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회: 2권 - 집들이 -->
* * *
성진은 바로 이사 업체를 수소문했다.
세간이 꽤 되었다.
사실 버려도 아쉽지 않을 아쉬운 물건들이었지만 어머니는 물건만은 다 가져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조심하세요.”
“예. 걱정 마십쇼.”
이사 업체 직원들이 바로 짐을 챙겨서 트럭에 실었다.
어머니는 미리 그 집에 가 계시고, 성진과 성희가 나머지를 챙겼다.
“다 됐습니다.”
업체 직원의 말에 성진이 수고비를 건넸다.
“고생하셨어요. 이건 일하시고 나서 목 좀 축이시라구요.”
많은 액수는 아니었다.
사람 수대로 모여 앉아 부족하지 않게 막걸리 값이나 할 만한 돈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일하는 사람 어깨에 흥이 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아유, 감사합니다.”
“그럼 마무리까지 잘 좀 부탁드립니다.”
“예. 당연하죠.”
이삿짐 차량이 출발하고 성진도 성희를 차에 태우고 뒤를 따랐다.
“오빠. 이사하면 나 공부방 꾸며줄 거지?”
“응? 공부방이라니? 너 공부는 기숙사에서 하잖아.”
“왜에. 나도 집에 들어와서 공부할 수도 있는 거지. 아무튼 해줄 거지?”
“에휴, 그래. 공부한다는데. 근데 어머니가 어련히 알아서 해주실 텐데 뭘 나한테 굳이 말하고 그러냐.”
“응? 그야 오빠가 우리 집안 가장이잖아.”
“어?”
당연한 거 아니냐는 성희의 반응에 성진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그런가.”
어느 사이에 성진이 집안 대소사를 결정짓는 가장이 된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부모님 가게를 차려드리고, 이사할 집을 마련해드리고.
부모님조차 성진에게 상당히 의지하게 되셨다.
겨우 스물 한 살 나이에 불과한 성진에게 말이다.
“그래. 오빠가 해줄게.”
“음. 기왕이면 침대랑 책상은 나랑 같이 고르러 가자. 알았지? 오빠.”
“어휴, 그래. 대신 이번 한번뿐이다.”
“알았어. 땡큐.”
말이 오가는 와중에 차는 드디어 새로운 집으로 도착했다.
직원들이 바로 짐을 부리고 반나절도 안 돼서 집기들이 모두 집안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애초에 작은 집 살림이라 방 몇 개를 채우고 나니 남은 공간이 썰렁했다.
“바로 사러 가야겠는데?”
남은 공간에 채울 가구를 사러 성진은 다시 부모님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옆에 탄 성희는 마냥 신난 기색이었다.
가구점에서 이것저것 고른 성희는 다분히 소녀 취향의 새하얀 침대와 책상을 골랐다.
그 외 거실 소파나 기타 가구들 모두 가족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그 즉시 계산했다.
“이거 언제 배달 오죠?”
“웬걸요. 계산만 해주시면 오늘 저녁에라도 바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어. 그런가요?”
“아유, 그럼요.”
가뜩이나 불황이다.
성진처럼 한꺼번에 많이 사가는 고객이라면 당일 배달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예.”
새로 산 가구는 그 날 저녁에 바로 도착했다.
이것저것 짐을 풀고, 가구를 배치하고 나고 며칠이 지나자 부모님은 집들이를 위해 가까운 친척들을 부르셨다.
모처럼 부른 친척들은 모두 예상치 못한 집의 크기에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대체 이런 집은 어디서 난 거냐?”
평소에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큰아버지였다.
“살림살이 뻔한 집이 어떻게 이런 집에…….”
간혹 명절만 되면 은근히 성진의 집을 깔보곤 하던 기색이 어느 정도 있던 큰아버지였다.
하지만 집안 어른이라 성진은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이 집은 얼마 짜리냐?”
큰아버지가 성진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글쎄요.”
그러면서 성진은 속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휴. 그저 돈밖에 모르는 양반이시군.’
평소에도 자신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 은근히 과시하던 중에 성진의 집이 이렇게 잘 살게 되었으니 영 자존심이 상하는 눈치였다.
결국 큰아버지는 집모양이 어떻다, 풍수가 어떻다 엉뚱한 소리를 한참 늘어놓은 뒤 일이 바쁘다며 가버리셨다.
