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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42화 (42/185)
  • <-- 42 회: 2권 - 마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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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루토 투자신탁의 간부 회의가 소집됐다.

    사회이사진들은 물론, 지점장들까지 참석하는 대규모 정기 회의였다.

    그리고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은 회장인 박천중이 아닌, 전무 박찬기였다.

    그는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하고 대규모 회의실의 가운데에 앉았다.

    “오늘 회의 안건, 다들 아시겠습니다만…….”

    그가 입을 열자 회의실 전체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오늘의 간부회의 안건은 그만큼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에 빠진 간부들 사이에서 말석에 앉은 박혜영 부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본래 부장급에 불과한 그녀가 간부 회의에 출석할 수는 없었지만, 특별히 회장의 비서인데다, 그녀만의 자격이 있었기에 참석이 가능했다.

    그녀는 훈훈해 보이는 인상의 박찬기 전무를 지긋이 노려봤다.

    박찬기 전무가 말을 이었다.

    “바로 오늘 회의 안건은, 플루토 투자 신탁의 현 회장님이신 박천중 회장님의 해임입니다.”

    팽팽하게 늘어진 활시위가 툭 하고 끊어진 것처럼,

    박찬기 전무의 말이 떨어지자 장 내에 보이지 않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가운데에 앉은 박찬기 전무 양 옆으로 간부들의 표정이 엇갈렸다.

    한쪽은 침통한 표정.

    다른 한 쪽은 새로운 기회를 만난 도전자들의 표정.

    충성파와 반란자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전무님. 회장님께서 해임되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혜영이었다.

    일개 부장급에 불과한 그녀가 과감한 발언을 했지만 아무도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박 부장은 불만이 큰 모양이군요. 하긴 회장님의 친 따님이시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만..”

    박찬기 전무의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에 능글맞은 인상이 어렸다.

    한껏 느물거리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회사 지분의 과반수를 보유한 저와, 여러 이사님들의 뜻에 따라 오늘 박천중 회장님은 해임되실 겁니다.”

    그는 자신이 넘쳤다.

    오늘을 위해 수년을 애써왔다.

    자신만만한 박찬기 전무를 보고 혜영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박찬기 전무님. 아니, 사적으로는 제 먼 친척 삼촌이신 전무님께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시는군요.”

    박찬기 전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공석입니다. 사적인 인연이 왜 끼어드나?”

    “그 말 그대로 돌려드려야겠네요.”

    혜영은 주변을 돌아봤다.

    이사진들의 얼굴이 오늘따라 낯선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모두 외부의 누군가들이 지분을 인수해서 심어놓은 사람들이다.

    혜영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 자리에 다른 이사 분을 한 분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자리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성진이었다.

    “음?”

    박찬기 전무의 눈에 비웃음이 어렸다.

    “한성진 군이였나? 이 자리에는 어쩐 일이지?”

    회장이 그 짐작도 안 가는 괴벽으로 100억원을 갑자기 안겨줬던 젊은 풋내기.

    박찬기 전무가 그 정도로 기억하는 성진이 바로 간부 회의장에 서 있었다.

    “저는 오늘 박천중 회장님의 지분 권리를 위임받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음?”

    성진의 다음 말은 충격적이었다.

    “박찬기 전무님을 비롯해서 다른 사외 이사들의 불법적이고, 비 도덕적인 지분 인수 및, 박천중 회장님과 다른 이사님들의 지분을 불법적인 사기와 배임을 통해 강탈한 혐의로 박찬기 전무님의 해임을 선언합니다.”

    그러자 장 내에 혼란이 번졌다.

    간부들이 모두 웅성거렸다.

    모두의 얼굴에 불안이 피어나는 가운데 박찬기 전무가 탁상을 내려치며 고함을 질렀다.

    “무슨 헛소리야! 증거도 없이 감히 나를 공석에서 모욕한 죄가 가벼울 줄 알아?”

    “가볍지는 않겠죠. 그게 정말 거짓이라면요.”

