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49화 (49/185)

<-- 49 회: 2권 - 동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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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박천중 회장이 늘어놓은 비밀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는 어떤 조직에게 고용 제의를 받았다네. 내가 일개 개미로 나름 투자 개론을 쓰면서 인터넷에 이름을 알리던 시기였어.”

시작은 90년대 말.

나이 30대 후반의 박천중 회장은 평범한 일반 기업의 직원이었다.

그때까지 박천중 회장은 평범하게 직장 생활에 충실하면서 부장 진급을 노리던 일반 회사원에 불과했다.

그 이전까지 증권이니 주식이니 하는 단어는 신문에서만 인연이 있었던 그였다.

그러나 우연히 증권투자를 통해서 수익을 올린 그는 증권투자에 대해 나름의 감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때는 내가 끗발이 무섭게 섰지. 주식이란 게, 이제 와서 내가 대형 증권사 회장이 되었으니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참 편한 입장이지만 그때는 달랐지. 정보가 없는 입장에서는 결정적인 부분은 순전 감으로 하는 싸움이었어.”

회사 생활밖에 모르던 박천중 회장은 증권 시장에서 실패와 성공을 거두면서 결국 그 세계에 매료되었다.

“언제 들어가서 언제 나올 것인가. 뜬소문, 사기꾼들의 입방정이 나도는 증권 판에서 결정적인 순간은 모두 이 머리통에서 느껴지는 육감으로 결정했단 말이지. 그런 결과물을 자랑하고 싶었지. 인터넷에 사람들 보라고 자랑 글을 올리다보니 어느새 내가 유명세를 타더군.”

개인투자자로서 전념하기 위해 회사까지 관둔 그는 곧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인터넷 블로그 등에 투자 관련 지론과 분석 등을 올리기 시작했고, 곧 실제 수익을 증명하면서 주식 커뮤니티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예, 압니다. 회장님은 개미에서 슈퍼 개미로, 그리고 다시 대형 증권사 회장까지 오르신 대단한 분이시라는 걸 말이죠.”

남들이 보기에도 드라마틱한 인생과정.

일개 회사원에서 대형 증권사의 회장까지 고작 10년 사이에 엄청난 출세를 이룬 그는 주식 시장의 가장 약하고 힘든 존재인 개미들의 우상이었다.

“그런 내력이 개미들, 개인 투자자들한테는 더없이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점이어서 성장에 도움이 되셨던 것으로 압니다.‘

박천중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랬지.”

차를 마저 들이킨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기만이었어. 거짓이었지.”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나는 오히려 개미들을 등 처먹은 부끄러운 사람일세. 어느 날 나보고 거액을 줄 테니 자기들을 위해서 작전을 도우라더군…….”

몇몇 사람들과 접촉한 박천중 회장은 거액의 돈 가방을 받았다.

요구받은 것은 두 가지.

비밀을 지킬 것.

얻은 돈의 상당량을 상납할 것.

“내 몫으로 떨어지는 돈의 양이 상당했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느꼈지. 내가 그 거액이 굴러다니는 작전의 톱니바퀴가 되어서 소모되어가는 느낌. 이러다 일이 잘못되면 나는 꼼짝없이 폐기될 위험한 입장에 있었다네.”

성진은 그 대목에서 이미 박천중 회장이 다음에 취했던 행동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배신을 하셨군요?”

박천중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그 놈들을 배신했다네.”

그때 웨이터가 다가왔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음. 그래요.”

음식이 테이블에 깔리는 동안 박천중 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웨이터가 돌아가고 성진이 말을 걸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박천중 회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핫. 먼저 마누라하고 하나 있는 딸자식을 외국으로 몰래 보내버렸어.”

그 뒤로는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작전을 행하고 얻은 돈을 몽땅 박천중 회장이 먹어버린 것이다.

“그 놈들한테 갈 돈을 한방에 빼돌려서 플루토 투자 신탁을 세웠지.”

그 때 박천중 회장이 먹어치운 돈은 무려 1조원.

그 돈을 200억, 500억씩 차근차근 합법적인 돈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순식간에 자금규모 1조원짜리 증권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그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습니까?”

“내가 비밀을 쥐고 있었으니까.”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적으로 박천중 회장을 건드리기에는 그가 관여한 일이 너무 많았다.

“내 일신에 위험이 생기거나 하면 자동으로 비밀이 공개되게끔 해놨다네. 그리고 그 뒤로는 움직일 때마다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움직였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간단하게 말했지만 성진은 박천중 회장의 사념을 읽어 들이면서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성진은 말을 이었다.

