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89화 (89/185)
  • <-- 89 회: 4권 - 005. 사교계 데뷔 -->

    성진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잘나간다는 플루토 투자신탁의 사장이 자네였구만. 아주 명성이 자자해.”

    “과찬이십니다.”

    적당히 겸양을 보이며 사람들을 상대해준 성진은 박천중 회장의 내심이 얼핏 보였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불러내 소개한 까닭은 결국 성진을 자기 사람이라고 못박아두기 위한 속셈이었다.

    ‘뭐 아주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성진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하늘에서 툭 튀어나온 인물을 경계한다.

    듣도 보도 못하던 인물이 갑자기 잘 나가기 시작한다면 불필요한 의혹을 살 수 있다.

    성진이 애당초 박천중 회장을 도운 것도 그런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자 한 측면이 있었고, 이제는 박천중 회장이 성진을 붙잡아두고 싶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다.

    “허허허. 이 친구 덕에 요즘 우리 회사가 크게 성장했어.”

    박천중 회장의 은근한 자랑에 다른 사람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그러게나 말이야. 어디서 이렇게 재주 많은 친구를 찾아냈나?”

    “갑자기 자네가 회사를 만들어서 어린 친구를 사장에 만들 때는 다들 자네가 미쳤다고 했는데 말이야.”

    “그랬나?”

    “그럼. 심지어는 이 친구가 자네 숨겨 놓은 아들이란 소문도 돌았잖아.”

    “어이쿠. 이 친구.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허허헛.”

    “하핫. 내가 실례했구만. 자네 혹시 사귀는 애인은 있나?”

    “아 예. 그건…….”

    성진이 적당히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성진의 한쪽 팔을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머 성진 씨.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미소를 지으면서 성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여인.

    혜영이 박천중 회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빠. 저 이제 성진 씨 데려가도 되죠?”

    “그래! 그려러무나. 허허헛.”

    박천중 회장이 껄껄 웃었다.

    공교롭게도 이제 누가 봐도 혜영이 성진의 애인으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혜영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성진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굳이 부정하기도 애매해서 성진은 혜영의 손길에 이끌려서 자리를 떠나야 했다.

    이제 저 사람들에게 성진은 임자 있는 몸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내가 데리고 온 자리에서 엉뚱하게 성진 씨를 뺐길 수는 없죠.”

    혜영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성진에게 웃어보였다.

    “이거 참. 저분들은 제가 혜영 씨 애인인 줄 알겠습니다.”

    성진의 가벼운 투덜거림에 혜영이 얼굴을 바싹 붙이며 말했다.

    “어머? 그러면 더 좋은데요? 이거 그러면 내가 도장 찍을까요?”

    혜영이 입술을 앙 내밀어서 성진의 볼에 닿았다.

    “어엇…….”

    성진이 멈칫거리는 순간 입술을 뗀 혜영이 웃으며 말했다.

    “입술 도장이에요. 나쁘진 않죠?”

    “참. 혜영 씨는 정말 못 당하겠네요.”

    성진은 혜영의 변화무쌍한 적극성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당하겠으면 이제 그만 나한테 넘어와요.”

    틈을 놓치지 않고 혜영은 당당하게 고백해왔다.

    하지만 성진은 미안한 표정이었다.

    “글쎄요. 아직 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어휴. 또 그 소리에요? 도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하길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겁니다. 조만간요.”

    오만해 보일 정도의 자신만만한 태도였지만 그 말을 듣는 혜영에게는 액면 그대로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그녀에게 있어 성진이 보여준 능력은 이런 자신감 이상이었다.

    “좋아요. 기다릴게요.”

    그녀는 순순히 물러났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녀는 그런 이치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성진은 그녀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어. 혜영 씨.”

    “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성진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혜영 씨 말고도 저에게 고백해온 여성들이 있어서요.”

    “네에?”

    혜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 *

    “산 넘어 산이군요.”

    살짝 삐친 표정을 한 혜영이 냉담한 표정으로 한 말이었다.

    성진은 차마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혜영 씨.”

    “뭐, 성진 씨가 미안할 일은 아니죠. 보물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거야 당연한 거니까.”

    말투는 침착했지만 혜영의 표정은 여전히 새침했다.

    ‘에휴. 이거 참.’

    성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혜영의 발걸음을 뒤쫓았다.

    마침내 혜영이 다다른 곳에는 비교적 젊은 남녀가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 혜영아.”

    개중 밝은 보랏빛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혜영을 보고 손짓했다.

    “안녕! 윤지야. 오랜만이지?”

    잘 아는 사이인 듯 혜영이 마주 손짓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혜영을 보며 가볍게 인사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

    윤지라고 불린 여성이 성진을 가리키자 혜영이 재빨리 나섰다.

    “어. 이쪽은 플루토 투자신탁의 한성진 사장.”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아마도 이들이 혜영이 소개해주려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성진은 인사하면서 그들의 면면을 차분하게 살폈다.

    훤칠한 남성이 세 명 그리고 활기차고 생기 있는 아가씨가 두 명.

