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회: 3권 - 재회 -->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인데요. 사장님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런 큰 자산운용사를 맡게 되신 배경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음. 그런가요?”
“예. 소문에는 플루토 투자신탁의 오너이신 박천중 회장님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말도 있어서요.”
“아! 그래요.”
성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제가 낙하산이라는 소문 말인가요?”
“하핫.”
정곡을 찌르는 성진의 말에 옆에서 조용히 사진을 찍던 남자 기자도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뜬 소문이겠죠. 설마 단순한 낙하산으로 이만한 투자사의 경영자가 되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혜주가 어색해하는 사이 남자 기자가 대신 말을 받았다.
성진은 그런 모습을 보고 이 둘의 관계를 한눈에 파악했다.
‘음. 아무래도 초보 수습기자를 도우러 파견된 모양이군.’
어느 신문사라 해도 초보기자 한명에게만 인터뷰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상대적으로 남자 기자는 베테랑인 모양이었다.
성진은 웃으며 다시 분위기를 맞춰갔다.
“그냥 농담입니다. 사실 박천중 회장님과 저의 인연은…….”
그렇게 한참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고 남자 기자와 정혜주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 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뭘요. 제가 도리어 감사드려야죠. 이것도 결국 저희한테는 홍보 아니겠습니까.”
“아유 아닙니다. 사실 한성진 사장님은 요즘 재계에서 핫한 인물이시거든요. 인터뷰 따려고 다들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랬나요?”
“예. 요즘 플루토 자산운용하면 무섭게 성장중인 잠재력 넘치는 투자사로 이름이 슬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괄목할만한 회사를 이끄는 젊은 경영자! 멋진 그림이죠.”
남자 기자의 칭찬에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겸양을 보인 성진은 슬며시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인데요. 마침 저하고 식사나 같이 하시죠? 혜주씨하고 오랜만에 만났는데요.”
“아! 예.”
정혜주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자 기자는 성진과 정혜주를 번갈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제가 점심에 약속이 잡혀서요. 우리 정혜주 기자는 다행히 약속이 없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렇지 정 기자?”
남자 기자의 눈짓에 정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그럼요. 선배님.”
“음! 그럼 정 기자. 회사에서 보자고. 한성진 사장님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나중에 기회 되면 한 번 더 뵙고 싶네요.”
“아니요. 수고랄 게 있나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예.”
남자 기자는 유쾌한 미소를 지으면서 꾸벅 인사한 뒤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성진이 말했다.
“활달하신 분이네요? 기자분이라 그런가?”
“베테랑이시죠. 경제부에서 올해로 6년째 되시는 분이시거든요”
정혜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성진은 그런 정혜주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인터뷰 내내 봤지만 오랜만에 보는 정혜주의 모습은 아직 어설펐지만 사회인의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 정말 몰랐습니다.”
“저도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성진과 정혜주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얘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까 일단 밥 먹으면서 하죠. 가실까요?”
“예. 성진 씨.”
두 사람은 마주 웃으면서 방을 나왔다.
* * *
“뭐 좋아해요?”
정혜주를 옆자리에 태운 성진은 여의도 중심가로 차를 몰았다.
무슨 메뉴를 먹을 것인지 묻는 성진의 물음에 정혜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뭐든지 잘 먹어요. 성진 씨가 먹고 싶은 걸로 먹을께요.”
“에이. 잘 먹는 걸 물어봤나요? 좋아하는 걸 물어봤죠.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니까 제가 제대로 살게요. 지난번에도 얻어먹었고.”
성진은 모처럼 다시 만난 정혜주에게 한 끼는 정도 제대로 대접할 생각이었다.
오래간만에 다시 만난 인연이라 그간의 일이 궁금하기도 했다.
“음…… 그러면, 혹시 비싼 것도 되요?”
짐짓 걱정스러운 척 표정을 짓는 정혜주를 보고 성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너무 사치스러운 건 안 되지만 웬만한 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저 밥 한 끼 살 돈은 있습니다.”
“음, 좋아요! 그러면 초밥 어때요?”
“초밥이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죠. 그러면…… 맛있는 초밥집이…….”
성진은 재빨리 인공지능 팔찌에게 지시했다.
‘이 근처에 평판 좋은 초밥집 있어?’
- 지금 검색하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가 재빨리 검색한 가게 목록이 눈앞에 출력됐다.
‘음. 괜찮은 곳이야?’
- 가게에 대한 평판이 자주 올라온 곳들입니다. 특히 전문적인 요리 평가자들이 대체적으로 높은 평을 했습니다.
‘음. 인터넷 평가가 꼭 정확한 건 아니던데…….’
지난 번 성진네 가게에 찾아든 파워 블로거 자칭 맛집 컬럼니스트는 돈을 받아먹고 평가를 조작하기도 했다.
그런 안 좋은 기억이 있는지라 성진은 인터넷 평가에 대해 별로 맹신하지 않았다.
- 전문적인 요리 잡지에도 소개된 적이 있으니 믿으셔도 좋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 그래? 알았어. 고마워.’
성진은 즉시 해당 가게 쪽으로 차를 돌렸다.
도착한 곳은 아늑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일식집이었다.