“그 자들이 지금 10년 만에 회장님을 제대로 노리고 있군요.”

“그래. 불안 불안했는데 올 게 온 거지.”

박천중 회장은 씨익 웃었다.

수년을 위협 속에서 견뎌온 노장의 미소였다.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만 하지 말게. 내가 바라는 대답이 뭔지 알지 않나?”

“그거라면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성진은 미소 지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식겠습니다.”

성진의 미소를 본 박천중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네.”

사실 성진의 성격상 박천중 회장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진은 타인의 사념을 직접 읽을 수 있었다.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서 읽어낸 박천중 회장의 기억은 말과 일치했다.

‘적어도 내가 직접 본 기억은 믿을 수 있지.’

성진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서 묵묵히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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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성진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가 회장님을 효과적으로 도우려면 몇 가지 알려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뭔가?”

“회장님을 위협하는 자들이 정확하게 누굽니까.”

박천중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 수가 없어. 철저하게 점조직 형태로 나에게 접근했거든.”

“음…….”

성진으로서는 다소 버거운 일이었다.

아무리 인공지능 팔찌의 조사력을 발휘해도 공개된 정보가 아니라면 쉽게 수집해낼 수가 없다.

“누군지 확실히 안다면 더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목표를 특정 한다면 전화, 전자통신 등을 도청해서라도 알아낼 수 있겠지만 박천중 회장이 확실히 목표를 모른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어쨌든 자네가 날 돕겠다고 하니 정말 고맙네.”

“참. 혜영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말로 저쪽에서 막나가기로 한다면 혜영씨부터 노릴 텐데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혜영이는 일단 경호원들 도움을 받고 있어. 상황이 어려워지면 당분간 출국 시키려고 하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참. 만약에 외국으로 나가게 된다면 꼭 자네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더군.”

“저를 말입니까?”

“허허. 좋을 때지. 청춘이라는 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던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하시는 지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절대 아닙니다.”

“절대? 내가 장담하는데 남녀 사이에 절대라는 말은 없다네.”

“하하하.”

성진은 어색하게 웃어넘겼지만 박 회장은 끝내 못을 박았다.

“아무튼 혜영이는 자네한테 호감이 있더군. 자네도 웬만하면 좋게 생각해 봐.”

혜영의 자신만만하고 상큼한 미소를 떠올린 성진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솔직히 그녀는 엄밀히 말해서 당당하고 멋진 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고개를 저은 성진은 단호히 말했다.

“지금은 일 얘기나 하죠. 일단 약속하셔야 할 게, 제가 회장님을 돕는다면 회장님도 그만큼 저한테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음. 그거야 물론일세.”

“그리고 지금 문제는 어떤 자들이 회장님을 노리는지 모른다는 거죠. 더군다나 저도 회장님을 도우면서 그들 눈에 노출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음…….”

“그래서 제가 힘을 키우려고 합니다.”

“힘이라?”

“예. 사실 회장님이 저한테 비밀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사실입니다.”

성진의 눈빛에 자신감이 떠올랐다.

“저는 마음만 먹는다면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처구니없이 느껴질 정도로 황당한 말이 나왔다.

정신병자의 망언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더욱이 그 말을 듣는 상대는 국내의 최고 증권투자사의 회장이었다.

하지만 박천중 회장은 웃으며 성진을 바라봤다.

“흠. 솔직히 믿기 힘든 말이군.”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박천중 회장은 성진의 말에 부정적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 돈 천 억원을 가져다주고, 내 회사를 지켜준 사람이니 믿어야겠지.”

박천중 회장은 성진에게 절대적인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말해보게. 내가 도와줘야 할 게 뭔가?”

“간단합니다.”

뒤이어 나온 성진의 말에 박천중 회장은 흥미로운 표정을 보였다.

                   *      *      *

박천중 회장과 함께 플루토 투자신탁으로 들어오자 혜영이 환하게 웃으며 성진을 맞았다.

“어머. 어쩐 일이에요, 성진씨?”

“회장님하고 잠시 얘기를 나눌 일이 있어서요.”

“아버지하구요?”

“예.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흐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오래 걸리나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옆에서 듣던 박천중 회장이 넌지시 나섰다.

“인석이 자네하고 놀고 싶은 모양이구만.”

“어머, 우리 아버지가 하여튼 도사라니까.”

혜영도 부정하지 않고 성진의 옷깃을 매만지며 윙크를 날렸다.

“그럼 이따가 봐요, 성진씨.”

“하핫.”

부녀가 나서니 성진은 애매하게 발을 뺄 뿐이었다.

그런 성진을 보고 웃으면서 박천중 회장이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자, 가지.”

“예.”

