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회: 2권 - 마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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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박찬기 전무는 구속되어 구치소에 들어갔다.
박찬기 전무의 담당 변호사가 구속적부심사를 걸면서 박찬기 전무를 빼오려고 들었지만 드러난 혐의가 너무 엄청났다.
설상가상으로 몇 달 전 제3국의 비자까지 미리 받아놓은 것이 드러나 법원이 허락하지 않았다.
일련의 상황을 알려준다는 명분으로 성진을 카페로 불러낸 헤영은 웃으며 커피를 머금었다.
“이제 다 끝났군요. 박찬기 전무는.”
성진의 말에 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 끝났죠. 이젠 전무도 아니니까요.”
회사를 해치는 중대한 배임행위와 해사행위가 드러난 만큼 박찬기는 사규를 통해 자동으로 해고 처리되었다.
혐의가 인정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뒤바뀌겠지만 박찬기에게 그럴 가능성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회장님은 괜찮으세요?”
성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혜영이 씩 웃어보였다.
“괜찮지는…… 않으세요. 아무래도 믿고 일을 맡기던 사람이 배신했으니 충격을 받으셨나 봐요.”
“예. 아마 그러시겠죠.”
“성진 씨한테 전무자리 주신다는 말은 솔직히 농담이셨는데, 이제 정말로 전무직을 맡아야겠는데요?”
혜영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직 제가 그런 직책을 맡을 경륜이 안 되죠.”
“경륜은 결국 능력의 다른 말이죠.”
“하핫. 모쪼록 사양하겠습니다.”
성진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 보니 회장님께서 부친 되신다고 하시던데 몰랐습니다.”
인공지능 팔찌의 조사로도 혜영이 박천중 회장의 직계비속이라는 사실은 전혀 노출된 바가 없어서 알지 못했다.
따로 가족관계를 주의 깊게 조사했다면 모르겠지만 박천중 회장은 혜영을 자신의 자식으로 소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최근까지 외국 생활을 오래 했어요. 아버지 일 도운 것도 얼마 안 되구요. 제가 회장님 딸인 걸 아는 사람은 박찬기 전 전무님뿐이죠.”
“아, 그랬군요.”
남들이 모르는 관계를 알 정도라면 배신했다면 거의 가족 같은 관계였을 것이다.
“상심이 크시겠군요.”
“아니요? 배신당해서 화는 나지만 상심 같은 건 제 취향이 아닌데요.”
의외로 다부진 반응을 보이는 혜영이었다.
“그렇군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혜영은 은근히 외유내강 형이었다.
“참. 여유 되시면 오늘 아버지 문병 좀 부탁드려요.”
“문병이요?”
“예. 병원에서 성진 씨를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성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찾아 뵙겠습니다.”
* * *
박천중 회장이 입원한 병실은 전형적인 VIP병동이었다.
경비원들이 병동 정문에서부터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미리 연락이 닿았는지 성진이 이름을 대자 바로 간호사가 다가와 안내했다.
“계십니까?”
병실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곧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와.”
성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몸집이 넉넉한 노인이 침대에 앉아 경제 채널을 보고 있었다.
박천중 회장은 생각보다 건강해 보였다. 성진을 돌아본 박천중 회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자네 덕에 큰 위기 넘겼구만. 고맙네, 정말.”
그런 박천중 회장을 보면서 성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니더라도 대책은 있으셨겠죠?”
대형 증권사의 회장이 딱 한번 얼굴을 본 성진에게 모든 걸 걸었을 리가 없다.
과연 박천중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자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수가 있긴 있었지. 하지만 자네 덕에 안 꺼내도 되게 생겼어. 아주 깔끔하게 일이 해결됐으니까.”
“그럼 저를 시험하신 거군요.”
“시험이 아니라, 보험이라고 해두자고. 우리는 친구 아닌가. 하하핫!”
박천중 회장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성진은 작게 미소 지었다.
“뭐. 저도 결과가 좋으니 기분은 좋습니다.”
그러면서 성진은 과연 박천중 회장이 숨겨둔 한 수가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가 감춰둔 한 수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언급하는 순간 불편한 감정이 포착됐다.
‘아마 상당한 대가를 필요로 하는 수인가 보군.’
아마 박천중 회장으로서도 어느 정도 부담이 있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주 괜찮아.”
말은 담담하고 표정은 밝았지만 어딘가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배반당한 노인의 표정이었다.
성진은 말을 아꼈다.
돌연 박천중 회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야. 내가 왜 자네를 믿었는지 결정적인 이유가 뭔지 아나?”
“글쎄요.”
“자네는 욕망에 흔들리는 사람 같지가 않더군.”
“욕망이요?”
