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회: 4권 - 004. 치료 -->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한창 업무에 집중하는 오후 무렵.
영식의 전화를 받은 성진에게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는 영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형! 병이 나으셨대요. 아주머니 병이 나으셨대요.”
상황을 익히 아는 성진은 흥분했을 영식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면서 말을 받았다.
“병이 나으셨다고?”
“예. 병이 완전히 나으신 건 아니구요. 조금씩 신경이 돌아왔대요.”
“그래? 정말 잘 됐네.”
“예! 의사 선생님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대요. 미란이 누나도 막 울먹거리던데요.”
“울기까지? 하핫. 미란 씨가 많이 기뻤구나.”
기뻐할 거라고는 예상했다.
막상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알게 되니 성진은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잘됐네. 그럼 이따가 미란 씨 어머님 병원으로 같이 가보자.”
“예. 그럴게요, 형.”
“그래. 이따가 보자.”
성진은 전화를 끊고 다시 업무에 전념했다.
그러면서도 입술 끝에 미소가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훗.”
* * *
업무가 끝나자마자 영식을 데리고 다시 병실을 찾았다.
병실 안에는 고요한 흥분이 서려 있었다.
상기된 표정의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주변 환자들의 표정에도 저마다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환자분. 손가락, 움직이실 수 있겠어요?”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던 미란의 어머니.
젊은 의사의 말이 떨어지고, 그녀의 얇은 새끼손가락 하나가 어렵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엄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란은 벅찬 마음에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때마침 도착해서 병실 문가에서 지켜본 성진과 영식도 마음이 짠해졌다.
“병세가 많이 나아졌네요. 운동신경이 미세하게나마 회복된 것 같습니다.”
한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년 의사가 미란의 아버지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선생님. 그럼 우리 집사람, 나을 수 있는 겁니까?”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병세가 확연히 나아졌다는 건 분명합니다.”
중년 의사는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그의 표정에도 긍정적인 밝은 빛이 떠올랐다.
그것만으로도 미란의 아버지와 주변 환자들의 표정에는 희망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는 미란의 아버지였다.
힘든 환자들이 모인 중환자 병동이다.
비슷한 처지의 주변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의 기적적인 차도에 한마음으로 응원을 보냈다.
“우리 이 씨. 딸내미랑 그렇게 지극정성이더니 하늘이 무심치가 않구만.”
“이 씨. 정말 잘 됐어요.”
“아이구. 진짜 내가 다 눈물이 나네.”
주변 환자들의 애정 어린 말에 미란의 아버지는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병을 낫게 해준 그 무언가에 감사를 표하려는 듯, 미란의 아버지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다만 중년 의사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미란의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보호자분. 아직 너무 마음 놓으시진 마시구요. 좀 더 경과를 보고 차후에 다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예. 그럼.”
앞장선 중년 의사를 따라 의료진들이 복도로 빠져나왔다.
복도 구석에서 병실 안을 지켜보던 성진과 영식은 서로를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우린 좀 이따가 들어가자.”
“예. 좀 진정된 다음에 들어가야겠어요.”
“그래.”
성진과 영식은 조용히 병동 복도를 빠져나왔다.
* * *
잠시 뒤에 병실을 찾은 성진을 미란은 방긋 웃는 표정으로 맞이했다.
“어서 와요, 성진 씨.”
“얘기 들었어요, 미란 씨. 어머님 병세가 나아졌다구요?”
“네에. 그런데 아직 얼떨떨해요. 의사 선생님은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고 하시는데…… 저도 긴가민가하구요.”
말과는 달리 아직도 흥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미란이었다.
연달아 말을 쏟아내는 미란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잘됐어요. 정말.”
“네. 그런데 저…….”
미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번 일. 성진 씨 덕인 거 같아요. 그런 기분이 드네요.”
“예? 하핫. 아니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성진의 표정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조직을 직접 꾸려가다 보니 요 근래 들어서 스스로 많이 뻔뻔해졌음을 실감하는 성진이었다.
“다 미란 씨와 미란 씨 아버님 정성 덕분입니다. 어머님이 스스로 나으려는 의지를 가지셨으니까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왔겠죠. 앞으로 쭉 기다려 보세요. 제 생각에는 반드시 완쾌되실 겁니다.”