    공통점이라면 모두 한점의 구김살 없이 당당함이 배어 나왔다.

    ‘한마디로 풋풋하군.’

    얼마 전까지의 성진이었다면 이들을 평가하기는커녕, 이들보다 훨씬 열악한 처지에서 시달리는 처지였을 것이다.

    허나 지금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 흡수한 지식은 물론, 여러 일을 겪으면서 훨씬 더 단련된 품성을 갖추고 있었다.

    친구인 종연에게서도 애늙은이 소리를 들을 만큼 성진은 이미 또래와는 다른 성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혜영 씨와는 어떻게 되시는 사이죠?”

    성진을 바라보던 남자들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말투는 정중한데 성진을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적의는 아닌데…….’

    가만 보니 입가에 묘한 장난기가 어린 것이 성진을 가볍게 떠보려는 모양이었다.

    “뭐, 그냥 최근에 알게 된 친구 사이입니다.”

    “오호! 친구라…….”

    가볍게 탄성을 지르는 남자들을 보면서 혜영이 눈을 흘겼다.

    “그 반응은 또 뭐야?”

    “에이. 우리야 그냥 혜영이 네가 혹시 서른 전에 시집 가려나 했던 거지 뭐.”

    남자들은 혜영과 제법 절친한 사이인 듯 능청을 떨었다.

    “친한 사이신 거 같군요.”

    성진의 말에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혜영이가 워낙 활달해서 금방 친해졌죠.”

    “하핫. 헤영이 얘가 성진 씨한테 어떻게 보였는지 몰라도 아주 애가 왈가닥입니다. 겉모습에 속지 마세요.”

    “뭐어? 니들 무슨 엉뚱한 소리야? 성진 씨. 쟤들 말 듣지 마세요.”

    혜영이 살짝 눈을 흘기며 남자 친구들을 노려보자 혜영의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분위기가 살짝 풀어지자 이번에는 성진에게 관심이 옮겨졌다.

    “그런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아! 스물세 살입니다.”

    “스물…… 세 살이라구요?”

    성진의 나이를 들은 좌중이 살짝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거 의외네요. 이렇게까지 젊은 분이실 줄은.”

    “아니요. 여러분들과 저는 별로 그렇게까지 나이 차이가 나지는 않을 텐데요.”

    담담히 말하는 성진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은 놀라워하는 반응이었다.

    요즈음 성진이 이끄는 플루토 투자신탁은 금융가에서 단연 화제였다.

    출범한 지 1년도 안 되는 투자사가 돌풍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니 누구라도 한 번쯤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사장이 한참 어리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정말 스물 세 살 밖에 안 됐다는 걸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순간 미묘해진 분위기를 눈치 챈 혜영이 재빠르게 나섰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성진 씨, 소개할게요. 이쪽은 대영실업 근무하시는 장효원 씨.”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

    혜영의 소개가 이어지면서 저마다 차례차례로 정식 소개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소개하면서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자신과 관련된 집안의 배경, 회사 이름이었다.

    ‘다들 부잣집 후계자라는 건가.’

    물론 그런 점에 대해서 성진이 불편한 감정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꿀릴 게 없기도 하거니와 특별히 성진을 두고 불쾌할 만큼의 위세를 부리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로서는 뛰어난 투자 사업가로 소문난 성진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두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소개가 끝나고 다양한 화제로 대화가 옮겨가자 다른 사람들은 또 한번 놀랐다.

    성진이 통찰하는 세계경제, 국내 경기 등의 이슈 분석이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놀라운데요. 나이도 저보다 젊으신 분이 이 정도 실력이실 줄은…….”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고 성진은 너무 지나쳤나 싶어 겸손을 취했다.

    “아니요. 고작 말 몇 마디 과장해서 한 것뿐입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희처럼 해외 경기에 몸살 앓는 회사들은 방금 하신 말씀을 흘려들을 수가 없네요. 언제 시간 되시면 따로 만나서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특히나 해외 수출에서 매출 비중이 큰 회사의 인물들은 평상시 보고 느낀 바가 있었기에 성진의 의견이 탁월한 근거가 있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이거 너무 비행기를 태우시는데요. 그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성진은 괜히 귀찮아질까 싶어 손사래를 치며 겸손을 보였지만, 이미 성진의 식견을 알아본 사람들은 감탄할 뿐이었다.

    “아니요. 실무에서 뛴 지 벌써 수 년입니다. 그동안 경제 분석기사다, 전문가다 하는 사람들 지겹게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한성진 씨 말씀을 들으니까 오늘 아주 귀가 뻥 뚫리는 느낌이네요.”

    “정말 이 친구 말대로입니다. 혹시 골프 좋아하십니까? 괜찮은 클럽 회원권이 있는데…….”

    벌써부터 성진에게 개인적 친교를 맺으려는 친구들의 모습에 혜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보석은 바라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나?’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남자를 두고 경쟁자가 생긴다 한들 혜영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다.

    이미 그녀는 성진에게 끌리기 시작한 지 오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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