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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71화 (71/185)
  • <-- 71 회: 3권 - 월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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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천중 회장은 옆에 서 있는 차영석을 힐끗 노려봤다.

    “이봐, 성진 군. 대체 지금…… 정말 괜찮은 건가?”

    자신을 납치했던 인물이 지금은 기립한 채 경호 임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그러니 박천중 회장의 마음이 쉽게 안심이 될 리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회장님. 당분간 이 사람은 충실히 회장님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진이 눈짓하며 묻자 차영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해야 했다.

    “무, 물론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회장님.”

    그러나 정작 경호 대상인 박천중 회장은 도무지 안심이 되질 않았다.

    “이보게 성진군. 자네가 어떻게 저 사람을 회유한 건진 몰라도 난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구만.”

    박천중 회장이 차영석에게 납치당했을 당시.

    그는 차영석의 의뢰인이 최진곤 의원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밀접한 관계일 거라 말했다.

    최진곤 의원의 강력한 비리 자료를 빌미로 승부수를 던져 결국 차영석은 성진을 만나러 나갔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성진이 무언가 수단을 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만 무력을 동원해 강제로 제압했으리라는 생각은 결코 할 수 없었다.

    “회장님. 이번 사태뿐만 아니라 당분간 지속적으로 위험에 노출되실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이번처럼 원만히 해결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성진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박천중 회장이 무사히 구출된 것은 천운이었다.

    박천중 회장이 제안한 ‘비리 문서’를 언급해서 협상을 유도했지만 차영석은 문서까지 빼앗을 심산이었다.

    그러다 하필 그가 맞닥뜨린 상대는 성진이었다.

    “다행히 제가 사태를 막을 수 있어서 일이 해결됐지만, 앞으로 놈들이 회장님을 순순히 포기하겠습니까?”

    “그래서 자네가 말하는 대책이 바로 이 사람인가?”

    박천중 회장의 눈길이 다시 차영석을 향했다.

    “예. 실력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허허. 실력이야 눈앞에서 경호원들을 때려눕히고 나를 납치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않나…….”

    말끝을 흐리는 박천중 회장은 차영석의 눈치를 살폈다.

    성진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 사람이 회장님이나 저를 배신할 일은 없습니다. 저를 믿으시듯, 이 사람도 믿어 보십시오.”

    “흐음…….”

    박천중 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안 믿을 수가 없군.”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아! 그리고 당신은 나 좀 봅시다.”

    성진은 차영석에게 눈짓하며 방을 빠져 나왔다.

    성진은 복도로 따라 나온 차영석을 멀리 떨어진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난 길게 말하는 성미가 아니야.”

    성진의 말투는 차가웠다.

    차영석은 위험한 남자다.

    강제적인 회유와 금제로 끌어들인 상대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당신이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이상의 대가를 주도록 하지.”

    성진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서 성진이 꺼내 건넨 것은 수표.

    수표 개개의 액수를 확인한 차영석은 눈이 크게 뜨어졌다.

    “이, 일억원정! 이걸 지금 주는 건가?”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채찍을 던졌으니 당근도 줘야지.’

    성진은 차영석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을 안다.

    가족의 생환에 필요한 자금을 회유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그 것을 이렇게 빨리 내놓을 줄은 차영석은 예상치 못했다.

    “나, 나를 뭘 믿고…….”

    생각지도 못한 파격에 차영석은 자신도 모르게 냉막한 표정을 무너트렸다.

    손 안에 들어온 수표는 모두 다섯장.

    5억이라는 파격적인 액수가 갑자기 눈앞에 떨어지자 차영석은 격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이 돈만 가지고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러지? 나를 늘 감시할 수도 없지 않나?”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배신한다면 그 돈은 무용지물이 될 거야. 말했다시피 네 몸속에 심어 넣은 특수 장치로 위치쯤은 늘 파악할 수 있다는 걸 알아둬. 그리고 나를 배신하겠다고 마음먹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성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차영석을 노려봤다.

    “정말 그걸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무게지. 나를 배반한다는 게 얼마나 큰 대가를 필요로 하는지 톡톡히 알게 해주겠다.”

    성진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차영석은 깨달았다.

    방금 전 성진을 공격하려 들었을 때 차영석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제압당하지 않았던가.

    그런 제어장치를 자신의 몸 속에 심어넣었으니 위치추적쯤은 간단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잠깐 맞닥뜨린 성진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살인을 피하려 총기 사용을 자제했다가 오히려 나중에 사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음에도 철저히 무력하게 당하지 않았던가.

    “좋다. 나 역시 당신이 배반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하지.”

    차영석은 성진에게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성진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흠. 이제 됐군.’

    차영석의 마음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성진은 알았다.

    인공지능 팔찌의 대사 스캔과 감정 분석도 차영석이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음을 말해줬다.

