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회: 4권 - 006. 후계 -->
“어땠어요?”
자리를 옮기자마자 혜영은 성진의 소감을 물었다.
“괜찮았습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인 것 같네요.”
그 말을 들은 혜영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다행이네요. 난 혹시 성진 씨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불편이요?”
성진의 질문에 혜영은 살짝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성진 씨. 생활해온 환경이 다르다 보니까 어쩌면 서로 오해가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걱정 마요. 전 혜영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마음이 넓은 남자입니다.”
성진은 가볍게 대꾸하면서 혜영에게 웃어보였다.
“그래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마주 웃어 보인 성진과 혜영은 다른 또래의 기업가들이나 금융계통 종사자들을 몇 사람 더 소개받았다.
때로는 성진의 얼굴을 알아보고 먼저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성진으로서는 무례한 상황도 나름대로 각오했지만 의외로 성진에게 거만을 떠는 자는 없었다.
‘하긴. 나도 이제 실력을 갖춘 셈인가.’
이 나라 재계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갖춘 사람들이 모인 자리.
이곳에서 성진은 이미 나름대로 대접받을 만한 위치와 실적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 위치를 성진 자신이라고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다.’
성진은 그럴수록 자기 자신을 엄하게 다잡았다
주변의 반응이 성진 자신을 규정해선 안 된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주변의 입김에 떠밀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그런 거 걱정하지 마세요. 남이 누가 뭐라고 하든 저는 크게 신경 안 씁니다.”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성진은 뒷말을 삼키고 혜영과 연회장의 분위기를 조용히 즐겼다.
그때 한쪽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 * *
사람들의 이목이 새로 나타난 인물들에게 단숨에 쏠렸다.
서늘한 눈매를 가진 성진 또래의 젊은 남자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연회장을 누볐다.
“누구죠?”
혜영에게 묻는 성진이었지만 궁금해하는 동시에 인공지능 팔찌가 관련 인물로 추정되는 데이터를 시야 한구석에 쏟아놓았다.
“강후그룹 후계자 후보 중 한 사람이에요.”
“강후그룹이요?”
강후그룹이라면 한국에서 손꼽히는 굴지의 대기업이다.
다른 사람들이 크게 놀라 주목하는 이유는 결국 대기업 후계자가 연회에 참석한 까닭이었다.
“반응이 엄청나군요.”
“어떤데요?”
“글쎄요. 마치 아이돌을 만난 팬클럽 같달까?”
성진의 비유에 혜영은 가볍게 쿡 웃었다.
“세상에 그런 식으로 지금 상황을 비유하는 사람은 성진 씨뿐일 거예요.”
“그런가요? 하하.”
“뭐,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건 아니네요. 애초에 우리하고는 별세계 사람이기도 하고.”
“별세계요?”
성진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혜영 자신도 객관적으로 보면 부호의 자녀다.
그런 그녀가 별세계 사람이라고 호칭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럼요. 예를 들어서…… 음. 성진 씨. 방금 전 대화한 제 친구들, 남자들은 전부 군대 갔다 왔거든요.”
“음. 그래서요?”
“우리나라 재벌 3, 4세들 중에 군대 갔다 온 사람들 얼마나 될까요?”
“아…….”
성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뭐 길게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니까요.”
혜영은 생긋 웃으며 뒷말을 대신했다.
성진도 태연하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마음은 좋지 않았다.
‘누구는 힘이 없어서 군대를 가는 건가.’
국방, 병역의 의무는 말 그대로 의무라서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연히 알고 있던 세상의 부조리를 직접 대면하고 나니 기분이 편하지 않다.
‘그리고 눈앞의 저 친구도 군 면제고 말이야.’
인공지능 팔찌가 출력한 인물 정보란에 눈앞의 강후그룹 후계자는 난치성 질환으로 인한 군 면제로 되어 있었다.
실제로 정당한 사유로 인해 군 면제를 받는 재벌도 있을 것이다.
공교로운 의심을 사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허나 이 자리에 온 강후그룹 후계자는 인공지능 팔찌의 스캔 결과 질병의 징후 같은 건 보이지 않는 건강 그 자체였다.
‘이런 건가.’
감회가 새롭다.
그동안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과연 무엇을 바꿀지 확실하게 생각했나 싶었다.
“혜영 씨. 오늘 이 자리에 불러줘서 고마워요.”
“그래요?”
혜영은 성진의 말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는 심심해하던 표정이었는데, 지금 뭔가 성진 씨 표정이 달라졌는데요?”
