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61화 (61/185)

<-- 61 회: 3권 - 암중모색 -->

한가하게 신문이나 책만 읽는 와중이었다.

사실 증권 정보지를 만드는 조직에 그가 왜 있는지는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을 불러다 놓고, 증권 정보지를 만든다니까 처음에는 좀 당황하셨죠?”

“솔직히 그렇기는 했습니다.”

안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변호사인 자신이 기업 정보에 밝을 리도 없고, 증권가에 떠도는 소문의 지원지인 증권 정보지를 만드는 조직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윤 변호사님께는 언제나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차후에 정말 중요한 일을 맡게 되실 겁니다. 그때 저야말로 정말 잘 부탁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성진을 보고 윤진만 변호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늘 제가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감이 안 잡힙니다.”

“아직은 그러시겠지만 조만간 타이밍이 되면 정말 윤 변호사님다운 일을 하시게 될 겁니다. 제가 정말 제 이름 석자를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성진은 정중하게 재차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계속 기다려 보겠습니다. 일단 저도 보스를 믿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예. 감사합니다.”

성진은 윤진만 변호사를 포섭할 때 곧 자신이 부조리한 세력과 싸우고 있음을 암시했다.

성진은 자신이 앞으로 대적할 조직이 결코 법의 틀에서 자유로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박천중 회장 같은 거물을 노릴 정도라면, 그 이상의 거물들일 것이다.

‘놈들의 정체만 노출되면 그때는 반드시 법의 심판이 필요하다.’

성진은 세상의 정의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의는 좋든 싫든, 이 나라의 법이 세워줄 것이라 여겼다.

“그때가 되면 윤 변호사님께서 크게 활약하실 기회가 올 겁니다.”

“예. 믿겠습니다.”

“그럼 이제 다른 질문하실 게 있으십니까?”

성진의 말에 팀원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저희는 이제 보스를 전적으로 믿고 따를 겁니다.”

“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팀원들 모두 성진을 보며 눈을 빛냈다.

“감사합니다. 저도 여러분들의 믿음에 반드시 보답할 겁니다. 사족입니다만, 여러분들이 저를 배신만 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지금 노고 이상의 보답이 있을 겁니다.”

배신이라는 단어가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었지만 여기 모인 누구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만큼 이들이 다루는 정보의 힘은 막강하다.

핑크 레터를 통해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인 힘의 위력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배신을 하려 들면 누구라도 미리 알 수 있지.’

성진은 이들에게 미리 나노 로봇을 심어놨다.

다른 작용은 없다.

대신 성진을 배반하려는 부정적 생각을 떠올리거나 실행하려 하면 바로 감지되게끔 설계된 나노 로봇들이 두뇌 피질을 떠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감시하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성진은 다소 켕기는 게 있긴 했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성진이 이들의 마음을 끌어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들은 엄연히 급조된 팀원들이다.

아무리 설득에 최선을 다해도, 오래 손발을 맞춰온 사람들만큼의 팀워크나 동질감을 기대할 수는 없다.

더더군다나 핑크 레터를 통해 다루는 정보의 힘과 가치는 상황에 따라 어마어마하다.

갑자기 엉뚱한 짓을 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다 써야지.’

아무리 켕겨도 성진은 미리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아 초래되는 어리석은 일은 원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 팀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건배하죠.”

성진이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다른 팀원들도 성진을 따라 술잔을 들어 올렸다.

“미래를 위하여!”

성진이 건배 구호를 외치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 구호를 외쳤다.

“미래를 위하여!”

맥주가 가득 채워진 술잔이 부딪히면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킨 성진은 다른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자, 앞으로 여러분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예.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   *   *

회식을 마친 성진은 바로 플루토 투자신탁으로 향했다.

박천중 회장은 그간 핑크레터가 슬슬 행사하기 시작하는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징후들을 보고서로 읽고 있던 차였다.

“대단하군. 우리 직원들까지 자네가 만든 핑크 레터에 잔뜩 몸이 달아 있어.”

“하핫, 그 정도입니까?”

“그럼. 현재 이 증권판에서 가장 뜨겁게 다뤄지고 있는 돌발 변수가 바로 자네의 핑크레터야.”

“설마 그렇게까지요. 조금 긴장하는 정도겠죠.”

성진은 겸양을 떨었지만 박천중 회장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잘 알았다.

이미 증권판에서는 핑크 레터가 투자에 앞서 점검해야 할 필수 단계로까지 회자되고 있는 지경이었다.