    - 혈류랑은 안정적입니다.

    - 맥박 변화 없습니다.

    - 여러 심리적 징후를 차단하는 노력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거짓말을 행할 시의 징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란 거야?’

    - 그렇습니다 마스터.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합니다.

    자신의 눈은 속이더라도 인공지능 팔찌의 눈을 속이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좋아.’

    성진은 일단은 차영석에게 믿음을 베풀 때임을 알았다.

    “가족들이 무사히 생환하길 빌지. 방법은 있나?”

    “돈만 있다면야…….”

    차영석은 가볍게 대꾸했지만 그 방법이 결코 간단할 리가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탈북비용이 많아도 수천만원인데, 그 몇배에 달한다면 단순한 액수 비교만으로도 훨씬 복잡한 사정이 뒤에 깔려 있음이 분명했다.

    ‘그 부분은 내가 직접 신경 써 줄 수는 없지.’

    요즘 들어 성진은 자신이 한층 냉정해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필요와 불필요를 구별하고, 냉정과 흥분을 다스려나가기가 훨씬 더 수월해졌다.

    달리 말하면 성진의 성격에도 변화가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후우. 내 성격도 변한 건가?’

    인공지능 팔찌는 성진 자신의 인격에 어떤 간섭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성진이 갖가지 지식 습득과 육체적, 정신적 지능 강화를 통해 얻어진 변화일 것이다.

    아직은 이 변화가 좋고 나쁜지 판단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 성진은 아무나 무턱대고 자신이 보호하는 울타리로 넣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필요에 있어서는 선악에 구애받는 점도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눈앞의 차영석만 해도 그랬다.

    기억을 뒤지면서 얻어낸 그의 과거에는 그의 말대로 살인만 없을 뿐.

    더러운 범죄에 관여했었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칙을 세우면 그만이다.’

    성격은 변해도 기본적인 절대적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성진은 자신이 믿는 원칙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행운을 빌지.”

    “고맙다.”

    차영석은 성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름은 어떻게 할 거지? 계속 차영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건가?”

    “아니.”

    차영석은 고개를 저었다.

    “본래 청소부라는 별명으로 활동했다.”

    “청소부라…….”

    제법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쓰레기같은 범죄의 소굴속에서 의뢰자들의 요구를 쓰레기처럼 수거해가며 연명하던 차영석의 삶.

    그 이면을 드러내는 듯한 별명이었다.

    “그런 별명은 이제부터 버려. 이름은 아무거나 대충 지어.”

    차영석은 바로 수긍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는 김형석이라고 하지.”

    “미리 생각해 둔 이름인가?”

    “가명이 필요하다는 건 늘 생각했다.”

    “좋군. 김형석. 그리고 내가 말해두겠는데, 나에게 반말을 하는 건 이시간이 마지막이다.”

    성진은 강렬한 눈빛으로 차영석을 쏘아봤다.

    갑자기 밀려오는 성진의 존재감에 차영석은 긴장했다.

    “난 하극상을 절대 용납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차영석 당신은 나한테 힘으로 굴복했어. 내 휘하에 들어온 이상 넌 내가 책임진다. 하지만 너 역시 철저한 예의는 기본이다. 항상 명심해야 할 거야.”

    성진의 말에 차영석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 습니다. 한성진 씨.”

    “나의 다른 팀원들은 나를 보스라고 부른다.  당신도 그렇게 불러.”

    “알겠습니다, 보스.”

    성진은 그 와중에도 차영석의 마음에 반발심이 솟아날 것을 신경 썼다.

    ‘부정적인 마음이 생겼는지 살펴줘.’

    -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는 차영석의 대사 스캔과 동시에 감정적 징후를 면밀히 분석했다.

    - 별다른 부정적 징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 일부 호감이 판단됩니다.

    ‘호감이라고?’

    성진은 의외의 반응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 그렇습니다, 마스터.

    - 마스터에 대한 신뢰 반응이 보입니다.

    ‘신뢰라…….’

    성진은 차영석의 태도변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차영석은 성진이 자신에게 반말 대신 철저한 존대를 요구한 것을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힘 앞에 굴복한 것은 사실이다.

    차영석을 자극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내 휘하에 들어온 이상 넌 내가 책임진다.’

    성진이 자신을 부리고 쓰는 간단한 도구로 여기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수하든, 동료든,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 소모품 취급을 당해도 지금의 차영석으로서는 별 수 없다.

    하지만 성진은 차영석에게 그 이상을 요구했고, 그 이상의 가치를 뒀다.

    아마도 훗날 성진이 차영석에게 요구하는 일은 그만한 위험도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지 지켜보지.’

    성진, 그리고 얼마 전까지 청소부라 불리다 지금은 김형석이라 불리게 된 남자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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