됩니다. 바른 길이 어렵고 고단하지만 그만큼 이점도 큽니다. 떳떳하니까요. 누구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단호한성진의 기색을 읽은 팀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완전히 납득한 눈치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더 반대 의사를 밝히는 것은 회장인 성진의 심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다른 방책을 강구해보겠습니다.”

박윤호 상무가 팀원들을 끌고 집무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성진은 홀로 고민에 잠겼다.

“흐음. 일단 실험만 하면 반드시 성공일 텐데…….”

답답했다.

확실한 실험 성과만 거두면 갖가지 방사능 유출 사고로 골머리를 앓는 곳에 바로 수출 계약을 성사시킬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방사능오염 문제로 공포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성진은 방사능 정화기기를 일본에 수출하는 모습을 상상만 했지, 정작 국내에서 실험이 어려울 거라는 판단은 하지 못했다.

모든 게 경험 부족이었다.

지식과 정보 축적은 사회에 대한 식견까지 높여주지는 못했다.

‘후우…….’

그 순간, 성진의 뇌리 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앗! 그렇지. 기계만 외국으로 보내서 실험하면 되잖아.’

굳이 방사능오염 물질을 국내에서만 구할 필요는 없다.

첨단 기기인 만큼 해외에 이송,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기술 유출 가능성이 있을 수 있지만, 이 경우 핵심 기술은 모두 온전히 성진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남들은 절대 성진이 지닌 핵심 기술을 넘볼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성진은 즉시 전화기를 들었다.

“박 상무님? 지금 즉시 논의할 문제가 있습니다. 집무실로 다시 와주세요.”

* * *

방사능오염 물질 시료를 구하는 데 가장 용이하다고 판단이 된 국가는 우크라이나였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사고로 인해 인근 국가 벨라루스와의 접경 지역이 완전히 오염되었던 데다가, 아직까지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악몽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라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