혜영은 유심히 성진의 얼굴을 살폈다.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를 닮아서 감이 좋은 건가.’
박천중 회장도 성진의 내심을 곧잘 살피더니 혜영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사실 저는 세상을 좀 안다고 생각했어요.”
인공지능 팔찌로부터 막대한 지식을 얻으면서 성진의 마음에는 비할 바 없는 자신감이 싹텄다.
“그런데 역시 세상은 직접 겪어봐야 제대로 느껴지네요.”
머리로 아는 것과 현실에서 와 닿는 기분은 다르다.
성진은 장차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바꿔 나갈지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었다.
“그거 약간 선문답 같은데요? 뭐 나야 성진 씨가 좋다면 그걸로 됐어요.”
혜영은 나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성진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혜영 씨. 세상을 바꾸려면 역시 힘이 있어야겠죠?”
“네?”
다시 이어지는 성진의 엉뚱한 말에 혜영은 피식 웃었다.
“당연히 그렇겠죠. 힘없는 정의는 죄악이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그렇죠. 힘없는 정의는 죄악이다…… 맞는 말이네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힘이라…….’
모두가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을 가지길 원한다.
그리고 지금 성진은 그런 힘을 어느 때보다도 원하기 시작했다.
‘까짓것. 가져보자고. 그 힘이란 거.’
물론 성진에게는 그런 힘을 가질 능력이 충분했다.
* * *
시간이 지나고 슬슬 파장 분위기가 되었다.
조금씩 사람들이 빠져나가 연회장이 완전히 비어갈 즈음 박천중 회장도 성진에게 다가왔다.
“어땠나?”
“직접 보는 건 역시 다르네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래? 하핫.”
박천중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 세상이 어떤지는 자네도 잘 알겠지. 그래도 이렇게 직접 와서 보면 참 재밌지 않나? 이 세상이 돌아가는 요지경이 말이야.”
“재밌긴 한데 굳이 자주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자리까지 와서 세상의 썩은 모습을 확인하는 게 썩 즐겁지 않았다.
“그런가? 아무튼 여기까지 굳이 자네를 데려온 이유가 따로 있다네.”
“이유요?”
“그래. 성진 군. 나 말이야 회장 자리 이거 그만둘 거야.”
“예?”
전혀 의외의 말이라 성진도 의아스러웠다.
“자네한테도 말했지?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자리가 아니라고.”
“예에…….”
성진은 박천중 회장에게 얽힌 죄책감의 그늘을 읽었다.
“뭐 이런다고 나 같은 사람이 죄를 더는 건 아니지만 내가 가진 재산으로 복지재단 같은 걸 만들 생각이야. 남은 여생은 나눔을 실천하면서 살고 싶어.”
“그러면 회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회사? 아니 그거야 무슨 걱정인가? 여기 차기 회장이 버젓이 있는데.”
“예?”
그 말에 성진은 깜짝 놀랐다.
“회장님.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이라니? 똑똑한 친구가 다 알아들어놓고 웬 능청인가?”
이어지는 말에 성진은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자네가 우리 회사 맡으란 소리야.”
박천중 회장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성진을 바라봤다.
* * *
“가족인 혜영 씨도 있는데 왜 하필 저를 원하시는 겁니까?”
성진의 말에 박천중 회장은 껄껄 웃었다.
“가족? 자네 지금 가족이라고 했나? 이 박천중이가 그래 수많은 사원, 딸린 식구들 목숨 줄을 내 딸내미라고 덜컥 맡길 거 같나?”
“저한테 맡기시는 것도 쉽게 납득될 일 아닙니다.”
성진의 항변에 박천중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아는 친구 중에 자네처럼 곧은 심지에 능력까지 받쳐주는 경우 못 봤어.”
“회장님.”
성진의 거부 의사에 박천중 회장은 성진의 양손을 잡았다.
“내가 자네 말고 누구한테 맡기겠나? 날 좀 이해해주게. 사실 상황이 허락한다면 내가 스스로 법 앞에 죗값을 청하고 싶어. 하지만 이미 커버린 이 회사 사원들은? 식솔들은? 무슨 죄인가.”
“그러시다면 그냥 계속 회장직을 맡으십시오.”
“아니야. 나는 더 이상 그럴 기운도, 의욕도 없어. 실상 자네를 보면서 나는 이 자리가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싶었네.”
박천중 회장의 간곡한 부탁에 성진은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다.
