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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53화 (53/185)
  • <-- 53 회: 3권 - 다짐 -->

    “으랴압!”

    우렁찬 기합소리가 터져 나오는 태합유술 도장 안.

    저마다 각양각색의 무술 동작을 수련하느라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표학선 관장은 일일이 관원들을 돌보며 자세를 교정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제 막 도장 문을 열고 들어온 성진은 그런 관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관장님. 안녕하십니까.”

    “아! 왔는가.”

    관장은 직접 가르치던 관원을 돌려보내더니 성진의 어깨를 덥석 잡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예. 관장님.”

    성진은 웃으며 관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사적으로는 비전절기를 이어받은 직전 제자라 사부님이라 불러야 하지만 외부에 굳이 알리지 말라는 표학선 관장의 뜻에 따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성진은 사부님이라는 말 대신 관장님이라는 호칭을 써야 했다.

    성진을 보자 표정이 밝아진 관장은 성진의 전신을 살피더니 웃음을 지었다.

    “몸은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구만.”

    “예. 관장님.”

    성진의 육체는 늘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표학선 관장은 그런 성진이 늘 부지런하게 자기 자신을 갈고 닦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미 일정 단계에 접어든 성진의 육체는 기본적으로도 강력한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인공지능 팔찌의 나노 로봇이 미흡한 부분마저 보충했다.

    성진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전연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좀 죄송하긴 한데…….’

    반칙에 가까운 혜택으로 신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요즘 들어 얼굴에 철판을 두른 성진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관장님의 제자답게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내 제자라면 응당 그래야지.”

    관장은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한 두 시간 지나면 저녁 수련시간도 끝나고 관원들이 나갈 걸세. 이따가 보도록 하지.”

    “예.”

    관장이 다시 다른 관원들을 돌보러 다니고 성진은 다른 쪽으로 가서 운동을 할 요량이었다.

    구석에 서서 가만히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말을 걸어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오랜만이구만.”

    돌아본 성진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봤다.

    “아! 한정훈 씨.”

    대련을 하자며 시비를 걸어왔다가 일방적으로 패배를 당한 정훈이었다.

    유쾌하기만 한 인연이 아니니 성진을 그냥 지나칠법한데 정훈은 민망함을 감추려는지 콧잔등을 긁적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구만. 그동안 운동 쉬었나?”

    정훈의 목소리가 사근사근한 것을 느낀 성진은 웃으면서 정훈을 떠봤다.

    “선화 씨하고는 잘되어 가는 모양이네요?”

    “으음, 그게…….”

    정훈은 머쓱한 표정으로 쑥스러워하는 티를 냈다.

    성진이 따로 인공지능 팔찌의 대사 스캔을 사용하지 않아도 정훈의 심리상태가 단박에 파악되었다.

    “사실 이번에 선화 씨하고 결혼식을 올리거든.”

    “결혼이요? 벌써요?”

    여름에 사귀더니 겨울에 결혼이라니.

    성진은 이 커플의 빠른 진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훈이 쑥스러워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선화 씨나 나나 나이가 적은 건 아니니까. 이제 둘 다 조만간 서른이기도 하고.”

    “그래요. 아무튼 축하드려요.”

    “그게 사실. 내가 선화 씨하고 잘된 게 자네 덕분인 거 같아서 말이야.”

    “에이. 제가 뭘 한 게 있다구요.”

    성진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정훈은 성진에게 퍽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아니야. 사실 내가 선화 씨 눈치만 보면서 속으로 끙끙 앓다가 그 일이 계기가 돼서 고백했거든.”

    “아, 그랬나요?”

    성진은 자신이 정훈과 가볍게 대련을 치룬 일이 고백의 계기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정훈에게는 그 일이 어떤 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막무가내로 고백을 했는데, 처음에는 받아주지 않더라고. 그래도 악착같이 매달려서 사귀는 데 성공했지.”

    선화의 얘기를 하는 정훈의 표정에는 행복이 가득해보였다.

    “잘됐어요. 정말.”

    “그래서 말인데 우리 결혼식이 다음 달인데 오지 않겠어?”

    “결혼식이요?”

    잠시 생각한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족친지들이 모이는 대사라서 제가 끼어들만한 자리가 아닌 거 같네요.”

    거절을 한 성진은 대신 정훈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결혼 축하드려요. 잘 사세요.”

    “그래. 고마워.”

    정훈도 가볍게 제안한 것일 뿐, 성진의 불참에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오래간만에 얼굴 봐서 반가워. 나중에 종종 보자고.”

    “예. 결혼식 잘하세요.”

    “그럼. 그래야지.”