    성진이 눈짓을 주자 곧 혜영이 자리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혜영의 부하 직원들이 다가와 간부들에게 서류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서류를 살피던 간부들에게서 곧 신음 섞인 경탄이 흘러나왔다.

    “하아…….”

    “아니, 세상에.”

    “어떻게 저런…….”

    충성파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반란자들이 침통함에 빠져들었다.

    박찬기 전무는 최후의 발악을 하듯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헛소리야! 감히 나를 모함해? 이 박찬기를? 이거 다 헛소리라고. 딱 봐도 다 거짓말인 거 몰라? 이거 다 거짓말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날뛰는 박찬기를 성진은 냉정한 어조로 몰아붙였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두 증거가 확실합니다. 그리고 설사 여기 계신 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셔도, 경찰이나 검찰 분들은 그렇게 생각 안할 겁니다.”

    성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 이제 슬슬 영장 받고 오실 거 같은데요?”

    “겨, 경찰이 온단 말이야?”

    “예.”

    성진은 싱긋 웃으며 박찬기 전무를 마주 노려봤다.

    박찬기 전무는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놈들이 감히!”

    “진정하세요.”

    흥분한 박찬기 전무가 자리를 박차고 다가왔다.

    “이 놈 자식, 네 놈이 감히!”

    핏기가 가신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보고 성진이 목소리를 깔고 일갈했다.

    “혹시 지금 완력으로 어찌 해보실 생각입니까?”

    그와 동시에 살기 어린 시선이 내뿜어졌다.

    살기.

    비록 속성으로 깨달은 진기의 운용이었지만 무도를 수양하며 얻은 자신감에 기본적으로 성진이 가지고 있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었다.

    “으읏……!”

    그 눈빛을 정면에서 받은 박찬기 전무는 분노로 이글거리던 기세는 금세 사라져버리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결국 포기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지막 발악을 포기하고 나니 그는 영락없이 무력해진 신세를 절감해야 했다.

    “으흐흑…….”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고 충성파는 승리의 감격을, 반대파들은 한숨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던 혜영이 성진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신만만해 하시더니 역시. 이 자료들은 다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글쎄요. 그건 비밀로 해두죠.”

    성진이 웃으며 입을 다물자 혜영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이 너무 많은 남자는 매력 없어요.”

    “적당한 비밀은 괜찮지 않을까요?”

    “흥.”

    혀를 살짝 내밀어 보인 혜영은 밝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성진도 따라 웃었다.

    상황이 좋게 해결되자 마음이 풀렸는지 혜영은 환한 미소를 짓더니 은근히 성진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와 말했다.

    “성진씨, 오늘 좀 더 멋있는 거 알아요?”

    “그렇습니까? 원래 일 잘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하던데요.”

    어려운 일을 해결했으니 좋은 인상을 줬을 거라 성진은 생각했다.

    “누가요?”

    “저희 아버지가요.”

    “흐응, 난 좀 다른데?”

    “어떻게 말입니까?”

    “그러니까……”

    혜영은 성진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귓불에 대고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섹시하다구요. 성진 씨가.”

    그러면서 작게 숨을 불어넣자 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열기가 느껴졌다.

    “음. 흠.”

    성진이 헛기침을 하는데 혜영은 깔깔 웃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놀리시는 거 아닙니다.”

    “어머, 제가 성진씨 놀리려고 이런 말을 할까요?”

    혜영은 다시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성진 씨가 원하면, 난 내 집 열쇠라도 주고 싶은 걸요?”

    그 말을 하는 혜영의 표정은 더 없이 진지했다.

    이쯤 되면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사람은 없다.

    ‘이거 참…….’

    성진도 신체 건장한 남자라서 기본적으로 여자를 싫어하지 않지만, 혜영을 이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듣고 나니 성진은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성진은 뒤로 살짝 물러나며 고개를 돌렸다.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아직 일 안 끝났으니까 빨리 다른 일 처리하죠.”

    성진이 자신을 등지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혜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쉽게 찍어서 넘어올 나무면 안 되긴 하지.’

    혜영은 다음 기회를 꾸준히 노리기로 다짐하면서 성진의 뒷모습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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