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회: 2권 - 헤드헌팅 -->
박천중 회장의 자료를 받아온 성진은 곧바로 분석에 들어갔다.
“흐음…….”
자료 안에 있는 인물 명단들이나 관련 자료들은 정치, 법조, 재계, 언론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부의 정보들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세심하게 정리되어 있기 보다는 같은 내용이 쓸데없이 중복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마 제대로 정리를 못 한 모양이군.”
박천중 회장 개인이 회사나 기타 정보력을 가용해서 자료는 얻을 수 있어도, 그걸 가공하고 정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하긴 정보가 너무 위험하지. 아무한테나 보여줄 수도 없고.”
심복처럼 아끼는 부하라 해도 이런 정보를 대량으로 다루게 할 수가 없으리라.
결국 박천중 회장이 개인시간을 쪼개가면서 혼자 작업한 티가 났다.
하지만 성진에게는 간단한 해결수단이 있었다.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성진의 시각정보를 통해서 인공지능 팔찌가 즉시 데이터를 저장했다.
“내가 지시한 기준에 맞춰서 이 서류 안에 담긴 정보들을 정리해줘.”
- 알겠습니다, 마스터. 지금 즉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대량의 정보들이라 해도 인공지능 팔찌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곧바로 인공지능 팔찌가 정리한 자료들이 성진의 뇌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정리가 완료되었습니다.
- 완료된 자료는 요구하시는 즉시 출력이 가능합니다.
“좋아. 어디 한번 볼까?”
성진은 곧바로 내부에 들어있는 사건 사고 등을 훑어 봤다.
“음?”
개중 흥미를 끄는 사건이 보였다.
“이건…… 비리 수사 사건이라…….”
재벌 회사의 비리 수사와 관련된 소문을 정리해놓은 자료였다.
하지만 유야무야되어서 재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린 소문을 적어놓았는데 관련 검사는 이 일로 인해 좌천되었다가 끝내 해직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료들을 좀 찾아봐줘.”
- 알겠습니다, 마스터. 지금 즉시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겠습니다.
인공지능 팔찌가 곧바로 사건과 관련된 정보들을 줄줄이 쏟아냈다.
“음. 문제가 된 기업은 동천그룹이고 동천화학공업 사장의 공금횡령이라.”
문제의 동천화학공업 사장은 동천그룹 회장의 아들 중 한명이었다.
더군다나 회사 자금을 유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횟수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담당검사의 강행으로 수사가 진행됐지만 확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가 없어서 결국 유야무야 흐지부지되고 수사 담당자들만 문책을 당한 사건이었다.
“이런 사건을 강행수사하다니. 어떤 사람이지?”
감히 재벌을 상대해야 하는 사건을 밀어붙인 사람이 어떤지 궁금했다.
- 바로 검색하겠습니다.
인공지능 팔찌는 즉시 언론이나 여러 미디어에 노출된 해당 인물의 사진을 찾아 출력했다.
마른 체구에 작은 안경을 쓴 고지식한 인상의 남자였다.
-이름은 윤진만.
-본래 경제사범을 조사하는 부서의 검사였습니다.
“흐흠. 지금은 검사가 아닌 모양이군.”
- 그렇습니다. 해당 사건 이후로 변호사 개업을 신고했습니다.
“결국 쫓겨난 건가.”
성진은 윤진만의 데이터를 좀 더 살펴보다가 다음 자료들을 살폈다.
재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던 성진에게 또 다른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경윤그룹의 내부 정보 담당자로 추정되는 인물이라…….”
- 성명 박윤호. 올해 나이 42세로 경윤그룹의 부장이었습니다. 현재는 퇴직한 상태입니다.
“퇴직?”
- 그렇습니다. 해당 회사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스스로 퇴직신청을 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퇴직신청을 했다?”
성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거대 기업의 내부 정보 담당자로 소문이 오고갈 정도라면 분명 상당한 전문성과 경력을 요구하는 직위일 것이다.
