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회: 3권 - 새로운 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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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성진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영식의 공부를 돕는 일이었다.
비록 기초가 전혀 없다시피 해서 공부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영식은 꾸준히 성실하게 진도를 따라오는 편이었다.
“인수분해는 이제 잘하네. 이제 공부한 성과가 나타나는데?”
성진의 칭찬에 영식이 히히 웃었다.
“헤헷. 형이 잘 가르쳐줘서 그렇죠, 뭐.”
“좋아. 이 정도면 4월 시험 합격하는 데는 별 문제 없겠다.”
“어? 진짜요?”
눈을 빛내는 영식을 보고 성진은 씨익 웃었다.
“대신 이제는 고졸 검정고시도 준비해야 돼.”
“예?”
깜짝 놀라는 영식에게 성진은 책을 내밀었다.
“자. 고졸 검정고시 문제집이니까 이제부터 이거 보자.”
“허어어…….”
영식은 보자마자 기가 질린 눈치였다.
성진은 웃으며 말했다.
“영식아. 4월에 중졸 검정고시 합격하면, 바로 8월에 있는 고졸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
“형.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영식은 공부량이 느는 게 마냥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영식아. 너 지금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거 아니냐?”
성진의 말에 영식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 찾아야 하잖아. 어머니 찾으면, 네가 고졸 학력도 못 딴 모습 보여드리면 좋아하실까?”
“아…….”
영식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말씀이 맞네요. 제가 생각을 잘못 했어요.”
“그래. 지금 충분히 잘해주고 있으니까 계속 노력하자. 알았지?”
“예.”
영식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면 새삼 성진이 자신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영식은 속이 뜨끔했다.
친형제도 아닌 성진에게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빨리 도움이 못 될망정 다소 투정을 부렸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형. 제가 폐만 끼치고 참.”
“폐라니. 그런 생각 하지 마라.”
성진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제 일을 시작한 게 정리되면, 올 해 안에 빨리 네 어머니를 찾을 수 있도록 해 볼 생각이야.”
“감사합니다. 형님.”
영식이 고개를 숙였다.
“됐다니까. 대신 너도 여유가 될 때 내 일을 도우면 돼.”
다른 사람들은 엄연히 거래관계다.
성진을 믿고 따르던 핑크레터 팀원들도, 결국 성진이 보여주는 기회와 자신들에게 주어질 대가에 매료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식과의 관계는 달랐다.
훗날 성진이 나중에 개인적으로 완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 그 역할을 영식이 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건 천천히 보도록 하자.”
고졸 검정고시 책을 내려놓은 성진을 보고 영식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짜식. 속 다 보인다.”
그런 영식의 속마음을 읽은 성진은 혀를 찼다.
“이히히.”
머리를 긁적거리는 영식을 가볍게 쥐어박은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집어 들었다.
소파에 파묻혀서 느긋하게 책을 보는 성진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겉보기에는 독서에만 열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공지능 팔찌로부터 실시간으로 정보를 제공받고 있었다.
‘음. 광물 시장에 수요가 급증이라…….’
성진은 최신의 경제 뉴스나 분석 보고서를 수시로 전달받았다.
‘그럼 광물 펀드에 대한 투자 건은 재조정하자.’
알겠습니다, 마스터.
실시간으로 요동치는 세계 경제의 시세나 흐름을 성진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늘 알아볼 수 있었다.
기실 인공지능 팔찌가 웬만한 사항이나 긴급한 이변에 대해서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성진의 지침이 미리 내려져 있었지만 적어도 깨어 있을 때에는 성진이 직접 정보들을 챙겼다.
스스로 정보를 판별하고 분석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좋아. 그건 그렇게 하고…….’
그 와중에도 책의 내용을 동시에 이해하는 성진의 두뇌는 이미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이른바 ‘멀티 태스킹’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책장을 꾸준히 넘겨가면서 인공지능 팔찌로부터 동시에 정보를 탐색하던 성진은 해외 경제 소식 등을 접고 국내 언론사 미디어를 훑었다.
“어? 이게 벌써 떴네.”
불과 어제 정혜주가 따 간 성진의 인터뷰 기사였다.
기사를 읽고 내려간 아래 댓글 반응은 부러움 반, 질투 반이었다.
