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88화 (88/185)
  • <-- 88 회: 4권 - 005. 사교계 데뷔 -->

    시간이 지나면서 플루토 투자신탁은 나날이 위상이 높아졌다.

    성진 나름대로는 확확 솟구치는 게 아니라 꾸준히 성장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세계 경기가 얼어붙은 상황 속에서 신생 투자사가 꾸준히 성장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이번 분기 실적은 예상치보다 훨씬 더 초과 달성되었습니다.”

    간부들의 표정은 굉장히 밝았다.

    상당수는 경력적으로 중요한 시기의 중년의 나이다.

    가뜩이나 자리가 불안한 금융 계통.

    반신반의하면서 이직한 회사가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나가는 모양새니 기뻐할 수밖에 없다.

    “그렇군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성진은 적당히 공치사를 건넸지만 간부들은 머쓱해했다.

    “아닙니다. 저희야 사장님 지시를 따라온 것뿐이죠.”

    겸손이 아니라 진짜였다.

    투자종목을 정하는 것 자체가 큰일인 다른 투자사들과는 달리 플루토 투자신탁은 성진이 하달하는 확고한 투자방침과 물목이 정해져 있었고, 사원들이 하는 일은 세부적인 관리뿐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직원들의 노고부터 치하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들 최선을 다해서 가능한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일사분기 성과급은 넉넉하게 책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간부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백 마디 칭찬보다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얘기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말이야 쉬워도 실제로 실적을 사원들과 나누는 보스는 흔치 않은 법이다.

    “그럼, 수고 많으셨습니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예 고생하셨습니다.”

    간부들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성진은 그 와중에 박윤호 상무를 불렀다.

    “박 상무님. 잠시 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아! 예, 사장님.”

    막 회의실을 나서려던 박윤호는 즉시 뒤돌아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간부들이 모두 회의실을 나가자 성진은 즉시 본론을 꺼냈다.

    “이제 회사도 커졌으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을 거 같습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박윤호는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성진이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잡으며 말하니 앞으로 벌일 일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성진은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씨익 웃었다.

    “예. 일을 또 한판 벌여보려고 합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전심전력으로 돕겠습니다.”

    “하핫. 말씀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말뿐이겠습니까. 저희야 사장님이 뭘 하시겠다는 말씀만 들어도 가슴이 요동칩니다.”

    핑크레터 시절부터 보여준 성진의 수완은 보통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이 나라 정계까지 뒤흔들어 놓은 성진이 이번에 벌이고자 하는 일이 결코 시시한 일이 아니리라.

    긴장과 흥분이 역력한 박윤호를 보면서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늘 박 상무님이나 다른 분들 믿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도 잘 좀 부탁드립니다.”

    성진은 서류 몇 장과 함께 usb메모리를 건넸다.

    “이건 보시고, 반드시 유출되지 않게 잘 관리하십시오.”

    “아, 예.”

    박윤호는 조심스럽게 usb메모리와 서류를 받았다.

    “이게……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하십시오. 아무튼 이번 일을 진행하는 데 박 상무님께서 많은 부분을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모쪼록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현재 업무를 중단하시고 필요하면 따로 필요한 인력을 차출하셔도 좋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안에 담긴 자료는 성진의 방사능 정화 기술 프로젝트에 대한 간략한 정리와 필요한 실행계획 등이 담겨 있었다.

    유출되면 약간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는 정보들이었지만 박윤호는 정보 관리자로 오랫동안 일해온 사람이었다.

    “전진수 부장하고도 같이 뛰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안 끼워주면 섭섭해할 겁니다.”

    미소를 짓는 성진에게 목례한 박윤호는 자료를 챙겨들고 회의실을 나갔다.

    “좋아. 슬슬 시동을 걸어볼까.”

    성진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 *

    혜영과의 약속이 잡힌 날.

    성진은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혜영의 집을 찾았다.

    “일찍 왔네요, 성진 씨.”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혜영은 드레스 차림으로 현관을 나왔다.

