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91화 (91/185)

<-- 91 회: 4권 - 007. 또 다른 창업 -->

“앉아요.”

“예, 회장님.”

박윤호 상무는 자리에 앉으면서 즉시 보고서부터 꺼냈다.

제법 묵직한 서류뭉치에는 그간 성진이 지시한 업무 진행사항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성진은 가볍게 훑어봤지만 인공지능 팔찌가 자동으로 스캔해서 중요한 내용을 피드백했다.

“음. 좋군요. 진척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일하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지원해주신 덕분에 원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답하는 박윤호 상무는 요즘 들어 매일이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불과 일 년 전에는 중년 백수 신세였다.

그러던 자신이 성진을 만나 상무라는 언감생심 꿈도 꿔본 적이 없던 큰 자리에 오르고, 이제는 회장이 된 성진의 최측근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구요. 아무튼 계속 진행해주세요.”

“예. 회장님.”

“아! 그리고 제가 저번에 부탁했던 일. 소식은 없나요?”

“아 예. 그거라면 저…….”

박윤호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업무 외에 성진이 따로 부탁한 일은 바로 영식의 어머니를 수소문하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새로 소식이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박윤호가 업무 관계로 알게 된 심부름 업자나 관공서의 인맥들에 언질을 던져놨지만, 아직 돌아오는 소식은 없었다.

인공지능 팔찌의 정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성진은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누굴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일 보세요.”

“예.”

박윤호 상무가 나가고 성진은 널찍한 회장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통유리를 통해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빌딩 최정상층.

수십 평에 달하는 공간이 온전히 성진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했다.

‘회장이라…….’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적으로는 엄청난 출세다.

23살의 나이에 수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위치다.

그와 동시에 책임이 따라왔다.

성진의 실수가 그 수천 명의 생계를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두려워만 할 수는 없지.”

경영에 필요한 기술과 학문은 모두 성진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다.

더욱이 성진의 팔에는 누구도 갖지 못한 강력한 도구가 붙어 있다.

부담만 느끼고 있는 건 어리석다.

“결재 서류를 출력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즉시 인공지능 팔찌가 갖가지 결재 서류를 성진의 시야 가득 출력시켰다.

* * *

한창 업무에 열중하던 성진이었지만 식사 시간 하나만큼은 칼같이 챙겼다.

마스터. 점심시간입니다.

“음. 그래.”

인공지능 팔찌의 알림 메시지가 들리자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체가 변화하면서 전보다 배고픔을 느끼는 횟수는 줄었지만, 식사 자체가 귀찮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식도락만 한 즐거움이 흔하겠어.”

더욱이 식사야말로 인간관계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간 성진은 문 앞에서 근무 중인 혜영에게 손짓했다.

“혜영 씨. 같이 점심 먹을래요?”

“네. 회장님.”

혜영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사무적이라 성진은 왠지 어색함을 느껴야 했다.

“혜영 씨. 편하게 대해요.”

“아닙니다, 회장님. 업무 시간에는 공적인 관계인걸요.”

“괜찮아요. 단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해요. 부탁입니다.”

그러자 혜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슬그머니 표정을 풀었다.

“좋아요. 뭐 이건 회장님이 친히 부탁하시는 거니까?”

익숙한 웃음기가 혜영의 입가에 돌아오자 성진도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좋아요.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요.”

“어머 그래요? 그럼 저 비싼 메뉴 골라도 될까요, 회장님.”

“그 회장님이라는 호칭도 좀…….”

성진이 손사래를 치자 혜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뭐. 성진 씨.”

* * *

식사를 마친 혜영은 아닌 척 성진의 눈치를 살폈다.

‘왜 저러지?’

그 낌새를 눈치 못 챌 성진이 아니었기에 선수를 쳤다.

“혜영 씨. 뭐 부탁할 거 있어요?”

그 말에 혜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역시. 성진 씨 눈치는 못 당하겠네요.”

“그러지 말고 뭔지 말해 봐요.”

“큰 건 아니구요 박윤호 상무님한테 시키시는 일이 뭔지, 궁금해서요.”

“아 그거 말이에요?”

사실 어떻게 보면 혜영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회장의 최측근인 비서가 모르는 일을 눈앞에서 진행하는데 혜영이 속이 좁았다면 충분히 불쾌하게 여기고도 남을 일이었다.

“미안해요. 좀 더 진행되면 알려주려 했어요. 사실 혜영 씨한테 숨길 필요는 없는 일이었는데.”

