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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81화 (81/185)
  • <-- 81 회: 3권 - 새로운 포부 -->

    *   *   *

    차창 밖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여자.

    다리가 드러나는 약간 짧은 푸른색 코트차림을 한 미란이 약속장소 앞에 서 있었다.

    길가에 차를 주차시킨 성진이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외쳤다.

    “미란 씨!”

    성진의 목소리를 들은 미란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성진을 돌아봤다.

    “성진 씨!”

    앵두빛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미란 씨. 많이 추웠죠?”

    “아니요. 얼마 안 기다렸어요.”

    미란은 상기된 입술 끝을 말아올리며 웃었다.

    아직은 쌀쌀한 초봄.

    미리 약속 시간보다 일찌감치 나왔는데도 벌써 미란은 한참 더 일찍 나온 모양이었다.

    “일단 타요.”

    추위가 걱정된 성진은 조수석 차문을 열어서 미란을 차에 태웠다.

    다시 차에 올라탄 성진이 미란을 보며 말했다.

    “뭐 먹고 싶어요?”

    “음……. 글쎄요.”

    살짝 웃는 미란을 보고 성진이 말했다.

    “일단 좀 따뜻한 걸 먹어야 할 거 같은데……. 혹시 생각나는 거 없으시면 제가 정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요 성진 씨.”

    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출발할게요.”

    마주 보며 웃은 성진은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   *   *

    식사를 마치고 난 성진은 미란과 함께 한강변으로 갔다.

    마침 한강변에는 야경 행사 중인지라 분수 쇼가 펼쳐지는 중이었다.

    물줄기에 산란되는 빛무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감탄에 젖어 있을 무렵.

    강변에 흐르는 낭만의 분위기를 두 사람 또한 느끼고 있었다.

    “저어. 성진 씨.”

    “예. 미란 씨.”

    미란이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들은 성진은 머릿속으로 강한 직감이 들었다.

    ‘설마…… 또인가.’

    다음 순간 미란이 한 말은 성진의 예상과 마찬가지였다.

    “저. 성진 씨를 좋아해요.”

    “미란 씨…….”

    성진은 그저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완곡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어……. 미란 씨.”

    “알아요 성진 씨 아직, 연애에는 뜻이 없죠?”

    미란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예. 사실 그렇습니다.”

    성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에 미란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기다릴게요.”

    “미란 씨…….”

    성진이 재차 말하려는 것을 아랑곳 않고 미란이 소리를 질렀다.

    “아아~ 야경 좋다. 성진 씨도 좋죠?”

    “예? 아, 예…….”

    미란의 눈가에 살짝 맺힌 물방울을 본 성진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부신 야경이 펼쳐지는 한강변에서 성진은 여난의 징조를 느끼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   *   *

    인간은 영웅을 바란다.

    힘들고 험난한 시대일수록 더욱 그렇다.

    창칼이 번뜩이고 피가 튀는 전쟁이 반복되던 시대에서는 뛰어난 군인이 영웅이었지만 현대는 다르다.

    언론과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영웅으로 등극하는 데는 의외로 아주 작은 계기만 있어도 충분하다.

    더욱이, 권력자의 비리를 밝힌 인물이라면 영웅 대접을 받기에는 차고 넘쳤다.

    “윤진만 변호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수많은 청중이 모인 방송 스튜디오.

    진행자의 등장 멘트에 방청객들이 박수로 맞이했다.

    그 앞으로 나온 중년의 신사.

    “안녕하십니까 윤진만입니다.”

    더욱 더 거세진 박수 소리와 함께 사회자가 마이크를 건넸다.

    약속된 멘트와 함께 윤진만 변호사는 자연스럽게 방송에 녹아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방청객 사이에서 바라보는 성진은 말없이 응원의 눈길을 보냈다.

    맥박, 호흡, 모두 안정적입니다.

    별 다른 심리적 동요는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인공지능 팔찌가 윤진만 변호사의 상태를 체크했다.

    ‘알았어. 계속 지켜봐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강력한 정치가였던 최진곤 의원을 한 방에 날린 남자.

    윤진만 변호사는 대중이 원하는 스토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강직한 수사 강행 후에 석연찮은 퇴직을 당한 평검사.

    비리 자료로 권력자에게 통쾌한 일격을 날린 것 등이 그랬다.

    윤진만 변호사의 말에 집중하는 청중들의 모습은 흡사 새로운 우상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분야든 스타는 있기 마련이지.’

