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회: 3권 - 선공 -->
* * *
우형그룹. 보안감사실.
겉으로는 보안업무와 사내 감사를 담당하는 부서로 알려진 부서.
하지만 그 중 3팀을 책임지는 인물은 다른 팀장들처럼 과장이 아니라 부장급이었다.
신용태 부장은 3중, 4중으로 비밀번호 락을 걸어둔 자신의 pc를 켰다.
그는 다른 보안감사실 내부에서도 전혀 터치를 받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회장 직속으로만 서류를 올리는 특별한 입장이었다.
한참 자료들을 살피던 그는 혀를 찼다.
“하아. 이건 그다지 매력적인 모양새가 아닌데.”
이것저것 올라온 자료들을 살피는 그는 정재계의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회장에게 올리는 정보부서의 책임자였다.
개개인에게 직접 정보를 주고 사기도 하고, 언론지의 작은 기사 하나하나를 일일이 스크랩해서 보고서에 넣는다.
하지만 그의 서류를 매일 받아보는 회장은 언론 기사를 인용하는 자료에 대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이봐! 신문기사 오려 붙일 거면 그 자리에 자네가 왜 있나?
- 이렇게 누구나 다 아는 거 빼고 좀 더 은밀하고 따끈따끈한 걸 빼오란 말이야.
결재 받을 상사가 회장 한 명뿐이지만 그래서 더 힘들다.
우형그룹이 아주 큰 회사가 아닌지라 여기저기 눈치 볼 게 많으니 회장은 정보 담당자인 그를 연일 닦달했다.
“아휴. 내가 무슨 천리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회장의 닦달을 떠올린 그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때 그의 모니터 구석에서 분홍색 편지봉투 아이콘이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헛!”
그는 깜짝 놀라 비밀 폴더에 비밀 번호를 걸어서 파일을 열었다.
“왔구나, 왔어!”
신용태 부장의 표정에 화색이 번졌다.
그가 클릭한 파일 아이콘은 굵은 고딕체로 이렇게 씌여 있었다.
[pink letter. exe]
클릭한 순간 다시 고객 코드를 입력하는 창이 떴다.
코드를 입력하자 곧 무수한 텍스트들이 모니터 한 가득 출력되기 시작했다.
“오옷!”
신용태 부장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비록 상당수는 기존 정보의 재확인이었지만 제법 새로운 정보들이 많았다.
개중 굵직한 정치 이슈들을 확인한 그의 표정은 감탄에서 곧 긴장으로 바뀌었다.
“헛!”
표정이 바뀐 신용태 부장은 잽싸게 전화를 걸었다.
- 네, 회장님 비서실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낭랑한 젊은 여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신용태 부장은 다급히 말했다.
“회장님 계신가? 내가 지금 긴급 보고해야 할 사안이 있네.”
- 예. 계십니다.
“알았어. 내가 곧 올라가지.”
전화를 끊은 신용태 부장은 정신없이 방을 빠져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는 그의 머릿속에 찌르르 위험신호가 울렸다.
‘하필 최진곤 의원이, 이런 시국에 그 작자가 이런 스캔들이 터지면…….’
우형그룹이 최근에 줄을 대고 있는 정치가.
그가 바로 최진곤 의원이었다.
방금 전 핑크레터에서 그와 관련된 중대한 비리사항을 읽은 그는 저절로 목덜미에 땀이 흘러내렸다.
* * *
시작은 매우 희미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처럼, SNS와 인터넷 게시판등에 떠돌기 시작하는 카더라 식의 게시물들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른 이슈들도 많았고 바쁜 세상은 기존의 화제들을 다루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만들 듯, 곧 거대한 흐름이 된 새로운 이슈가 정치권과 정재계를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유력 정치인 대규모 비리 인터넷 폭로.]
[SNS를 떠도는 대형 비리 스캔들. C모 의원에 대한 구체적 정황 제시]
인터넷에 곧 기사가 떠돌기 시작했다.
아직 실명을 언급할만한 수순은 아니었지만 한번 뜨기 시작한 이슈는 쉽게 잠재울 수 없다.
세상은 숨을 죽이고 여의도 정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 * *
“좋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 됐습니다.”
성진은 여러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판이 커지는 만큼 위험도 더 커질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끝까지 함께해주셨으면 합니다.”
부탁하는 성진의 말에 팀원들이 미소를 지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기호지세 아닙니까. 호랑이 등에 올라탔는데 내릴 수는 없지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희 모두는 암묵적인 동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윤진만 변호사도 말을 보탰다.
“개인적으로 이 상황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도 곧 이 상황에 일익을 담당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 팀원들의 뜻을 읽은 성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감사를 표한 성진은 곧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현재 여론의 동향은 최진곤 의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핑크레터의 영향력도 우리의 예상 이상입니다.”
박윤호가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사실 저도 과거 업계에서 일하며 인연을 맺은 언론계 사람들과 접촉했는데 그쪽에서는 오히려 정재계 움직임을 읽고 징후를 포착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곧 최진곤 의원을 법정에 세울 날이 가까워지겠군요.”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인공지능 팔찌의 음성이 울렸다.
- 마스터. 현재 최진곤 의원의 긴급 기자회견이 방송되고 있습니다.
‘그래?’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tv리모컨을 찾았다.
“잠깐 tv좀 볼까요?”
한창 회의중이던 차에 성진이 갑자기 tv를 작동시키려고 하니 다른 팀원들은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화면에서 나오기 시작한 화면에 팀원들은 눈을 크게 떴다.
- 최진곤 의원 긴급 기자 성명
커다란 자막이 화면 아래를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아주 익숙한 젊은 정치가의 얼굴이 보였다.