게다가 남부럽지 않을 만큼의 수입이나 내부의 인정도 받는 자리였으리라.
그런 직위에 있는 사람이 나이 50도 안 되어서 40대 초반에 직장을 나간다니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회사의 정보 담당자들도 일찍 일을 그만두나?”
- 대개 50대 초반에 퇴직하는 것이 평균적입니다.
“흐음…….”
남들이 모두 탐낼 만한 자리를 젊은 나이에 그만둬야 했다면 별로 좋은 사정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했다.
“좋아. 다음 자료들을 보자고.”
성진은 박천중 사장의 자료들을 살피면서 바로바로 인공지능 팔찌의 검색능력으로 필요한 자료를 첨부해서 받을 수 있었다.
한참을 살펴본 성진은 자신의 구상에 적절한 건수들을 여럿 챙길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상당한 시일과 인원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성진에게는 앉은 자리에서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한번 움직여볼까?”
성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이제부터는 직접 행동에 나설 차례였다.
* * *
수도권 변두리의 상가 뒷골목.
오고가는 상인들은 없고 너무 한적하고 쓸쓸해서 고즈넉한 기운만 잔뜩 끼어있는 그런 동네다.
서울에서 불과 차타고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이거늘 행인이 없으니 장사도 안 되고, 당연히 가게도 주민도 조금씩 떠나갔다.
휑하니 비어있는 건물들 속에서 특이하게도 새로 간판을 올린 가게가 있었다.
“하아…… 이제 대충 정리는 끝났구만.”
올해 나이 마흔하나.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검사로 서울지청에 근무하던 그는 지금은 이 망해가는 동네에서 허름한 사무실을 개업한 변호사였다.
“후우, 힘들어 죽겠다.”
낡아빠진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팔다리를 연신 두드렸다.
한참동안 짐정리를 하고 푸느라 반나절을 씨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스스로 안마를 한 그는 아직 정리가 덜 된 방안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혼자 있으려니 좀 쓸쓸하구만.”
좋게 퇴직했다면 일하던 동료들이라도 와서 도와줬겠지만 그는 그런 팔자 좋은 처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후훗. 내가 저지른 죄니까 뭐.”
쓰게 웃은 그는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밖에 나가면 검사님이지만 안에 들어오면 그는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
40대가 되도록 평검사로 나이 먹어가면서 출세의 기회와는 인연을 정리해야 했던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었다.
애시당초 지방대 출신에 별다른 지연, 학연이 없는 데다 이리저리 꼬리치는 재주도 없는 그로서는 출세에 필요한 그 줄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남들이 떡 벌어질만한 실적을 낼 수 있는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욕심을 버렸다.
출세욕을 버리고, 사리사욕을 버리자 그 자리를 사명감이 차지했다.
사명감 하나로 일을 처리하다보니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는 높으신 윗분들과 거듭 충돌했고 끝까지 버티다 결국 조직을 나와야했다.
“후우-.”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그는 얄팍한 의자 등받이에 어깨를 기댔다.
대출을 받을 엄두는 도저히 안 나서, 남은 돈을 탈탈 털어서 개업한 이 사무실이 이제 그의 가장 큰 재산목록이 되었다.
열심히 일을 해야 할 텐데 사고치고 쫓겨난 검사라는 소문이 벌써 법조계에 파다해서 사무장 자리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마디로 되는 일이 없는 요즘이었다.
“에이, 될 대로 되라.”
다 타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응? 누구지?”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어준 그의 눈앞에 젊은 청년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윤진만 검사님.”
“난 이제 검사 아닙니다. 변호사죠.”
“아, 실례했습니다 윤 변호사님.”
“그런데 저를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젊은 청년은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일단 방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들어가도 되냐는 말에 윤진만의 표정이 다소 난처해졌다.
“그게 아직 정리가 덜 끝나서 누추하긴 한데…….”
“괜찮습니다.”
“그럼 뭐 들어오세요.”