    연예계든, 정치든 사람들의 인지도와 지지를 바탕으로 업을 이어나가는 세계.

    윤진만 변호사가 가진 내력은 대중들에게 새로운 정치 스타로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성진의 계산은 거기까지 닿아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머쓱해하는 윤진만 변호사가 성진에게 다가왔다.

    “어떠십니까.”

    성진의 말에 윤진만 변호사가 살짝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쁘지 않네요. 사실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자신의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반응하고, 때로 깊은 동감까지 보여준 경우는 아마 드물 것이다.

    윤진만 변호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대중을 인식하면서 상당한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일을 더욱 더 많이 겪으실 겁니다.”

    성진은 그 점을 바탕으로 윤진만 변호사의 야심을 부채질할 생각이었다.

    그런 성진을 보면서 윤진만 변호사가 물었다.

    “제가 정의를 믿기 때문에 저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기겠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혹시 나중에 변하지는 않을까요?”

    윤진만 변호사의 물음에 성진은 빙그레 웃었다.

    “윤 변호사님의 고민은 저도 겪었던 문제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천성이라는 건 그리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나중에 어려워졌을 때 유혹을 만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작은 어려움에 흔들릴 사람이었다면 제가 윤 변호사님을 선택했겠습니까?”

    성진은 강한 확신으로 윤진만 변호사의 고민을 붙잡았다.

    “예. 알겠습니다.”

    윤진만 변호사와 성진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본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먹거리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산 식품을 원산지를 속여 판매한 일당들이 적발되었습니다.

    모처럼 부모님과 함께 식사 중인 자리.

    일본 방사능 관련 뉴스가 나오자 아버지가 성진에게 물으셨다.

    “성진아. 저게 저거 아주 심각한 거냐?”

    “글쎄요. 우리나라는 일단 일본 방사능에는 영향이 없다고 하니까요.”

    “그래? 그럼 뭐 안심해도 되는 건가.”

    아버지는 일본 방사능 뉴스가 적잖이 신경 쓰이는 눈치셨다.

    “혹시 식당 재료 중에 일본산이 섞여 들어갈지 모르니 조심해야겠다. 조미료 같은 건 일본 산 재료도 많다던데.”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아버지.”

    그렇게 방사능 관련 화제가 식사자리에 올라가고 난 뒤 성진은 자신의 방에서 방사능 관련 자료를 검색했다.

    “이거.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한 모양인데.”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일본의 경제적 타격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일본 쌀 생산량 1위를 차지하는 지역이 당장 방사능이 퍼진 후쿠시마였다.

    그 외에 관련 지역을 봉쇄하면서 사실상 국토를 손상당하고, 발전소를 포기하면서 전력 부족량도 급상승하는 등 사실상 이중삼중고를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

    마스터. 방사능 문제에 대해 걱정하시는 겁니까?

    인공지능 팔찌의 물음이었다.

    “글쎄. 뭐 당장 이웃나라 일이기도 하고. 일단 지리적으로 가까우니까 우리나라도 걱정이 되기는 하네.”

    마스터. 저에게 방사능 제거 관련 기술이 입력되어 있습니다.

    “응?”

    성진은 깜짝 놀랐다.

    “방사능 제거 기술이라니? 그런 기술은 들어본 적이…….”

    없다.

    지구상에 방사능 제거 관련 기술이 있을 리가 없다.

    세상 어느 누구도 방사능을 제거할 수 있다고 떠드는 인간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순간 성진은 뒷말을 삼켰다.

    그 말을 한 인공지능 팔찌는 지구 문명의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혹시 너희 문명의 기술인가?”

    성진의 짐작을 눈치챈 인공지능 팔찌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마스터. 관련 조항을 즉시 검토한 결과, 방사능 제거기술은 제공 가능 기술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공 가능 기술이라고?”

    그렇습니다 마스터.

    대파괴, 대량 살상을 목적으로 한 전쟁용 기술

    문화적, 윤리적 혼란을 야기하는 기술

    이상 두가지 조건에 들어가는 기술은 제공이 불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인류의 문명을 위협할만한 기술은 제공해줄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보다 성진은 방사능 제거기술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말이 더 놀라웠다.

    “방사능 제거 기술을 제공해준다면 그건 지금 문명 수준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마스터.

    현재 핵심적인 기술이 확보된다면, 현재 지구 인류의 기술로도 기술 실현에 필요한 여건을 구비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는 인공지능 팔찌의 말에 성진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방사능을 제거한다니…….’

    성진은 가슴 한 구석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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