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회: 3권 - 암중모색 -->
새벽.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아직 해도 뜨기 전인 어스름한 시각이다.
그 이른 시각부터 삶을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이 연방 하품을 해댔다.
그 사이에서 한 젊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낡은 잠바에, 때가 절은 카고 바지.
파란색의 털 달린 귀달이 모자를 눌러 쓴 그는 칙칙한 옷 색깔과는 달리 눈에 확 띄게도 커다란 초록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거기에 다시 대비되는 파란색 런닝화.
버스에서 내린 그는 느린 걸음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직후 승강장을 나오는 승객들 사이를 나이든 중년 남자가 비집고 들어갔다.
중년 남자는 빨간 가방을 든 젊은 남자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 순간.
젊은 남자는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는 금속의 이물감을 느꼈다.
승강장을 그대로 빠져나온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물건을 확인했다.
85번 패찰이 달린 열쇠.
터미널 사물함 보관소로 간 그는 85번 사물함을 열었다.
검정색 비닐봉지에 뭔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위에 놓여 있는 나이 든 남자의 사진.
그리고 그 남자의 모습이 실려 있는 지난해 경제신문 스크랩 기사가 놓여 있었다.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플루토 투자신탁 박천중 회장, 내년 3년 연속 최우수증권사 선정 자신.]
남자는 사진과 신문 기사를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살짝 들춰 확인하자 그 안에 담겨있는 수북한 5만원권이 보였다.
재빨리 비닐봉지까지 가방에 챙겨 넣은 그는 바로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새벽 도심.
남자는 이제 막 거리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인파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 * *
점심 무렵.
성진은 차를 몰고 학교를 찾았다.
정식으로 휴학계를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과사무실을 찾은 성진은 사무실 문 앞에서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러자 여조교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간 성진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조교님.”
“어 성진아.”
올해 나이 27의 누님뻘 되는 여조교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휴학계 내러왔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여조교는 애매하게 눙쳤지만 성진은 뻔히 짐작했다.
“애들이 벌써 말했나 보네요?”
“흐흐. 그렇지 뭐. 아무튼 정말 부럽다 야. 플루토 투자신탁이면 우리나라에서 진짜 큰 증권사 아니야.”
곧 대학원 석사 수료를 앞둔 여조교는 이른 나이에 대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성진이 부러운 눈치였다.
“에이, 뭘요. 이제부터 시작이죠.”
성진은 적당히 겸손을 보이면서 휴학계를 작성했다.
“여기에 있습니다.”
“어, 그래. 그럼 앞으로 열심히 해.”
“예. 조교님도 수고하세요.”
“그래.”
성진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과사무실을 나왔다.
이제 완전히 학교를 떠나게 된 성진은 어쩐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박천중 회장을 본격적으로 돕게 되면서 학업을 병행할 수 없게 된 게 원인이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기실 아직 본격적으로 뭔가를 시작해 볼 마음이 없었기에 눈앞의 학교생활을 해왔던 면이 컸다.
이제 휴학계를 내고 학교생활을 정리한 성진에게는 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성진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예. 전진수입니다.
정중한 말투였지만 기본적으로 날카로운 목소리.
바로 성진이 진행 중인 증권 정보지 ‘핑크 레터’의 공급책을 맡고 있는 전진수였다.
“안녕하세요. 보내드린 정보는 잘 받으셨죠?”
예, 보스. 지금 편집중입니다.
핑크 레터의 임시 팀원들은 현재 성진을 보스라고 불렀다.
딱히 마땅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 일단은 보스로 호칭되고 있었지만 크게 안 맞는 것도 아니었다.
성진이 정식으로 회사를 등록한 것도 아니니 사장 직함이 있을 리 만무하고, 핑크 레터의 운영팀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었다.
“팀원들 전부 오늘 만났으면 하는데 지금 옆에 있습니까?”
- 예, 그렇습니다. 보스.
“그럼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나도록 하죠.”
-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성진은 바로 차를 몰아 여의도로 향했다.
여의도의 수많은 빌딩 숲에서 성진이 들어간 곳은 여의도 내에서도 가격이 비싼 축에 속하는 대형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핑크 레터 팀을 창단하면서 성진은 아예 오피스텔을 구매해버렸다.
팀이 쓰는 88평 사무실은 성진을 비롯한 3명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투자였다.
정보지 유통의 진원지이자 메카인 여의도의 동향을 살피기에는 여의도 한복판에 위치할 필요가 있었다.
출입구 앞에 설치해놓은 보안 인식기에 카드를 꽂아 넣고 비밀번호를 치자 곧 자동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다들 수고가 많습니다.”
성진이 인사를 건네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한창 일에 열심히 하던 박윤호와 전진수는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보스.”
“예. 다들 열심이시네요.”
성진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정중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은연중 자기 편한 데로 행동할 법도 한데 성진의 묵직한 기도와 존재감이 그들로 하여금 성진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다만 그들 옆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윤진만 변호사는 특별한 일감이 없던 차였다.
보고 있던 신문을 접어 넣은 그는 겸연쩍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오셨습니까.”
성진은 그런 윤진만 변호사의 눈치를 살피면서 웃으며 말했다.
“변호사님께는 제가 나중에 긴히 중요한 일을 맡길 겁니다. 그때까지는 좀 참아 주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헤아린 성진의 말에 윤진만 변호사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아핫. 예.”
사실 정보지 편집에는, 기업 정보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박윤호나, 전진수 이상이 필요하진 않았다.
사무실 한 켠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셈이었는데 애시당초 법조인인 그를 증권 정보지를 만드는 곳에 불러들인 것 자체가 그의 입장에서는 이해되기 힘들 일이기는 했다.
‘여러모로 이 사람들을 슬슬 다독일 때가 됐지.’
성진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싸워나가는 데 핑크 레터가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 보고 있었다.
비록 급조된 조직이지만 이들의 잠재된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나가는 것은 성진의 몫이었다.
“편집본은 다 됐습니까?”
“예, 보스. 한번 보시죠. 가편집은 끝냈고, 나머지는 정보 공개 수위에 맞춰서 자잘한 디테일만 채워주면 됩니다.”
전진수가 옆에 있던 태블릿pc에 편집본을 복사해서 보여주었다.
성진은 내용을 빠르게 훑어봤다.
“예. 이만하면 괜찮네요.”
대충 자신이 만족하는 수준으로 나온 편집본에 성진은 만족을 표시했다.
“그러면 일단 편집해 두고, 공개 시기는 늘 그랬던 것처럼 보스의 추가지시를 기다리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십시오.”
점검을 마친 성진은 손뼉을 가볍게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오늘은 회식을 하러 왔습니다. 다들 점심 스케쥴 없으시죠?”
성진이 좌중을 둘러보는 사이, 박윤호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보스. 그러면 기왕 회식할 바에 저녁에 맞추시지 그러셨습니까.”
전진수도 맞장구를 쳤다.
“하하 예. 저녁시간에 회식하는 게, 화끈하게 놀기에는 더 좋을 거 같은데요?”
성진은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늘 회식을 하려는 건, 서로 제대로 마음을 나눠보자는 뜻이니까요.”
“마음이요?”
“예. 다들 저한테 궁금한 게 무척 많으실 거 같은데 말이죠.”
성진의 말에 세 사람 모두 침묵으로 긍정했다.
사실 핑크 레터의 가장 중요한 정보 수집부터, 앞으로의 계획까지 그들에게 궁금한 게 없을 리 없었다.
“그러실 줄 알고 제가 오늘은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실 법한 부분을 대답하러 왔습니다. 물론 그냥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딱딱하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러 가죠.”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