들어간 성진과 혜주가 자리로 안내받아 앉자 메뉴판을 내왔다.
“저희 식당은 참치 회를 전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음? 그래요? 그렇다면 참치 회로 하죠. 혜주 씨는요?”
“예. 저도 참치 회로 할게요.”
“예. 그러면 참치 회 정식으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손님.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웃으며 주문을 받아 나갔다.
분위기가 한적해지자 성진은 혜주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혜주씨가 이렇게 벌써 기자가 돼서 나타날 줄은 몰랐네요.”
성진의 말에 혜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성진에게 반문했다.
“예에? 성진 씨가 그런 말 하실 입장은 아니죠. 저는 인터뷰 신청하면서도 정말 제가 아는 한성진 씨가 맞을까 불안불안했던 걸요?”
“불안이요? 왜요?”
“그야 당연한 거죠. 불과 얼마 전까지 같은 학생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대형 증권사의 투자 계열사 사장이 됐잖아요. 얼마나 놀랐다구요.”
“하핫. 그랬나요?”
성진은 너스레를 떨면서 혜주의 말을 받았다.
혜주도 그런 성진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렇게 만나 보게 되어서 정말 좋네요.”
“예. 저도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좋습니다. 혜주씨도 원하던 신문기자가 되셨으니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데요.”
“저는…….”
혜주는 말을 멈추고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일단 당당해지고 싶었어요. 사실 저는 주변 여건이 좋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일단은 제가 뭔가 성취를 빨리 얻어내고 싶었어요.”
“음. 예.”
성진은 혜주의 말 속에 뭔가 그늘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흐음. 뭔가 사정이 있나본데.’
인공지능 팔찌의 감정 분석이나 사념 해석 등을 쓰면 간단히 알 수 있겠지만 성진은 적어도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그런 일을 자제했다.
적어도 인간관계 면에서 상대방의 속마음을 읽어버리면 성진 자신의 대인관계가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성진은 응원의 말을 혜주에게 건넸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지금은 잘 해내셨잖아요? 앞으로는 꼭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예. 그럼요. 어려운 신문사 입사 시험도 통과했는데 다른 일을 못해내겠어요?”
“음. 성진 씨…… 그럼, 제가 꼭 통과하고 싶은 시험이 하나 더 있는데요.”
“통과하고 싶은 시험이요?”
“예.”
두 눈을 빛내는 혜주를 본 성진은 말했다.
“응원할게요. 앞으로 뭘 하든지 다 잘 될 거에요.”
“어머, 성진 씨. 책임지지 못할 소린 하는 게 아닌데요?”
장난스럽게 째려보는 혜주를 보고 성진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핫. 뭐 제가 그렇게 거창한 소릴 한 건 아닌데요.”
“아뇨. 다 잘 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성진 씨는 제가 무슨 시험을 합격하고 싶은지 아세요?”
“음. 글쎄요. 뭐 신문사 안에서의 진급시험 같은 건가요?”
“아뇨.”
살짝 고개 숙인 혜주의 양 볼에 조금씩 홍조가 피어났다.
“저기, 그게…….”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한 혜주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양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왜 그러세요?”
“저, 성진 씨!”
순간 결심한 듯한 혜주가 다시 눈을 반짝 빛내며 성진을 바라봤다.
“저. 성진 씨를 좋아해요.”
방금 전까지 망설이던 혜주는 이 말을 하는 순간만은 한 점의 떨림도 없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다만 그 말을 들은 성진은 두 눈을 꿈뻑 일 뿐이었다.
“예? 혜주씨…….”
“저…… 그 날, 사실 경황이 없었어요. 성진 씨가 저를 처음 구해줬던 날이요.”
“아하. 예…….”
혜주가 말하는 날이 어떤 날인지는 뻔했다.
성진이 혜주를 구해줬던 날일 것이다.
“그 때는 마냥 창피하고 부끄러웠어요. 학교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쩌나, 나는 이제 어떻게 하나. 막연히 안 좋은 생각이 자꾸만 났죠.”
“예에…….”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당했던 일이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지 않도록 현장에서 애써준 사람이 있더군요.”
혜주는 성진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사람이 성진 씨라는 걸 알고, 정말 고마웠어요. 그 고마운 마음이 나중에 성진 씨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건 얼마 안 걸렸어요.”
“아……. 예.”
성진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뒷목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런 성진을 보면서 혜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남자를 좋아한 건 성진 씨가 처음이에요. 제 마음은 절대 가볍지 않으니까 혹시 아직 성진 씨 마음에 들어간 사람이 없으면, 저를 받아주시지 않을래요?”
그 말에 성진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혜주씨. 내가 그건 약속해 줄 수가 없네요.”
“아…… 혹시 애인이라도…….”
“아뇨.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내가 연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성진의 완곡한 거절에 혜주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됐어요. 지금 성진 씨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다면.”
“아, 혜주 씨.”
“대학 2학년 마치자마자, 바로 대형 신문사 입사시험 합격해 낸 사람. 저 밖에 없을 걸요? 저 꽤 독한 여자랍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살짝 윙크까지 하며 태연하게 고개를 숙이는 혜주를 보고 성진은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