    경박한 파티복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격식과 예의를 갖춘 복장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혜영의 육감적인 몸매와 농염함은 전혀 가려지지 않는 차림새였다.

    “약속 시간은 지켜야 하니까요.”

    성진은 그런 혜영 앞에서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 태연하려 애쓰며 웃었다.

    “그래요. 우리 빨리 가죠.”

    혜영은 머리를 매만지면서 아파트 복도를 걸었다.

    한걸음씩 발을 옮길 때마다 드레스 치마 사이로 각선미가 드러났다.

    성진은 그저 최대한 혜영에게 시선이 가지 않도록 애쓸 뿐이었다.

    주차장에 다다르자 성진이 차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혜영은 가볍게 눈웃음을 치더니 앞쪽 옆자리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혜영 씨?”

    “전 이 자리가 좋아서요. 뭐해요? 빨리 타요.”

    뭘 하냐는 듯 성진을 빤히 쳐다보는 혜영을 보고 성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가죠.”

    성진이 시동을 넣자 차는 부드럽게 혜영의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혜영이 말한 약속 장소인 호텔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대형 호텔이었다.

    정문부터 값비싼 외제차들이 차례대로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주차요원들과 안내원들이 바쁘게 손님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떠들썩해 보이네요?”

    “네. 재계의 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라서요.”

    성진의 물음에 혜영이 웃으며 답했다.

    간단한 사교 모임으로 생각했는데 꽤나 큰 규모로 열리는 행사인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내리죠.”

    혜영이 차 문을 열고 나간 뒤 안내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주차요원에게 차 열쇠를 건넨 성진이 혜영과 함께 행사 장소로 들어갔다.

    악기 연주자들이 직접 음악을 연주하고, 얼음 조각상이 가운데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각각의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었다.

    “왔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박천중 회장이 술잔을 들고 웃으며 서 있었다.

    “아! 회장님.”

    “혜영아. 잠깐 남자들끼리 대화할 게 있으니까 넌 딴 데 가서 놀아.”

    “뭐예요? 칫. 그래요 남자들끼리 재미나게 노세요.”

    혜영이 짐짓 삐친 척 혀를 쏘옥 내밀고 다른 쪽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어때? 둘러 보니까.”

    박 회장의 물음에 성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별로 즐기려고 오는 장소 같지는 않네요.”

    “바로 맞췄어. 이런 자리에 뭐 마음 편하게 술 마시고 파티 즐기려고 오는 사람이 있겠나?”

    박천중 회장이 군데군데 눈짓을 하며 가리켰다.

    “저마다 이익이 되는 사람들,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 서로 짝 맞춰서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려고 아우성이야. 그 와중에도 힘 있는 사람들은 편하지.”

    박천중 회장이 가리킨 곳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정치인이나 대기업 관계자들이 있었다.

    “저거 보게. 이 세상이 실력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게 다 저런 거 때문이지.”

    “그렇군요.”

    그런 모습을 보는 성진은 담담할 뿐이었다.

    저런 모습을 비난할 생각도, 같이 따라할 생각도 없다.

    성진에게서 흘러나오는 당당한 자신감, 기백은 그 자체로 당당한 존재감이었다.

    박천중 회장에게서 자신의 속내를 들킨 이후로 그런 부분을 극도로 조심하는 성진이었지만, 본성은 결코 감출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자리가 위계질서를 재확인하는 셈이야.”

    “그럼 저를 부르신 이유는 이런 걸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까?”

    성진의 물음에 박천중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늘은 자네를 멋지게 데뷔시키려고 부른 걸세.”

    “데뷔요?”

    “그래. 굳이 말하자면 사교계 데뷔라고 해야겠군?”

    한쪽 눈을 윙크한 박천중 회장이 곧 다른 쪽을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다른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성들이 각각의 수행원들을 끌고 성진에게 다가왔다.

    “이 친구인가?”

    개중 가장 완고해 보이는 남자가 성진을 바라봤다.

    박천중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성진을 소개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 친구가 요즘 날 도와주고 있는 한성진이라고 하네.”

    “한성진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