집무실로 들어간 박천중 회장은 바로 금고 문을 열었다.

“일전에 간단히 정리해 둔 서류인데 자네가 원하는 내용이 조금은 있을 거야.”

누런 사무용 봉투를 꺼낸 박천중 회장은 성진에게 봉투를 건넸다.

“두툼하군요.”

“당연한 거 아닌가. 이 나라 정, 재계의 요주의 인물들을 담은 명단인데 말이야.”

성진이 박천중 회장에게 원했던 정보.

그것은 바로 인공지능 팔찌의 조사력으로 얻어낼 수 없는 은밀한 분야의 정보였다.

이 나라를 장악한 권세가들과 그 휘하의 조직 생태를 박천중 회장이 알아낼 수 있는 범위에서 조사해 온 자료였다.

“내가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네. 아주 만능인 자료가 아니니 명심하라고.”

“예. 물론입니다.”

대형 증권사 회장으로 살면서 나름대로 정보력을 키워 왔겠지만 그도 정말로 은밀한 분야의 속살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성진이 하려는 일에는 충분했다.

“그럼 오늘은 이 서류를 받아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나가면서 우리 혜영이하고 놀아주는 것도 잊지 말게. 응?”

“아아…… 예.”

말을 마치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박천중 회장의 모습에 성진의 뇌리에 사자성어 하나가 떠올랐다.

‘부전자전이라더니…….’

                  *     *     *

“성진씨, 일 다 끝났어요?”

집무실에서 나오는 성진에게 혜영이 웃으며 다가왔다.

“예. 이제 다 끝났죠.”

“그럼 나랑 잠깐 커피 한잔해요.”

따끈한 캔 커피 하나를 건네는 혜영을 보고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그러고서 혜영은 성진을 직원 휴게실로 데려갔다.

지난 박찬기 전무의 사건 때 혜영이 회장의 딸인 것이 회사에 소문이 나서인지 휴게실에 있던 직원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후훗. 내가 이렇게 인기가 없다니까.”

비어버린 휴게실을 보면서 혜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 다른 직원들이 적응해나가는 중이라 그러겠죠.”

성진의 위로에 혜영은 금방 표정을 풀었다.

“그렇겠죠. 사실 그렇게 마음 쓰진 않아요.”

“음. 그래 보입니다.”

언제 보아도 혜영은 당당했다.

아마 오랜 외국생활의 영향을 받은 탓이리라.

아무튼 성진이 여태까지 봐 온 여자 중에서는 가장 당찬 여자였다.

“그 점이 혜영 씨 매력이죠.”

“어머. 그런가요?”

“그럼요. 전 이런 걸로 빈 말 안 합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혜영은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우리 아버지가 성진 씨 만나면서 많이 고민하셨어요.”

“예. 그러셨을 겁니다.”

엄청난 비밀을 성진에게 털어놓았다.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나쁜 일을 많이 하셨던 것도 알겠네요.”

“예.”

주가 조작에 관련되었던 시절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 말을 꺼내는 혜영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변명으로 들릴 거 알지만 아버지는 그 때 일을 저한테 얘기하시면서 많이 자책하셨어요. 아버지의 그 때 일, 너그럽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너그럽게요?”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죄는 죄일 뿐이죠. 회장님이 아니라 그 누가 되더라도 그런 죄를 저지른 것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성진씨…….”

“주가 조작에서 발생하는 피해자들은 엄연히 지금도 고통 받고 있을 겁니다. 그런 일을 주도적으로 행하셨다면 그건 회장님의 업보죠.”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했지만 당사자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가. 혜영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서렸다.

성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다만 반성하고, 개심하는 것도 회장님의 몫입니다. 결국 그 죄는 회장님이 짊어지실 문제죠. 저나 혜영씨가 뭐라 평가하고 재단할 일은 아닐 겁니다.”

성진의 말에 혜영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훗. 성진씨는 역시 내가 찍은 남자답네요.”

“하핫.”

이렇게 노골적으로 혜영이 구애의사를 던지면 성진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또 그렇게 웃어요? 내가 이러는 게 싫어요?”

“싫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다만 아직 저는 연애사업을 시작할 생각이 없어서요.”

“시작하고 나서 결정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은데요.”

혜영이 성진의 한쪽 팔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성진은 슬쩍 팔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오늘 좀 늦었네요. 집에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아직 저녁도 안 됐는데요?”

“죄송합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웃으며 인사를 한 성진은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런 성진을 보면서 혼자 남은 혜영은 입맛을 다셨다.

“흐응, 두고 봐요 성진 씨. 언젠가는 내 매력을 알게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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