아버지는 그런 형님을 보고 그저 말없이 배웅할 뿐이었다.
“어휴. 저 형님도 예전에는 안 그러셨는데.”
아버지의 혼잣말에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부터 그러셨는데요.’
큰아버지가 유독 유별날 뿐.
다른 친척들은 모두 성진 일가의 이사를 축하해주었다.
게다가 성진이 들여놓은 가구가 명품은 아니었지만 이름 있는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절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어머니는 여자 어른 분들과 같이 부엌 같은 곳을 보면서 즐겁게 수다를 떠셨다.
성진은 그 모습이 정말로 보기 좋았다.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남의 집을 갔다 오면 과연 유쾌하셨을까 싶었다.
문득 생각해보면 본래 살던 집은 어머니가 여성으로서 만족할만한 공간은 절대 아니었다.
“진작 이사를 올 걸 그랬나보네.”
성진은 이사를 통해 얻은 결과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 * *
집들이를 마치고 몇 주 쯤 지나고 나니 큰아버지가 찾아오셨다.
거기에 집들이조차 찾아오지 않고 연락이 소원하던 몇몇 고모들까지 대거 성진의 집을 찾았다.
“어머 얘. 집이 참 좋구나.”
고모들은 집을 둘러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평소에 관계가 데면데면한 걸 떠나서 소원하거나 오히려 안 좋은 편에 속하던 친척들이 갑자기 찾아온 걸 보고 어머니는 기분이 언짢으신 듯 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유, 언니는 참. 아 이사했다니까 보러 온 거지 뭘. 우리가 남이에요?”
가만히 듣던 어머니와 성진은 기가 막혔다.
‘남보다 더 못하게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성진 일가가 유독 어렵게 살아오는 동안 어떤 도움도 내민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친척지간에 꼭 도움을 주고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잘 살게 되고 나서 찾아오는 뻔한 속내에 성진은 정나미가 떨어져버렸다.
그럼에도 고모들은 아랑곳 않고 연달아 친근한 척을 해왔다.
“호호. 언니 화장품 뭐 써요? 아휴 피부 많이 좋아졌네.”
“언니. 언제 우리랑 같이 쇼핑이나 나가요. 아무래도 우리끼리 나가야 마음도 맞지 않겠수?”
어머니는 적당히 상대만 해줄 뿐 별 말이 없으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큰아버지를 상대하셨다.
이러쿵저러쿵 내용도 없는 대화가 지나고 한참 뒤에야 예상한 본론이 나왔다.
“우리 애가 유학을 보내야 할 거 같은데…….”
“주택 부금 남은 게…….”
역시나 예상대로 돈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큰아버지는 더욱 더 점입가경이었다.
“보증 좀 서다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절로 어이가 없어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어머니는 가타부타 몸이 아프다고 하시면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고모들은 혼자 남은 아버지한테 매달렸다.
“어휴.”
성진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집안 어른들만 아니면…….’
저런 친척어른은 별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집안어른이었다.
아버지는 형제들의 후안무치한 요구에 한참을 눈을 감더니 노여운 표정과 함께 눈을 떴다.
“형님. 그리고 너희들. 지금 뭐하는 짓이냐.”
평소에 아버지가 형제로서 점잖게 대해주시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셨다.
화가 난 아버지를 보고 어쩔 줄 모르던 고모들은 큰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임마. 너 지금 좀 살게 됐다고 형제들을 나몰라 하겠다는 거냐?”
큰아버지의 뻔뻔스러운 말에 아버지는 절로 천장을 올려보셨다.
“어휴, 거 참.”
아버지는 한숨을 푹푹 쉬셨다.
“형님. 의절하고 싶지는 않으니 여기서 그만 두세요. 그리고 너희들, 너희들 일은 너희들이 해결해라. 이 오빠가 언제 너희들한테 도와달라고 했었니?”
“어머, 오빠.”
“됐으니까 돌아들 가세요.”
아버지마저 뒤돌아서시고 고모와 큰아버지는 별 수 없이 집을 나서야 했다.
그러면서도 분에 받혔는지 갖은 상소리를 늘어놓으며 나갔다.
“야, 임마! 가족들 나몰라라하고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 같냐?”
“이놈의 집구석 확 무너져버려라.”
