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32화 (32/185)

<-- 32 회: 2권 - 본격적인 수련 -->

다시 학교로 돌아온 성진은 이제 코앞에 다가온 기말고사 준비에 전념했다.

“우와. 진짜 넌 무슨 공부하는 기계 같다.”

나란히 도서관에 앉아서 옆자리에 내내 붙어 있는 성진을 보고 종연이 혀를 찼다.

“기계한테 괜히 말 시키지 마. 여기 도서관이다.”

“기계도 밥은 먹어야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팔을 잡아끄는 종연의 손길에 성진은 시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네. 그래. 가자.”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하얀 투피스를 차려입은 생머리의 여학생이 불쑥 나타났다.

희진이었다.

“오빠. 식사하러 가세요?”

“어. 희진아.”

“저도 같이 가요.”

“그래.”

구내식당으로 가는데 희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오빠 요즘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그래?”

“네. 지난번에 학교 빠진 뒤로 쭉 그런데요?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성진은 멋쩍게 웃었다.

내색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은연중 드러난 모양이었다.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걱정하지 마.”

“신경 쓰이는 거요?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되요?”

“으응. 뭐라 말할 건 아니야.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대답을 피하려는 성진을 보고 희진이 입술을 샐쭉거렸다.

“치이-. 오빠 은근히 비밀이 많은 거 알아요? 나 좀 섭섭할라 그러네.”

“미안하다, 희진아. 정말 별 거 아니야.”

희진을 달래면서 구내식당으로 향한 성진은 식사를 마치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야, 성진아. 좀 쉬엄쉬엄 놀면서 좀 하자.”

종연이 엄살을 피워댔지만 성진은 종연까지 억지로 도서관에 끌고 가며 공부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기말고사가 끝나자 2학기 수석과 차석자 명단이 과 게시판에 걸렸다.

“야아. 오오. 1학년 과 수석 한성진!”

종연의 감탄에 성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중간고사 때 비하면 성적 많이 올랐잖아 뭘.”

“그거야 너한테 끌려 다니면서 공부했으니 그런 거지. 그나저나 학기도 완전히 끝났는데 슬슬 여행 잠깐 안 갔다 올래? 야 내가 동아리 애들 몇 명 데리고…….”

“미안하다. 나 당분간 할 일이 좀 있어서.”

“할 일? 무슨 일?”

“응. 당분간 연락하기 힘들다. 일 끝내고 언제 찾아갈게.”

“에이. 오래 걸리는 일이야?”

“오래는 안 걸릴 거야.”

싱긋 웃은 성진은 걸음을 옮겼다.

“2학기 끝나면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아주 중요한 일.”

*   *   *

학기 종료와 함께 성진이 곧장 찾아간 곳은 바로 태합 종합유술 도장이었다.

오래간만에 찾아간 도장 모습은 여전했지만 변한 모습도 있었다.

바로 선화와 정훈이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성공했나 보네?’

웃으며 바라보는 성진의 눈길을 눈치 챘는지 정훈이 성진 쪽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어. 어쩐 일이야?”

일전의 일이 생각난 정훈은 성진을 대하기가 멋쩍은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관장님 뵈려구요. 관장님 안에 계세요?”

“어. 들어가 봐. 관장실에 계셔.”

“예. 아무튼 좋아져서 다행이네요.”

“으, 으응…….”

정훈이 쑥스러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뭐가 좋아져요?”

영문을 모르는 선화가 묻자 정훈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화씨.”

“흐응? 뭐에요. 나한테도 말 못해요? 빨리 말해 봐요. 빨리.”

“아이 참.”

다정하게 투닥거리는 연인의 모습이 된 두 사람을 보니 성진도 문득 미란과 희진 생각이 났다.

“나 참. 지금 상황에 무슨 생각을.”

고개를 저은 성진은 관장실 문으로 다가가 노크했다.

똑똑!

“관장님. 저 한성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뭐? 한성진 군?”

대번에 문이 벌컥 열리고 눈빛이 형형한 중년 사내가 튀어나왔다.

바로 태합 종합 유술 관장 표학선이었다.

문 앞에 성진이 서 있는 것을 본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갔다.

“이거 정말 오랜만이구만.”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관장님.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일이 바쁘다 보면 다 그런 거지. 그래 그간 잘 생각해보셨는가?”

일전에 정식 입문을 제안했던 관장이었다.

성진은 진지한 자세로 대답했다.

“실은 그 일 때문에 상의 드리러 왔습니다.”

“호오.”

관장은 안쪽으로 손짓했다.

“일단 들게나.”

“예.”

성진이 안에 들어오고 문을 닫은 관장은 말을 이어나갔다.

“일전에 자네가 내 제안에 별로 탐탁치 않아 하는 거 같더군.”

“예…….”

“미안해 할 거 거 없네. 사실 그때는 나도 아쉬운 마음이 많았지. 하지만 오늘 자네가 찾아온 걸 보니 내 기쁜 소식을 듣게 될 거 같은데. 맞나?”

“예, 관장님.”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장님의 문하에 정식으로 들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고개를 숙여 보이는 성진을 보고 관장은 팔짱을 꼈다.

“자네 이러는 걸 보니 상황이 바뀌었나 보군. 뭐 때문인가? 힘이 필요해서인가?”