‘까짓것…….’
해내지 못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성진이 벌려야 할 일이 많은데 회장직까지 수행하면 어쩐지 귀찮아질까 부담스러운 마음이 살짝 있었다.
“성진 군. 자네밖에 없네.”
이어지는 간절한 애원.
‘생각해보면 하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
지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 팔찌의 도움을 받는 이상 회장직을 수행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을까 싶었다.
성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허허허! 그래! 그래 정말 잘 생각했어.”
화색을 짓는 박천중 회장이었지만 성진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혜영 씨가 괜찮을까요? 제가 괜히 가로채는 느낌입니다.”
“그 녀석이라면 걱정 말게. 내가 잘 알아. 그 녀석 회장 자리, 회사 재산, 이런 거 욕심 없는 아이야. 있다고 해도 회장 자리는 감당할 능력이 안 돼.”
박천중 회장이 딱 잘라 말하는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아버지 딸이 뭐가 어때서요?”
혜영이 어느새 다가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진이 내친 김에 입을 열었다.
“혜영 씨. 지금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해야 할 말이요? 그거 혹시 사랑 고백이었으면 좋겠는데.”
“혜영 씨. 그게…….”
“알아요. 아버지가 무슨 말 했는지.”
“네?”
과연 성진이 돌아보니 박천중 회장과 혜영이 서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이런 자리까지 성진 씨 굳이 데려온 이유가 뭐겠어요? 앞으로 차기 회장이 될 성진 씨 얼굴을 자연스럽게 알리려면 이런 자리가 좋죠.”
“과연.”
성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어째 당한 기분인데요?”
“에이. 좋게 생각해줘요.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회장님?”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혜영이 박천중 회장을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좋습니다. 이번엔 제가 당해드리죠.”
성진의 기분 좋은 응낙에 박천중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하네. 한성진 회장.”
* * *
며칠 후 플루토 관련 계열사 전체에 대형 특종이 터졌다.
“뭐? 회장님이 물러나신다고?”
본사 격이라고 할 수 있는 플루토 투자증권에서도 처음 듣는 특종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럼 결국 그 회장님 따님이 물려받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 회장들 다 자식한테 물려주잖아.”
직원들이 모일 때마다 최근에 등장한 박천중 회장의 외동딸, 혜영이 새로 회장이 될 것이란 얘기로 들끓었다.
하지만 몇 달 후 정작 회장실에 새로이 입성하게 된 인물은 전혀 예상 범위에 없던 인물이었다.
* * *
“이번에 플루토 투자그룹의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 한성진이라고 합니다.”
본사 격인 플루토 투자증권과 각 계열사 임직원들을 모아놓은 대강당 안.
성진은 가벼운 목례와 함께 직원들 앞에서 취임사를 발표했다.
전혀 의외의 신임 회장이 내정되었다는 소식에 한때는 회사 안팎이 시끄러웠지만 성진이 투자사를 이끌면서 보여준 막대한 수익률로 능력을 보여줬음이 알려지자 곧 잠잠해졌다.
어디든 그렇겠지만 금융계에서도 실적이 곧 능력이었다.
“우리 플루토 투자그룹은 향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새로운 도전에 부응해주시길 소망합니다.”
취임사를 끝맺음하면서 성진은 속으로 읊조리며 웃었다.
‘새로운 도약 정도가 아니라 끝내주게 바쁜 한 해가 될 겁니다, 여러분.’
임직원들의 박수갈채를 들으면서 성진은 목례로 화답했다.
강단을 내려오자 혜영이 미리 준비한 물 컵을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장님.”
“고마워요 박 비서.”
혜영은 그대로 회장 비서직을 수행하기를 고집했다.
덕분에 성진은 요즘 들어 부쩍 여자로 다가오는 혜영을 상대할 때마다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써야했다.
“새로 신설한 전략사업팀 팀장이 보고를 드릴 게 있다고 하네요.”
“전략사업팀이요?”
성진이 회장직에 취임하면서 새로이 신설한 조직이었다.
안팎에서는 신임 회장의 친위대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성진이 비교적 가까이 두던 인물들 위주로 꾸려졌다.
그리고 그들을 총괄하는 인물이 바로 박윤호 상무였다.
“그래요. 바로 집무실로 가죠.”
“예 회장님.”
공석에서만은 철저하게 비서로서 대하는 혜영은 사석에서의 활기찬 태도와는 달리 묵묵히 성진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