“네. 그럴 거예요. 저도 그렇게 믿어요.”
미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제 막 음료수를 사들고 오는 영식이 돌아왔다.
영식은 마주 서 있는 미란과 성진, 두 사람을 목격하자마자 제 자리에 우뚝 섰다.
“헛! 이 분위기는 혹시…….”
잔뜩 과장의 기미를 보이던 영식은 손가락을 척 들더니 히죽거리며 말했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
미란은 얼굴을 붉힐 뿐이었지만 즉시 성진이 나섰다.
“영식아. 많이 컸구나.”
성진은 손을 뻗어서 영식의 뒤통수를 마구 부비적거렸다.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지만 성진의 손길은 집요하다.
결국 영식은 바로 항복 선언을 했다.
“으앗! 형! 잘못했어요! 으앗!”
* * *
병실로 들어간 성진은 미란 어머님의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 곧바로 미란 어머님의 상태를 스캔한성진은 생각보다 좋은 경과에 감탄했다.
‘이 정도면 금방 나으시겠는데?
그렇습니다, 마스터. 나노 로봇의 신경 재건과 근조직 치료에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그럼 곧 다 낫는다고 봐도 상관없겠구나.’
그렇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완쾌가 가능하리라 판단됩니다.
인공지능 팔찌의 확답에 성진은 안심했다.
혹시라도 일시적인 호전만 있을 뿐, 완쾌가 힘들다면 미란이나 주변 사람들이 낙담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빠른 기간 내에 완쾌가 가능하다니 한시름 놔도 될 듯했다.
“정말 잘됐습니다, 미란 씨.”
“예. 고마워요 성진 씨. 번번이 이렇게 찾아와주고.”
“고맙긴요. 어머님이 영식이한테도 각별한 분이라고 들었어요. 영식이한테 소중한 인연인 만큼 저한테도 소중한 분이에요. 그렇지? 영식아.”
“예? 예. 그럼요, 형.”
성진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영식을 보니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
‘흠…….’
성진은 그런 영식의 속마음을 빤히 알아차렸다.
‘어머니 생각을 하는 건가.’
굳이 사념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미란의 어머니가 나은 것은 무조건 축하할 일이지만, 영식에게는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성진은 미란에게 웃으며 말했다.
“미란 씨. 이만 밤이 늦어서요.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네. 그래요 성진 씨. 영식이 너도 와줘서 고마워.”
미란이 생긋 웃으며 영식에게 말을 건넸다.
미란의 표정에도 어딘가 미안한 빛이 감도는 것을 보니 그녀도 영식의 마음을 어느 정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에이, 고맙기는 뭘.”
콧잔등을 긁으면서 얼버무리듯 말하는 영식도 주변의 분위기가 자신 때문에 서먹해졌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성진은 웃으면서 영식의 등을 떠밀었다.
“자! 우리는 이만 가자. 그럼 미란 씨. 어머님 잘 돌봐드리세요. 나중에 또 봐요.”
“네. 잘 가요 성진 씨. 잘 가, 영식아.”
“예. 그럼.”
성진과 영식은 가볍게 목례하고 병실 문을 나섰다.
병동 복도를 걸어 나와서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도 영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주차장을 가로지를 즈음, 성진은 영식에게 말을 걸었다.
“짜식. 너무 풀 죽지 마라. 내가 미안해지잖아.”
“예? 에이. 형이 왜 미안해요.”
“네 어머니. 내가 찾아드리겠다고 했잖아. 아직 약속 못 지켰으니까 내가 미안하지.”
“에이 아니에요, 형. 형도 바쁘잖아요.”
“아니야. 사실 그동안 크게 신경 못 쓴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네 어머니를 찾아볼 생각이야.”
영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떨궜다.
“고마워요 형.”
“짜식. 고개 들어, 임마.”
성진이 영식의 어깨를 탁 쳤다.
“내가 말했지? 내가 약속한 건 확실하다. 이게 다 네 빚이야, 임마. 빚쟁이 앞에 두고 지금 너무 마음 놓는 거 아니냐?”
