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회: 3권 - 새로운 포부 -->
혹독한 겨울바람이 한결 수그러들었다.
이제 슬슬 훈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씩 얇아져가는 초봄.
그와 동시에 회사의 입장에서는 가장 바빠지는 시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새로운 해를 시작함과 동시에, 앞으로 한 해 장사거리를 찾아 기획하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진이 운영하는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사장인 성진 본인은 별다른 기획 지침을 내리지 않았지만 아랫사람들 입장에서는 ‘말 안하니 알아서 잘 하라’는 뜻으로 알고 열과 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헛. 생각보다 많은데?”
전자 결재 시스템으로 올라온 각 부서의 기획안들은 상당한 분량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가볍게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서류의 핵심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공지능 팔찌가 각 서류별로 핵심 내용을 분석하고 중요한 항목에 별첨표시를 해놓아 시야 한 구석에 띄워놓았다.
“음. 이건 쓸만한 내용이군.”
각 부서별로 올린 기획서 내용을 점검하던 성진에게는 그 사이에도 시야 한 켠에 다른 정보들이 출력되었다.
회사의 주요 투자처 상황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데이터들을 인공지능 팔찌가 실시간으로 출력해주고 있었다.
“좋아. 이건 승인하고...”
몇 가지 기획서를 점검하는 사이 어느새 업무 시간이 끝이 났다.
성진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 시간이구나.”
사무실에서 나오는 성진을 보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젊은 여직원들이 밝게 웃으며 인사해왔다.
“어머 사장님. 퇴근하세요?”
“예.”
여직원들의 표정은 상당히 밝아 보였다.
성진은 회사 내의 야근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야근을 할 정도의 업무량을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직원들이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해야 효율적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방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다 둘째치고, 일을 할 때 즐거워야 살 맛이 나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이 힘든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잦은 야근과 갖가지 고충으로 병을 달고 살면서도 말이다.
결국 사회가 그런 것을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진에게 회사는 어차피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기 위한 초석일 뿐.
직원들을 쥐어짜서라도 이윤을 남길 생각은 없었다.
되도록 직원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업무에 임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예. 사장님도 안녕히 들어가세요.”
가볍게 인사한 성진이 뒤돌아서서 걸어가자 뒤에서 여직원들의 소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쩜~ 진짜 젠틀하다.’
‘그러게. 역시 젊고 능력 있고. 꺄으~ 완벽해.’
‘아앙 완전 내 이상형~’
여직원들의 은밀한 대화였지만 기본적인 청력이 강화된 성진에게는 고스란히 다 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핫.’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니 기분이 좋아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성진은 다시 냉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갈무리했다.
아직 성진에게는 오늘 마저 들러야 할 곳이 남아 있었다.
* * *
윤진만 변호사가 새로 개업한 변호사 사무실.
미리 와 있던 핑크레터 팀원들이 간단한 다과를 나누는 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성진을 보고 윤진만 변호사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아! 오셨습니까 보스.”
“아이 보스라뇨. 이제 그런 호칭은 그만두셔도 됩니다.”
성진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핑크 레터 팀은 현재 당분간 해체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입에 붙은 탓인지 팀원들은 성진에게 보스 칭호를 항상 붙였다.
“아닙니다. 저희들도 보스라는 호칭이 편합니다.”
팀원들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은 그들을 마주봤다.
이들은 모두 성진에게 엄청난 기회를 얻어 구함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서 성진은 신뢰를 읽었다.
“좋습니다.”
성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 자리에 다들 모이신 여러분. 여러분들과 함께하면서 저는 훨씬 더 큰 세상으로 여러분들을 데려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성진의 말이 이어지면서 팀원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성진이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잡고 말할 때는 결코 가벼운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나이 어린 상사였지만 그만큼 이들에게 성진은 진중한 성격으로 비쳤다.
“그래서 저는, 윤진만 변호사님께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성진은 윤진만 변호사에게 눈짓을 줬다.
고개를 끄덕인 윤진만 변호사는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윤진만 변호사님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이요?”
전진수와 박윤호는 대통령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각오는 했지만 이건 너무 덩치가 큰 발언이 아닌가.
“보스. 킹 메이커가 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박윤호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최근의 최진곤 의원이 죄를 짓고도 한참이나 발뺌을 하며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 나라는 뭔가가 잘못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이 나라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과 실제 능력은 별개입니다. 보스께서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십니까?”
냉정한 박윤호의 말에 성진은 씨익 웃었다.
짐짓 냉정한 척하지만 박윤호의 눈은 기대를 담고 있었다.
지금껏 헛된 소리는 뱉은 적이 없는 성진이기에 진정 그 말에 힘을 실어낼 거라는 기대.
성진은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지금 회사의 총 자산 규모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성진의 물음에 다른 팀원들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들도 회사의 간부였지만 날로 커져가는 회사의 총 자산 규모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이제 막 일조원을 돌파했습니다.”
“일조원이요?”
경악한 전진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회사가 생겨난 지 불과 반년이 채 되지 않는다.
처음 시작 당시의 규모는 그가 알기로 약 일천억원 규모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벌서 10배에 달하는 성장을 해낸 것이다.
“이런 성공이 절대 우연이리라 생각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 성진의 말에 팀원들이 숨을 죽였다.
성진이 허언을 했을 리는 없다.
이런 자리에서 허언을 한다면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총 자산은 그들도 간부인만큼 차후 정산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드러난다.
성진의 말을 통해 직접 압도적인 실재의 성과가 드러나니 그 말에 저절로 무게가 실렸다.
“제가 압도적인 정보력을 가졌다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회사의 성장은 지금부터입니다. 앞으로 저는 단순히 이 투자사뿐만 아니라 세계를 움직일만한 기업을 만들어 낼 겁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기득권자들이 설치는 이 나라에서는 결코 쉽지 않겠죠.”
성진은 다시 윤진만 변호사를 돌아봤다.
“저는 윤진만 변호사님께 미래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윤 변호사님께서는 제게 동의를 표하셨습니다.”
성진은 다시 팀원들을 둘러봤다.
이제 분위기는 완전히 성진이 장악한 상태였다.
어차피 성진이 보여주는 능력과 힘에 완전히 매료된 이들이다.
성진이 가고자하는 곳에 이들이 따라가고자 함이 당연했다.
“좋습니다.”
박윤호와 전진수 모두 눈을 맞췄다.
“저희도 성심성의껏, 아니 분골쇄신을 하겠습니다.”
“그러실 것까지야 있나요.”
성진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제! 이 나라의 새로운 판을, 언젠가 우리가 직접 짜게 될 겁니다.”
허무맹랑하게 들릴 만큼 거대한 포부.
허나 그 말을 듣는 팀원 누구도 성진의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
이제껏 엄청난 결과를 일궈 온 어린 보스.
그런 성진이 말한 새로운 선언에 팀원들 모두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