“그래. 사실 사람은 다 욕심이 있겠지. 자네한테도 있을 거고. 그런데 대개는 그 욕심을 이룰 기회가 없어서 참고 사는 억눌린 뭔가가 있어. 그런데 자네한테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안 보였단 말이야.”
성진은 박천중 회장의 통찰력에 깊이 놀랐다.
“아, 글쎄요. 잘못 보신 거 같은데요.”
“아니. 내가 일개 개미 출신으로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겠나? 성공한 사람들 하는 말이, 사람 보는 재주로 성공했다고 하지? 나도 그래. 나는 사람 보는 재주밖에 없는 사람이야.”
박천중 회장은 성진을 지긋이 바라봤다.
“자네는 눈앞의 작은 욕심에 흔들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런 사람은 뭐든 이룰만한 재주가 있거나, 아니면 욕망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지. 그런데 자네는 전자야. 내 말이 틀린가?”
“하하…….”
박천중 회장의 연타에 성진은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결국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이런.’
정말로 일가를 이룬 거물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맞닥뜨리자 성진은 잠시나마 표정이 무너져버렸다.
그런 성진을 보면서 박천중 회장은 즐거워했다.
“분명 자네한테는 뭔가가 있는 거 같군.”
하지만 성진이 계속 당해주지는 않았다.
“음. 그럼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외부에서 회장님의 회사를 노리려던 사람들 말입니다. 왜 굳이 회장님이었을까요? 왜 그랬던 걸까요?”
박천중 회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게다가 말씀은 안 드렸는데, 개중에는 조폭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박천중 회장의 공격을 나섰던 세력은 외부에서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굳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불법적인 조직들과 연계된 움직임도 포착되었다.
“이쯤 되면, 이건 정말로 심상치 않은 건데 말입니다.”
“그런가? 흐음.”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면서 서로를 노려봤다.
박천중 회장과 성진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하하하핫!”
그러다 먼저 폭소를 터트린 박천중 회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건 비긴 걸로 해두지.”
“저도 그러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일을 교훈으로 삼아서 나중에 행동거지를 좀 더 조심하게. 나보다 감 좋은 사람들 이 나라에 널렸으니까.”
성진은 을 머금었다.
“예. 그렇게 하죠. 건강하신 거 같으니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가보게.”
성진이 나가고 혼자 남은 박천중 회장은 피식 웃었다.
“젊은 녀석이 재주만 좋은 줄 알았는데 감까지 좋구만.”
만날 때마다 유쾌한 느낌을 주는 친구였다.
자리에 누운 박천중 회장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혜영이가 저 녀석을 잘 구슬려야 할 텐데…….”
* * *
골프공이 호선을 그리며 쭉쭉 날아간다.
그 공이 홀 근처에 떨어지자 열렬한 박수의 파도가 펼쳐졌다.
“어르신 실력이 갈수록 느십니다.”
“그런가?”
“물론입니다 어르신.”
눈에 뻔히 보이는 아부.
주변의 경탄, 경외 속에서 노인은 익숙하게 분위기를 조율했다.
“됐네. 그쯤 해둬.”
골프채를 든 노인은 그저 느릿하게 한마디 했을 뿐이다.
바로 박수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노인은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체화하는 오연함이 있었다.
마치 어느 나라의 독재자처럼 그 주변을 호종하는 인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요즘에 말이야. 안 좋은 소식이 참 자주 들리더구만.”
노인의 한마디에 주변 인물들은 표정이 굳었다.
“죄송합니다.”
동시에 뱉는 읍소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실패는 병가지상사일세. 앞으로가 중요하지.”
질책은 나중이다.
노인의 말은 대책을 묻는 뜻이었다.
그러자 한 명이 나서서 말을 받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좀 더 과감한 수가 필요할 듯 합니다.”
“그런가? 허면 어찌 하려고?”
“쓸 만한 전문가를 투입하려고 합니다.”
“전문가라…….”
노인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남자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업계에서는 정말 몇 안 되는 전문가입니다. 이런 일에는 써볼만 합니다.”
“검증된 친구라면야…… 그리 하게. 다만.”
노인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일에 괜히 하청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군. 우리 아이들도 있는데 말이야.”
“가벼운 일입니다. 일일이 보검을 빼들면 번잡할 것 같아 버리는 칼을 던지려고 합니다.”
“그래. 알았네.”
노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은 소식 기대하지.”
노인은 골프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호종하던 인원들이 바싹 뒤따랐다.
다만 방금 전까지 노인과 대화를 나누던 자는 뒤꼍에 떨어져 휴대폰을 꺼냈다.
“나야. 지금 바로 ‘청소부’라는 그 친구 쓰도록 해.”
전화를 마친 남자는 다시 노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