남도 안 할 비아냥에 욕설이 들려오는 걸 보고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어휴, 정말. 너무들 하시네.”
못마땅한 것은 성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어머니랑 아버지도 기분 정말 안 좋아지셨나봐. 이게 뭐야. 불청객들이 찾아와서는.”
성희는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니 마음도 안 좋아졌다.
“흐음…….”
성진은 그런 성희를 보다 입을 열었다.
“오빠 친구들 부를까?”
“오빠 친구들?”
“응. 뭐 동아리 애들도 있고.”
“오. 좋아. 그럼 나도 나랑 좀 친한 애들 불러도 되지?”
“그래. 대신 부모님한테 미리 허락받자.”
“알았어.”
성희는 친구들을 초대할 생각에 금방 들뜬 기색이었다.
부모님한테 허락을 받은 성진은 종연과 영식이를 불렀다.
그리고 얼마 후, 종연과 영식은 득달같이 도착했고, 새로 이사한 집을 보고 한창 둘러봤다.
“야. 집 좋네.”
“형님. 저 부르시지 그랬어요. 일할 거 많으셨을 텐데.”
“영식이 넌 됐어. 손가락도 아직 치료중인데.”
“에이. 그래두요.”
말을 주고받는데 성희가 끼어들었다.
“이 오빠가 그 영식이 오빠?”
부모님의 가게에서 일을 돕고, 성진과 동거한다는 오빠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어. 영식이. 만나는 게 늦었네. 이쪽은 내 여동생. 한성희.”
“안녕. 난…… 김영식이야.”
지나치게 쑥스러워하는 영식을 보고 성희는 당당하게 악수를 건넸다.
“전 오빠 여동생. 한성희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오빠.”
“어…… 만나서 반갑다.”
영식이 성희와 통성명을 하고 종연도 따라 소개를 받았다.
“안녕? 성희야. 나는 네 오빠와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문종연이라고 한다.”
종연의 넉살에 성희는 킥 웃었다.
“재밌는 오빠네요? 반가워요.”
인사를 나누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바로 미란과 희진이었다.
“내가 나가볼게.”
성진이 밖으로 나가 현관문을 열자 간단한 선물을 든 희진과 미란이 인사를 했다.
“오빠. 안녕하세요?”
“성진씨. 오랜만이네요.”
”예. 오랜만이네요. 미란씨. 안녕, 희진아.“
두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성진의 부모님께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두 사람이 동시에 공손히 성진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자 이상한 눈치가 느껴졌다.
어머니는 두 사람을 거실에 앉히고서 성진에게 귓속말을 하셨다.
“너 언제 저런 처녀들을 두 명이나 꼬신 거야.”
“아이, 꼬시다뇨. 무슨 말씀을.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기는. 딱 봐도 너한테 넘어간 지 한참인데.”
어머니는 두 명이나 되는 여자가 동시에 아들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은 상황이 즐거우신 모양이었다.
“호홋. 잘하면 손주는 빨리 보겠구나.”
“아이, 어머니도 참.”
얼마 전 큰아버지와 고모 때문에 겪은 불쾌한 일은 싹 잊히셨는지 어머니는 빙긋 웃으셨다.
성진은 그런 어머니를 마주보면서 따라 웃었다.
“그렇게 웃으세요. 어머니는 웃는 게 가장 좋아요.”
“그래. 내가 우리 아들 믿고 산다. 가게 차려주고, 집 사주는 아들이 요즘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
어머니는 뿌듯한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셨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성진은 기분이 풀리신 거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응?”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던 거 어떻게 다 갚을지 모르겠네요.”
“갚기는.”
어머니는 성진의 등을 토닥이셨다.
“갚을 필요 없어. 네 아버지랑 이 엄마가 너희들한테 해주는 거는 무조건 다 주는 거란다.”
“네.”
성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자 친구들은 슬슬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희진과 미란은 모두 다소곳한 태도로 성진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어머님, 아버님. 그럼 나중에 뵐게요.”
“그래. 나중에 보자.”
어머니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성진을 돌아봤다.
“저 중에 정말 아무도 없어?”
아버지도 궁금하셨는지 말을 덧붙이셨다.
“성진이 너 정말 아니냐?”
“아이, 참. 아버지까지. 정말 아니라니까요.”
성진은 난감한 표정으로 양 손을 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