개중에는 모욕적인 악플까지 서슴치 않는 사람들도 있어서 눈살이 찌뿌러졌다.
“쯧.”
하지만 기사가 떴기 때문인지 성진의 이름과 플루토 자산운용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비록 다른 정치권 화제나 연예인 가십거리에 가려져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23살의 대형 투자사 사장이라는 점을 블로그에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시 언론이 홍보 효과는 좋네.’
지나친 주목은 애써 피해왔지만 어차피 세상에 성진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는 성진 자신이 전면에 직접 나서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렇다면 언론에 노출되는 것쯤은 오히려 즐기는 게 낫다.
‘인지도라는 건 곧 힘이기도 하다.’
성진이 좋은 이미지를 사회에 구축해 나간다면 그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힘이기도 했다.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아니던가.
기왕 노출이 된 상황.
앞으로는 언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나저나 이거 보시면 울 아부지 어머니성진 씨서 좋아하시겠는데.”
아들의 모습이 신문기사에 올려진 것을 보면 부모님들의 성경상 함지박만하게 웃으실 게 눈에 선했다.
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다른 정보들을 훑어봤다.
* * *
주말 아침.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성진은 생각지도 못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성진 씨?
“미란 씨?”
네. 저에요. 성진 씨.
“예 미란 씨. 무슨 일이에요?”
에이.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하핫. 그런 건 아니구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미란의 목소리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성진 씨. 지난번에 저한테 밥 한 끼 제대로 대접하겠다고 한 거 기억나요?
“예? 아…….”
성진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참. 그랬죠……. 이거 제가 큰 실례 했는데요.”
호홋. 이제야 기억이 났나 보네요.
“아. 이거 참. 정말 미안합니다.”
최근의 큰 일들이 있어서 미란과의 식사 약속을 어느 순간 잊게 되었다.
아무리 강화된 두뇌라고 해도 의식에서 멀어지면 곧잘 연상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말하면 구차한 변명밖에 안 되는 법.
성진은 깨끗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정말 제 실수네요. 이거 다시 한번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시지 않을래요?”
성진의 말에 미란이 살짝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말이 들려왔다.
좋아요. 그러면 오늘은 어때요?
“오늘이요?”
성진의 반문에 미란이 재빨리 말을 붙였다.
농담이에요. 갑자기 약속을 잡으면 성진 씨가 곤란하잖아요? 약속이 있을 텐데…….
“아니요. 그런 약속 없습니다.”
성진은 내친김에 잘 됐다 싶었다.
“오늘 가능하시겠어요? 제가 좋은 데로 모실게요.”
그래요?
잠시 말이 없던 미란이 재차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언제 만날까요?
“전 어느 때든 상관없습니다. 미란 씨가 편하신 시간으로 잡을게요.”
고마워요 성진 씨. 그러면 저녁때 만날까요?
“저녁이요?”
네. 일곱 시쯤이요.
“예. 그렇게 하죠.”
시간, 장소를 약속한 성진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 옆에서 고개를 기웃거리던 영식이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헤. 혹시 미란이 누나에요 형?”
성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 들어서 알고 있잖아. 미란씨한테서 온 전화 맞아.”
“오늘 누나한테 밥 사시려구요? 우와아. 부럽다.”
영식이 너스레를 떨었다.
“부럽기는 뭐가 부러워?”
“에헤. 데이트잖아요 데이트.”
“야 데이트는 무슨…….”
말을 하던 성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보니 데이트가 맞잖아?’
미란은 직접 고백만 안했을 뿐.
성진에게 늘 호감을 보여 왔다.
특히 심상을 파악하는 감각이 발달한 현재, 성진은 미란의 마음이 이성적인 호감이라는 것쯤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음…….”
입을 다문 성진을 보고 영식이 미소를 지었다.
“형. 미란이 누나 괜찮은 여자에요.”
은근한 어조로 말하는 영식을 보고 성진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쓸데없는 소리 마라.”
“예에…….”
영식은 입을 다물면서도 뭐라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씰룩였다.
영식의 눈치가 어떤지는 알지만 성진은 모른 체했다.
지금은 뭐라 말할 만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흠흠.”
태연한 척 한 성진은 외출복을 고르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