“무슨 일인데요?”

“간단하게 말해서, 새로 회사를 하나 더 만들려고 합니다.”

“회사를 또요?”

“네.”

성진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플루토 투자사는 이미 맹렬한 기세로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회사를 하나 더 만든다는 건 무리한 시도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떤 회사를 만들려고 하는 건데요?”

혜영의 말 속에 담긴 염려를 느낀 성진은 달래듯 말했다.

“걱정 마요. 아주 확실한 사업 아이템이 있으니까.”

이후 이어지는 성진의 간단한 설명에 혜영은 처음에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게 가능하단 말이에요?”

“물론이죠. 제가 거짓말을 할 거 같아요?”

“아니요. 성진 씨가 이런 일로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니죠.”

그러면서 혜영은 성진의 말이 담긴 의미를 곱씹었다.

‘방사능을 정화하는 기술이라니…….’

혜영 역시 방사능과 관련된 세계적인 이슈에 대해 곧잘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방사능 물질을 제거한다는 것이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성진 씨가 하는 말이니까 믿겠지만 아직 감이 안 잡히네요. 그런 기술이라면 엄청난 고부가가치가 될 테니까요.”

스스로 사업가로 성공하겠다는 욕망은 없었지만 사업가의 딸로 자란 혜영에게는 사업적 비전이 먼저 생각났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미리 차근차근 준비할 생각이에요. 단순히 회사 하나를 만들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가장 자연스럽고 유리한 방향으로 기술을 드러낼 여건을 만들어야죠.”

“후우. 모르겠네요. 이거 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걸요.”

혜영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궁금증을 해소하러 왔다가 상상도 못한 엄청난 걸 들은 셈이었다.

“원하면 혜영 씨도 사업팀에서 일해 보겠어요? 비서 업무 보는 거 힘들 거 같은데.”

“어머? 성진 씨 지금 나를 떼어놓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네? 하핫. 무슨 그런 오해를. 아닙니다.”

“흐응. 그러고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요. 요즘 회사에 부쩍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요.”

“이상한 소문이요?”

“네. 성진 씨가 우리 집 사위가 될 사람이라 회장직 받았다는 소문이요.”

“네에?”

성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남자인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여자인 혜영에게는 큰 실례가 되는 구설수였다.

“미안해요. 미처 몰랐네요. 앞으로 그런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은 확실하게 조치할게요.”

“에이. 아니에요. 사람들 말 옮기는 게 다 그렇죠 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소문이라는 거 억지로 잡으려고 들면 반발심이 생기거든요.”

“흠. 알았어요.”

혜영은 쿨하게 말하며 넘겼다.

성진은 그런 혜영의 태도에 새삼 감탄했다.

‘이런 거 보면 정말 흔한 여자는 아니야.’

맺히는 게 없고 시원하게 넘긴다.

자기표현에도 솔직하고 지나친 무례도 없다.

“혜영 씨. 참 매력적인 여자예요.”

성진의 때 아닌 칭찬에 혜영이 눈을 흘겼다.

“어머 성진 씨.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여자 마음 설레는 거 몰라요?”

“앗. 그런가요?”

“차암. 이런 거 보면 성진 씨도 바람둥이 기질이 농후하다니깐요.”

혜영의 놀림에 성진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 * *

성진의 취임이 회사에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한참 어린 나이의 성진이 회장직을 맡았다는 게 증권시장에서 좋게 보일 리가 만무했다.

펀드 가입률이 급감하고 회사 평판이 떨어졌다.

안팎으로 말들이 무성했지만 성진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증권 수익 같은 데 더 이상 목을 맬 수는 없지.‘

성진이 그리는 큰 그림은 정작 따로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증권판의 평판은 호재 하나에 단박에 뒤집힌다.

성진이 준비하는 호재는 그야말로 넝쿨째 굴러드는 호박이었다.

성진의 집무실 응접 테이블 위에 두툼한 서류를 여기저기 펼쳐놓고 노트북으로 회의를 진행 중인 전략사업팀 팀원들이 앉아 있었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여러 관련 정부 부서의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나봤습니다.”

“그래요? 반응들은 어떻던가요.”

“정확하게 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소스를 다 공개한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어쨌든, 방사능 처리 관련 기술이라니까 수준만 된다면 반드시 승인할 의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고무적이네요.”

박윤호 상무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심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공무원들 말이야 상황이 바뀌면 또 바뀌니까.’