“원 참. 의뭉스럽게 쓸데없는 겸손은. 하하, 아무튼 핑크레터를 통해서 드러나는 실질적인 영향력이 앞으로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 같구만.”

“맞습니다. 앞으로 놈들이 어떤 방식으로 회장님을 노릴지는 모르겠지만, 몸통만 드러나서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하면 저희가 확고하게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박천중 회장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보면 정말 안심이 되는구만. 젊은 패기에, 치밀한 능력. 후후. 내가 천군만마를 얻었구만.”

늘상 성진을 칭찬하던 박천중 회장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립서비스가 아니다.

실제로 성진이 아니었다면 박천중 회장은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 불리한 싸움을 견디며 힘을 잃을 것을 각오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핫. 왜 또 비행기를 띄우십니까. 아무튼 오늘 찾아온 이유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중요한 이유?”

박천중 회장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예. 바로 놈들의 정체를 포착할 수 있는 단서를 잡았습니다.”

“단서라니?”

박천중 회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자들을 상대해오면서 가장 두려웠던 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상대와 싸운다는 것은 허공에 주먹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잡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최근에 플루토 투자신탁을 불법적으로 인수하려 들었던 세력이 있지 않습니까?”

“음. 그랬지.”

그 일로 인해 친동생처럼 아끼던 박찬기 전무까지 감옥에 보내야 했다.

“그들이 박천중 회장님의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내세웠던 사람들의 신원과 자금 흐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조사해봤습니다.”

성진은 가방에서 인쇄한 자료들을 꺼냈다.

자료를 받아든 박천중 회장의 입에서 곧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으음…….”

“보시다시피 놈들이 내세웠던 인물들의 면면을 캐면서 아주 재밌는 그림이 나왔습니다.”

“정말 이게 확실한가?”

박천중 회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가 손에 쥔 보고서에는 자신을 노린 자금의 출처가 모 건설회사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건설 회사는 바로 모 정치권의 인물 몇몇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간간이 떠돌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조만간 확실하게 베일을 발가벗겨서 회장님 앞에 드리도록 하죠.”

“그래.”

박천중 회장은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음…… 자네만 믿겠네.”

“예.”

“나는 좀 피곤해서 잠시 쉬어야 할 거 같구만. 미안하네만 자리를 좀 피해주겠나?”

항상 호쾌하고 당당하기만 하던 박천중 회장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새겨졌다.

‘부담을 느끼는 건가.’

성진은 그런 박천중 회장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을 노리는 세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기쁜 일일 테지만 그 세력이 유력 정치권과 관련을 맺었다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할 일이 아니다.

“예.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회장님. 조만간 더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만.”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비록 박천중 회장은 일시적인 압박을 느끼고 있는 듯 했지만 어차피 지나갈 일이다.

여기까지 버텨온 그가 이제 와서 꼬리를 말리가 없다.

그랬다면 좀 더 일찍 항복하거나 포기했을 것이다.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에게 지시했다.

‘놈들의 자료를 좀 더 철저하게 조사해줘. 앞으로는 그쪽 정보에 관련된 자료들만 집중적으로 수집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마스터.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가 수집한 정보 현황들을 간단히 점검하면서 플루토 투자신탁의 로비를 나섰다.

‘어떤 놈들인지 어디 조만간 얼굴이나 보자고.’

박천중 회장과는 달리 성진에게는 전혀 불안할 이유가 없었다.

성진에게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에.

*   *   *

여의도 한복판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플루토 투자신탁의 빌딩은 신출된 지 얼마 안 되는 빌딩답게 미려한 외관을 자랑했다.

은백색의 특이한 돌기가 군데군데 감각적으로 장식된 수 십 층의 거대한 빌딩.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서늘한 시선이 있었다.

올해 서른쯤 되었을까.

남자는 거리 한 편에서 플루토 투자신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한손에 들려진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살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거하기 바랍니다. 필요한 지원은 아끼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일은 나 하나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니까.”

낮고 탁한 목소리.

남자의 말에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낄낄대며 웃었다.

아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시는구만. 좋소, 일이 끝나면 봅시다. 잔금은 그때 치를 테니까.

“조만간이오.”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

여의도 마천루의 숲.

그 사이에 서 있는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사진을 꺼냈다.

평범해 보이는 장년 남자의 얼굴.

하지만 그는 여의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인물이었다.

“박천중 회장이랬나…….”

남자는 목표물의 이름을 되뇌었다.

잠시 후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겨 자리에서 사라졌다.

늦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그 자리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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