침통한 표정을 한 그는 단정한 양복을 차려입고 눈가에 촉촉한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최진곤 의원이, 기자 회견을?”
팀원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화면을 지켜봤다.
곧 tv속의 최진곤 의원은 눈물을 삼키면서 애처롭게 말을 시작했다.
- 친애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금번에 저는 저를 향한 근거없는 모략과 모함에 대해 해명하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후 시작된 그의 기자 성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강조하는 내용들이었다.
인터넷과 sns에 떠도는 모든 소문들은 사실이 아니며 자신을 향한 억울한 정치적 모함이라는 것이었다.
- 아울러 늘 소신을 가지고, 국민의 종복으로서 의정활동에 임해온 저를, 도대체 누가, 어떤 세력이 저를 모함한 것인지 저는 끝까지 밝혀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기자 성명을 끝맺음하자 다른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 누가 그런 악의적 소문을 퍼트렸다고 생각하십니까?
- 글쎄요. 제가 정계에서 물러나면 이득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쪽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스스로 잘 생각해봐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럼 이상입니다.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가는 최진곤 의원의 모습은 의연하고 당당했다.
슬픔을 억누르면서 분한 기색을 억누르려는 표정.
tv 화면에 비친 그의 모습은 억울함을 강하게 호소하는 선량한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하아, 이렇게 나오시겠다?’
성진은 쓴 입맛을 다셨다.
최진곤 의원에 대한 비리자료들을 풀어 헤쳤지만 아직 상황은 무르익지 않았다.
곧 차근차근히 단계를 밟아가며 기정사실화 시키는 단계까지 여론을 끌어 올리려 했는데 최진곤은 피해자 행세를 하며 tv 화면에 등장해버렸다.
이 상황을 눈치 챈 것은 성진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앞으로 상황이 우리 뜻대로 풀리진 않겠군요.”
박윤호가 혀를 찼다.
다른 팀원들의 표정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일단은 좀 더 두고 봐야 할 겁니다.”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일러.’
최진곤을 만만히 본 적은 없다.
그는 그 나름대로 혹독한 정치계에서 오래도록 생존해 낸 인물.
이번 상황 역시 그의 계산대로 행동한 결과일 것이다.
‘정 안 되면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성진은 차분한 눈빛으로 최진곤 의원의 긴급 기자 회견을 다루는 아나운서의 뉴스 화면을 지켜보았다.
* * *
최진곤의 기자 회견 이후 상황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최진곤이 속한 정당에서는 악의적인 음모라며 연일 대변과 논설을 쏟아냈고, 그러자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
최진곤의 정당에서 음모론을 들먹이자 그 음모론의 주인공으로 반대 정당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반대 정당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이번 상황에 대해 최진곤 의원은 기자 회견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사에 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 서로를 향해 비난과 비판이 연일 쏟아졌다.
정치권의 강력한 정당들이 서로를 향해 포화를 쏟아내자 언론은 신이 나서 관련 기사들을 주요 화제로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인터넷 여론도, SNS도 문제가 아니었다.
지상파와 메이저 신문사를 비롯한 유력 언론들이 이 사태를 직접 지켜보고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성진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었다.
“이쯤 했으니 곧 때가 익게 될 겁니다 회장님.”
박천중 회장은 성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만. 최진곤 의원의 기자 회견이 터졌을 때에는 상황이 어려워질 줄 알았는데 대체 자네 무슨 수를 쓴 건가?”
“수라뇨. 제가 무슨 그럴 능력이 있겠습니까.”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최진곤의 기자 회견이 나온 처음에는 아예 전혀 다른 수단을 강구했다.
성진이 직접 나서서 최진곤 의원에게 나노 로봇을 주입할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도 문제가 있다.
‘최진곤이 만만한 인간이 아니니까.’
나노 로봇은 직접 세뇌 같은 것을 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식으로 조건 반응을 보이는 건데, 최진곤같이 닳고 닳은 인물이라면 스스로 거짓말이라고 느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진실을 감출 수가 있다.
결국 성진은 다른 방식을 썼다.
“인터넷에 음모론이다, 상대 정당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글을 좀 쓴 건 사실입니다만 설마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죠.”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의 능력으로 인터넷 게시물에 폭풍처럼 게시물들을 올렸다.
여론 몰이를 할 수 있는 타이밍은 충분했다.
그 타이밍에 혜성처럼 등장한 새로운 음모론은 중요한 떡밥이 되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달궜다.
최진곤 의원에 대한 동정심이 생겨나는 부작용은 어쩔 수 없었지만, 기고만장해진 최진곤의 정당에서는 이 때다 싶어 반대쪽 정당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를 편 것이다.
“결국 자네가 거대 정당들을 싸움붙인 셈이로군? 허허허허. 정말 대단하네. 대단해.”
박천중 회장은 껄껄 웃었다.
결과적으로 성진이 한국의 유력한 정치 정당들을 피할 수 없는 공세 속에 빠트린 셈이었다.
물론 정당 내부에도 이런 흐름을 거스르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서로 싸워서는 안 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최진곤이 그랬다.
그로서는 이번 일이 커지게 되면 불리해지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로 막대한 양의 게시물을 줄기차게 올려댔고, 결국 인터넷 여론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느낀 반대 정당에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저희 뜻대로 되었습니다만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한 고비입니다.”
“음. 알고 있네.”
박천중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그 두 번째 계획으로 넘어가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끝을 내야죠.”
성진은 TV화면에 비치는 최진곤 의원의 얼굴을 보며 차갑게 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