아직 어린 나이의 성진이었지만 관료 조직의 생리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기 마련이다.

정부가 지향하는 정책의 큰 틀은 결국 윗선의 뜻에 달려 있다.

“우리가 가진 기술은 절대 작은 게 아닙니다. 명심하세요. 큰 물고기를 잡으면 노리는 놈들이 많은 법이니까요.”

“예.”

분명 방사능 관련 기술은 엄청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런 마당에 다른 수작을 거는 자들이 없을까?

세상은 깨끗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성진은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걸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정부 쪽에도 미리 떡밥을 깔아놓고, 언론에 비칠 때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한 것처럼 인상을 보여줘야죠.”

“예. 맞습니다. 우리가 끌려 다닐 여지를 줘선 안 될 겁니다.”

회의에 임하는 팀원들의 태도는 아주 열정적이었다.

사실상 이들은 고속 승진 코스에 올라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팀원들의 기대를 성진이라고 모르진 않았다.

“이번 일의 성과 여하에 따라, 여러분들에게 내리는 성과급도 결정될 겁니다. 다들 분발해주세요.”

“예. 회장님!”

성진의 격려 한마디에 팀원들은 일제히 복창했다.

“좋습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성진은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    *    *

한때 대다수 소년의 꿈이 과학자였던 시절이 있다.

80년대에 유행했던 로봇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란 소년들.

그들은 자라면서 과학자가 되었고 지금 40대의 강석천 박사도 그런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하하. 이거 참.”

교외 변두리의 대포집.

차가운 소주잔을 혼자 기울이면서 강석천은 실없이 웃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그저 웃음만 나온다.

어렵게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에서는, 더 어렵게 공부해야 했다.

밤을 새우는 건 기본, 밥 먹을 시간까지 아껴가며 노력했지만 경쟁은 끝이 없었다.

그래도 젊음의 패기가 있어 견딜 수 있는 시절이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한 만큼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릴 거라 믿었다.

‘그랬는데…….’

회한을 담은 눈물방울이 볼을 적시면서 흘러내린다.

왈칵 터지려 하는 울음보를 혼자 끅끅 참아 넘기면서 그는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크아.”

목구멍에서 치솟는 화기를 뱉으면서 그는 다시 소주병을 기울였다.

그때였다.

“이거 대낮부터 약주가 과하십니다.”

소주병을 붙잡는 낯선 손길에 강석천의 눈길이 위로 올려졌다.

“누구십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젊은 남자였다.

이십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건장하고 훤칠한 인상의 남자는 질문부터 던졌다.

“혹시 플루토 투자그룹이라고 아십니까?”

“플루토 투자그룹이요?”

강석천의 머릿속에 익숙한 느낌이 겹쳐 떠올랐다.

중년 나이의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재테크에 관심을 두게 되는 법.

그도 주식에 대해 잠시 솔깃했던 무렵 플루토 투자증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 플루토 증권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는데..”

“예. 이번에 회사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그 회사에서 나온 사람이구요.”

“예. 그러시군요.”

강석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금융회사에서 자신을 뭐 때문에 찾아왔을까 궁금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죠?”

“간단합니다. 강석천 박사님을 스카웃하러 왔죠.”

“저를요?”

뜬금없는 스카웃 제의에 강석천은 어안이 벙벙했다.

“제가 금융회사에서 뭘 할 수 있다고 스카웃을…… 전 수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요.”

“아닙니다. 저희는 물리학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강석천 박사님을 초빙하려는 겁니다. 그 외에 기계, 전산, 전자 분야의 박사님들도 모시려고 애쓰는 중이죠.”

“금융회사에서 왜 물리학 박사를 필요로 하십니까?”

“당연히 사업을 하기 위해서죠.”

“사업이요?”

“예. 다행히 강 박사님께서 지금 따로 소속된 곳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 예.”

강석천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끄응. 하긴 다 알고 찾아온 거겠지.’

얼마 전까지는 국가 연구소에 소속된 연구원 신분이었다.

허나 그는 몇 년을 연구원으로 봉직하다 얼마 전 백수가 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제가 비정규직 연구원이었던 거 알고 계십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플루토 투자그룹의 한성진입니다.”

남자가 건넨 명함 위에 한성진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선명했다.

그리고 그 앞에 박혀 있는 직함이 강석천을 놀라게 했다.

“회장? 당신이 회장이라구요?”

“예. 제가 플루토 투자그룹의 회장. 한성진입니다.”

여유로운 표정의 남자.

성진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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