    방실방실 웃는 정훈의 표정은 행복한 새신랑의 그것이었다.

    성진은 그때 정훈에게 망신을 주지 않은 게 잘한 일 같았다.

    ‘아마 그랬으면 커플탄생은 못 봤겠지?’

    거기에 성진을 향한 정훈의 원한은 더욱 높아져서 하늘을 찔렀으리라.

    “참. 사람 인연이란 게 알 수 없는 거라니까.”

    성진은 지척에서 탄생한 커플들의 초고속 결혼이 묘하게 느껴졌다.

    다만 정훈의 말 한마디가 뇌리에 맴돌았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고백을 했지.’

    계기.

    어쩌면 성진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인공지능 팔찌의 강력한 능력을 차츰 깨달아가면서도 성진은 세상 속에 자신의 힘을 투사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굳이 계기를 찾자면 최근의 일이 나한테는 계기라고 할 만 하겠지.’

    성진이 자신의 힘을 본격적으로 발휘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박천중 회장이 겪는 위협을 알게 되고 나서였다.

    기실, 거절해도 좋았을 일이다.

    처음 혜영의 부탁을 받고 박천중 회장을 도운 것은 나름 계산이 깔려 있었다.

    박천중 회장과 좀 더 인연을 맺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일련의 상황에 호기심도 느꼈다.

    하지만 박천중 회장이 고백한 음모세력과의 싸움은 가볍게 대할 문제가 아니다.

    “하아. 내가 왜 그런 싸움을 돕겠다고 했을까.”

    성진은 피식 웃었다.

    박천중 회장의 위기를 막아줄 만큼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진은 그가 진심임을 알았고, 응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성진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다.

    “그래. 내 마음에 있는 야심 때문이지.”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이제 인정해야 할 때다.

    성진이 박천중 회장을 도운 것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성진 자신의 야심 때문이었다.

    어떤 위협도 자신을 해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성진은 박천중 회장을 도왔고 대가를 요구했다.

    아마 이 일을 해결하면 박천중 회장은 상당한 노력으로 성진을 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훨씬 자연스럽게 일을 시작할 수 있겠지?”

    인공지능 팔찌의 힘을 빌면 다른 사업을 일으키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상당할 것이다.

    쓸데없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박천중 회장의 조력을 받는다면 이런 문제는 단박에 해결된다.

    하지만 그만큼 성진의 마음은 혼란스럽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평범하게 갓 군대를 졸업한 청년이다.

    자신 안에서 급작스럽게 차오르는 야심이 성진은 어쩐지 부담스럽고 때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오늘 성진은 표학선 관장을 찾았다.

    ‘관장님이라면…….’

    성진은 자신이 구하는 답을 그에게서 바라고 있었다.

    *   *   *

    “자. 오늘 시간은 다 됐구만. 다들 돌아가도록 합시다.”

    표학선 관장이 관원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한창 지도를 받거나 수련 중이던 관원들은 슬슬 씻거나 짐을 챙기러 탈의실로 들어갔다.

    관원들의 퇴실준비를 보던 표학선 관장은 성진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다 나가고 천천히 얘기하지.”

    “예. 관장님.”

    잠시 후 관원들이 인사를 하며 도장 문을 나섰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도장의 문을 막 잠궈 놓은 표학선 관장이 성진에게 다가와 말했다.

    “일은 잘 끝났나?”

    “예. 사부님.”

    성진은 자세를 바로 하고 바로 정식인사를 올렸다.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잘 끝났다니 다행이구만.”

    표학선 관장은 고개만 끄덕일 뿐 뒷얘기는 묻지 않았다.

    성진은 이런 관장의 성격이 가장 좋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으레 호기심을 핑계로 남의 속사정을 캐물을 법 하지만 그는 달랐다.

    관장이 특별히 성진을 배려해서가 아니다.

    그는 바다처럼 드넓은 여유로운 마음이 있었다.

    바로 무도가의 마음가짐이었다.

    무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표학선 관장에게 친인에 대한 자질구레한 의심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대신 그는 잔잔한 눈빛으로 성진을 바라봤다.

    “이제는 여유가 좀 생겼나보군?”

    “예. 사부님.”

    성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모처럼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

    “좋지!”

    관장이 서서히 몸을 풀었다.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의 적절한 신체 관리로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지만 요령껏 몸을 푸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준비가 마쳐진 관장이 자세를 바로 했다.

    성진이 마주 서고 공손히 가르침을 청하는 예를 취했다.

    “오시게.”

    관장이 손등을 보이며 까딱거렸다.

    성진은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흐압!”

    섬전 같은 속도로 성진의 신형이 쏘아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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