“헤헷. 알았어요, 형. 제가 그 빚 확실하게 갚을게요.”
짐짓 표정에 활기를 다시 띄운 영식에게 성진이 씨익 웃어보였다.
“그래. 그거야. 절대 풀 죽고 기죽지 마라. 내 앞에서 쓸데없이 미안해하지도 말고.”
“예, 형.”
영식의 대답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집에나 가자.”
리모컨을 들어 시동을 건 성진의 차에 불이 들어왔다.
기분 좋게 차 문을 연 성진은 영식을 태우고서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 * *
몇 주가 지나고 다시 미란에게서 연락이 왔다.
“거동하는 데도 불편이 없으시고, 완전히 다 나으신 거 같대요.”
“그런가요? 정말 잘 됐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하시면서 매일 살피러 오세요. 정말 요즘은 꿈만 같아요.”
미란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오랫동안 앓은 채 병세가 나빠지기만 하던 어머니의 쾌유가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성진 또한 미란의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도 정말 기쁘네요.”
“네. 그러고 보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묘한데요?”
“예? 뭐가요?”
“그냥 어쩐지, 성진 씨가 왔다 간 날부터 어머니가 조금씩 좋아지신 거 같거든요.”
“아! 하핫. 그런가요? 그렇다면 이거 저도 기쁜데요.”
성진은 능청스럽게 받아 넘기면서 적당한 축하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어머님이 이제 다 나으신 모양이야.”
축하드립니다, 마스터.
“축하는. 네가 다 해준 건데. 가만. 그러고 보니 이 나노 로봇의 치료 능력과 비슷한 약을 만들 수는 없을까?”
성진의 뇌리에 인공지능 팔찌의 치료 능력을 바탕으로 한 약품 개발이 떠올랐다.
하지만 인공지능 팔찌의 대답은 조심스러웠다.
마스터. 의료 기술을 제공해드리는 일은 복잡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복잡한 조건?”
그렇습니다, 마스터. 지나치게 수명을 늘려주는 식의 의료 기술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제공해드릴 수 없습니다.
인간욕망의 궁극. 그 끝에는 불로불사가 있다.
인공지능 팔찌는 여러 인류 문화를 접하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 이미 알아둔 상태였다.
성진이 인류의 수명 자체를 비약적으로 늘리는 식의 기술을 탐한다면 절대 제공해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언급한 것이다.
“그래? 음. 뭐 난 그런 기술까지는 바라지 않는데…….”
성진의 대답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가벼웠다.
정말이십니까?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의 반문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굳이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설사 그렇다 해도 오래 사는 것보다는 후회 없이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성진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히 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뿐 불로불사라면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런 기술이 세상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됐고, 안 된다는 기술을 가지고 떼를 쓰는 것은 성진의 성격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억지를 피우는 대신 성진은 다른 부탁을 했다.
“대신 다른 의료 기술은 제공해줄 수 없을까?
알겠습니다, 마스터. 장애나 현재 인류가 앓는 여러 난치성 질환을 치료하는 데에 필요한 의료 기술은 제공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긍정적인 대답을 얻은 성진은 화색이 되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이번에 미란의 어머니를 치료하면서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었다.
모두에게 소중한 한 번뿐인 일생이다.
장애나 갑작스런 병환으로 자신은 물론 주변인까지 고생하게 되는 난치성 질환 환자들이나 장애인들을 치료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면 꽤나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좋아. 그건 나중에 천천히 물어볼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게 있으니까. 방사능 정화 장비를 구현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산출해봤어?”
예, 마스터. 최근의 조사 자료들까지 합산해서 집중적으로 예산을 추정해봤습니다.
인공지능 팔찌가 늘어놓는 보고서들을 살펴본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정도면 됐어.”
구체적인 계획은 인공지능 팔찌가 대략적인 뼈대나마 잡아놓았다.
그렇다면 이제 성진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계획을 최대한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실행하는 일이었다.
‘기술을 공개할 최적의 타이밍을 준비해야겠지.’
성진은 두 눈을 빛내며 앞으로의 일을 구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