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회: 4권 - 003. 어머니라는 존재 -->
“아, 그래요? 솜씨가 좋으시네요.”
“네에…….”
쑥스러워하던 미란과 이것저것 얘기를 나눈 성진은 분위기를 타서 찾아온 본론을 꺼냈다.
“미란 씨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혹시 제가 문병이라도 갈 수 있을까요?”
“문병이요?”
“예. 폐가 안 된다면요.”
“아…… 글쎄요.”
갑작스런 제안에 미란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성진은 이미 구실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미란 씨. 제가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이 된 건 아시죠?”
“예 신문 기사에 나와 있던걸요.”
미란은 성진의 인터뷰를 담은 기사를 이미 본 상태였다.
다만 성진이 불편할까봐 일부러 내색하지 않는 편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금번에 저희 회사에서 복지 사업을 진행할 겁니다. 어려운 형편의 투병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지원할 생각이에요.”
“아. 그러셨군요.”
미란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기실 어머니의 치료비로 집안 살림이 많이 기운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말이 불쾌하시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성진은 혹시라도 미란의 마음이 다쳤을까 신경이 쓰였다.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드는 오지랖으로 비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른 핑계를 댈 걸 그랬나.’
하지만 다행히 미란은 불쾌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니요. 불쾌하다뇨.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하죠. 그런데 저희보다 더 어려운 분들도 많을 텐데요.”
“예. 차차 알아봐야죠. 하지만 기왕이면 저와 가까운 주변 분들부터 돕고 싶은 게 개인적인 소망입니다.”
성진은 미란을 차근히 설득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미란은 수긍했다.
“고마워요, 성진 씨.”
“아니요. 흔쾌히 받아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참, 병원에 언제 같이 가볼 수 있을까요?”
“아! 병원요. 저도 저녁때 들릴 생각이라서요.”
“그러세요? 그러면 오늘 아예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오늘요?”
“예.”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성진에게는 미룰 이유가 없었다.
영식도 모처럼 미란의 어머니를 볼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나. 같이 가자.”
“음. 그래요, 그럼.”
미란도 동의하자 성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가볼까요?”
* * *
미란의 부모님이 입원한 병원은 서울 근교의 대학병원이었다.
중환자 병동으로 안내한 미란이 병실로 들어서자 나이 든 남성이 돌아봤다.
“아니, 미란아. 여긴 어쩐 일로 왔어.”
“아빠.”
미란의 아버지를 본 성진이 바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으음? 누구신지?”
“친구예요, 아빠.”
미란의 소개에 미란 아버지는 성진은 돌아보며 경계의 눈으로 바라봤다.
“친구?”
딸 가진 아버지가 다 그런 걸까.
벌써부터 성진을 주시하는 미란의 아버지를 보면서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란 씨하고 잘 알고 지내는 친구 사이입니다.”
“으음. 남녀지간에 친구가 어디 있나.”
팔짱을 낀 미란의 아버지는 완고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뒤꼍에 멀찍이 서 있는 영식에게 시선이 갔다.
“아니 저 녀석! 너도 왔어?”
“예에. 그, 그게…….”
평소에 공짜로 밥 먹는다고 구박을 당하던 영식이었다.
화들짝 놀란 영식은 머뭇거렸다.
“인석이 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미란의 아버지는 혀를 차며 말했다.
“어디 가서 밥은 안 굶고 다니냐?”
“예에.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서요.”
영식이 성진을 힐끗 바라보며 웃었다.
미란도 성진을 바라보고 있자 그 눈치를 본 미란 아버지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음. 뭐 사람 구실은 하는 모양이구만.”
그러면서 미란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잘해봐라.”
그 말뜻을 모를 미란이 아닌지라 대번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 참. 아빠!”
“허허. 우리 딸내미가 벌써 이렇게 컸어. 아니, 여보 당신도 들었지?”
미란의 아버지가 옆에 있던 침대를 돌아보며 웃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성은 이것저것 장치를 잔뜩 달아놓은 채 미동조차 없는 모습이었다.