허락을 얻은 청년, 성진은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지저분한 모습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 이런 곳으로 쫓겨나다니.’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 성진을 보면서 윤진만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사무실을 얻은 지가 얼마 안 돼서 말입니다.”
“아, 예. 아무래도 개업한 지 얼마 안 되면 어수선하죠.”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윤진만은 아직 변호사 개업신고만 했을 뿐 별다른 홍보를 한 적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변두리에 개업한지라 눈에도 잘 띄지 않을 텐데 이런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왔다는 게 무슨 이유일지가 궁금했다.
성진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윤 변호사님을 고용하고 싶어서입니다.”
“나를 고용하겠다구요?”
“예. 그렇습니다. 윤 변호사님을 제가 고용하고 싶습니다.”
“허어.”
윤진만은 젊은 청년의 말에 다소 어이가 없었다.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것과 전속 고용은 전혀 다른 일이다.
“돈이 많습니까?”
날이 선 반응이었지만 성진은 웃으며 대꾸했다.
“넉넉합니다. 적어도 윤 변호사님께 적당한 급여를 지불할 수는 있습니다.”
“허허.”
윤진만은 뭐라 반응해야 좋을지 감이 안 잡혔다.
“이봐요, 왜 하필 나 같은 사람을 찾아온 겁니까? 사실 나는 검사 출신이긴 해도 평검사 출신이라 전관예우도 어렵고, 불미스런 일로 검사직을 그만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윤 변호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 점 때문이라구요?”
“예. 윤 변호사님은 적어도 법을 가지고 장난칠 사람은 아닌 거 같더군요.”
“법을 가지고 장난을 치진 않겠다?”
“예. 다른 건 몰라도 법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죠. 안 그렇습니까?”
윤진만의 눈초리가 변했다.
‘이거 뭐하는 녀석이지?’
그리고 그런 윤진만의 심리상태를 성진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 흥분, 공감 등의 감정 상태로 추정됩니다.
인공지능 팔찌가 윤진만의 심리 변화를 시시각각 판별, 보고하고 있었다.
‘후훗. 당신 같은 사람을 설득하는 거야 쉽지.’
성진은 이미 윤진만의 심리상태와 기호, 가치관 등을 면밀히 분석해 온 상태였다.
성진이 말을 이었다.
“저는 적어도 법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싶어 하는 법조인 동료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이 제격일 거 같아서 말이죠.”
그 뒤로 성진은 법의 공정성, 준엄함 등을 강조하면서 사회적인 부조리와 일부 비양심적인 법조인과 윤진만을 비교하면서 띄워줬다.
윤진만은 처음에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성진의 말에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닳고 닳은 법조인 출신을 이만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미리 인공지능 팔찌가 심리상태를 조사해놓은 덕분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서 심리를 건드릴 수 있는 결정적인 화제를 꺼내고 최대한 상대가 긍정적으로 반응할만한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었으니 자신도 모르게 성진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됐다.’
성공을 직감한 성진은 웃으며 윤진만에게 명함을 건넸다.
“저는 플루토 투자신탁의 계열사 간부입니다. 생각나시면 연락 주십시오.”
“음. 예.”
윤진만은 성진의 명함을 받아 바로 지갑에 챙겨 넣었다.
애써 법조인 특유의 뻣뻣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미 거의 다 넘어온 상태였다.
‘뇌파를 한번 읽어봐야겠는데.’
-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가 즉시 윤진만의 뇌파 사념을 수집했다.
슬쩍 윤진만의 뇌파를 읽어본 성진은 결정적인 확인을 끝냈다.
‘역시,’
윤진만은 이미 성진에게 보통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성진이 윤진만에게 한 말은 평범한 몇 마디 말뿐이었지만 그것이 고도의 계산을 통해 전달되면서 깊은 호감을 남겼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진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윤진만은 지갑에 챙겨뒀던 명함을 꺼내 읽어봤다.
‘플루토 투자신탁의 계열사라…….’
명함을 다시 챙겨넣는 윤진만의 표정에 밝은 빛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