성진이 미란의 어머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그와 동시에 인공지능 팔찌에게 인체 스캔을 지시했다.
‘신체에 어떤 이상이 있는지 봐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곧 인공지능 팔찌가 답을 출력했다.
일부 근육 조직과 척추의 이상이 감지됩니다.
상당한 기능 장애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근육, 척추 장애라고?’
그렇습니다 마스터.
성진은 확인을 위해 미란을 불렀다.
“저. 미란 씨 잠시만 밖에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예. 잠깐 나갔다 올게 아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버님.”
“음. 그래요.”
미란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을 나온 성진이 미란에게 물었다.
“외람되지만 어머님 병명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예. 근위축증이래요. 몇 년 전부터 갑자기 앓게 되셨어요.”
“예. 그러셨군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분석이 정확했구나.’
성진은 미란을 보며 말했다.
“치료비 지원은 곧 진행하겠습니다. 원무과에 말해서 저희 회사의 복지사업 일환으로 지원하는 걸로 할게요.”
“네에. 고마워요, 성진 씨.”
미란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별 말씀을요. 혹시라도 이런 걸로 부담 느끼지 말아주세요.”
“부담은 당연히 가져야죠. 엄연히 도움을 받은 건데요.”
“아닙니다. 이건 영식이 빚을 갚은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네에.”
미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미란에게 마주 웃어 보이면서 성진은 어떻게 미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노 로봇을 통해 변성된 세포조직을 회복시키고 우선적으로는 신경 전달체계를 먼저 복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마스터. 다만 다량의 나노 로봇이 필요하기 때문에 치료 기간 동안 나노 로봇의 가용량이 줄어듭니다.
‘상관없어.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러자면 이제는 나노 로봇을 몸속에 주입하는 것이 문제였다.
성진은 다소 번거롭지만 미란 어머님이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영식과 함께 병원 안에서 미란과 담소를 나눈 지 한참 후.
저녁 식사가 배달되는 때가 되자 성진은 잽싸게 병동 앞으로 가서 식판을 받아왔다.
그릇 뚜껑을 열자 죽이 놓여 있었다.
‘옳지.’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 죽 속에 많은 숫자의 나노 로봇을 전부 투여했다.
다시 병실로 식판을 들고 가자 미란이 미안해했다.
“어머 성진 씨. 밥까지 배달 안하셔도 되는데.”
“에이 아닙니다.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닌걸요.”
“정말 고마워요 성진 씨.”
“어머님 잘 돌봐주시구요, 무사히 완쾌되길 빌게요.”
“네. 참 성진 씨 그 다알리아. 꽃말이 뭔지 아세요?”
“꽃말이요?”
“붉은색 다알리아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돼서 기쁩니다’예요. 전 그래서 성진 씨가 그거 들고 왔을 때 살짝 떨렸거든요.”
약간 섭섭해하는 미란의 표정을 읽은 성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꽃말까지 있는지는 몰랐네요. 미안해요, 미란 씨.”
미란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니에요. 부담을 주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네. 또 봐요, 성진 씨.”
살포시 눈웃음을 지은 미란은 종종걸음으로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영식이 성진을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형…….”
“후우. 안다 알어. 그런데 지금 내가 누구와 연애할 생각은 없거든. 영식아, 당분간 좀 이해해줘.”
“예, 형.”
영식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의 마음을 자신이 강요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어쨌든 어머님을 낫게 해드릴 테니 이걸로 일단 마음의 빚은 해결한 셈이지.’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에게 나노 로봇이 인체에 들어가는 즉시 가동되도록 명령했다.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스터.
‘얼마나 걸리겠어?’
최대 10일을 기점으로 서서히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래. 알겠어.’
앞으로 며칠 뒤면 미란의 어머니는 차도를 보이리라.
성진은 원무과에 들려서 병원비를 회사 이름으로 대납하기로 협의한 뒤 병원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