“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성진은 인정했다.

창고에서 영식을 구출하면서 성진은 수십 명에게 둘러싸여 시퍼런 날이 번뜩이는 온갖 흉기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아무리 인공지능 팔찌의 도움이 받쳐주고, 강화된 육신이라 해도 무기를 든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 포위당하면 위험해진다.

인공지능 팔찌의 도움을 받아서 한껏 대담하게 맞섰다가 급소를 겨우 피해가며 흉기가 온 몸에 박히자 그것이 만용이라는 걸 깨달았다.

“힘이라! 무도의 본질은 자기수양에 있지만 힘을 추구하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 인정하네. 힘을 바라고 또한 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도인이 아니지. 하지만 내 한 가지 맹세는 받아둬야 할 거 같구만.”

“맹세요?”

“그래. 자네가 무슨 이유로 힘을 탐하는지는 몰라도 그 힘으로 행하는 일이 인간의 도리를 저버려서는 안 되네. 비인부전의 원칙 때문이지. 그것 하나만 맹세할 수 있겠나?”

“예. 맹세하겠습니다.”

성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말은 성진의 심정과 똑같았다.

사실 정말로 성진이 사악한 마음을 먹고 사람 목숨을 우습게 여기면서 마구잡이로 죽일 생각이라면 상대가 수백, 수천이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성진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두려웠다.

앞으로 모조리 무너뜨려야 할 상대들이 더 강한 위협을 해오면서 돌발적으로 덤벼들면 성진도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바로 그 도리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관장님이 가지신 힘이 필요합니다. 제가 상대해야 할 적들이 무척 악랄한 놈들입니다. 저는 도리를 저버리지 않아도 되는 보다 더 강한 힘으로 놈들을 상대하려고 합니다.”

뜬금없이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관장은 더 없이 진지하게 경청했다.

“음. 내가 전해줄 수 있는 힘이 그만한 위력을 지닐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 말을 들어보니 오늘 합당한 인연을 찾은 거 같군.”

“정말 제 말을 믿어주시는 겁니까?”

관장이 너무 쉽게 자신을 믿어주자 성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관장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 어리석은 소릴 하는구만. 믿지 않으면 찾아온 인연을 내치겠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의심을 하겠나? 어느 쪽이든 사제의 연을 맺을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짓이지. 설혹 자네가 사특한 마음을 품고 사탕발림으로 나를 현혹시키려 한들, 내가 의심을 한다고 피할 수 있겠나? 사람의 마음이 괴로운 까닭은 공연한 의심을 해서라네.”

완전히 자신을 믿어주는 관장을 보면서 성진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어허. 관장이라니.”

“예? 그럼…….”

“사부님이라고 부르게.”

“예, 하핫.”

“허허헛.”

소탈하게 웃어 보인 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여길 나가도록 하지.”

“아, 예.”

관장이 성진을 데리고 나선 곳은 바로 도장이 입주한 건물의 옥상이었다.

성진을 데리고 들어선 관장은 가슴을 펴고 선 채 하단전에 양 손을 모았다.

“오늘 드디어 태합유문이 전인을 찾아 가르침을 전하는 구만. 자. 제자 한성진은 내 가르침을 잘 듣게.”

“지, 지금요?”

뜬금없이 옥상으로 데리고 가르침을 들으라고 하다니.

성진은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그럼 저를 이대로 제자로 받아주시는 겁니까?”

“아, 그야 당연한 소리 아닌가?”

왜 당연한 걸 묻냐는 관장의 표정을 보고 성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하하…… 네.”

정식 입문이라길래 뭔가 거창한 의례가 있을 줄 알았는데 관장은 곧바로 전수를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모든 무도에는 의, 형, 식이 있다. 태합유문의 의는 난해하고 깊어 평생을 정진해야 할 의념이다. 그리고 형은 무도의 형태요, 식은 그 형에 다다르는 접근이다.”

관장의 아리송한 설명이 흘러나오자 성진은 바짝 긴장해서 경청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관장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건 내 사부님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사실 여기서 더욱 깊이 들어가면 골치가 아파지지. 오늘부터 내가 자네한테 전수해줄 것은 태합유문의 형과 식! 외면적인 부분이지만 바로 자네가 바라는 이 태합유문의 힘일세.”

“아! 예.”

아직 무슨 말인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한 성진을 보고 관장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거두절미하고, 내 사부님과 조사님들의 갖가지 첨언은 다소 미뤄두고, 일단은 속성으로 기술을 가르쳐주겠다는 거지. 하하하.”

분명한 파격이었다.

성진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신뢰와 배려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자네 사정이 있어 보이니 일단 이렇게 기술부터 전수하지만 우리 태합유문의 무도는 그 의념을 이해해야 깊이가 더욱 성숙해진다네. 다른 사람들한테는 나의 사부님이 그 기초를 창안하셨다고 둘러댔지만 우리 태합유문의 역사는 최소 일제 강점기 이전 대한제국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더군.”

“명심하겠습니다.”

사문의 내력과 깊이를 강조한 관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깊이있는 공부는 나중에 천천히 하고 일단은 자네한테 유용할만한 기술을 전하지. 자 이리 가까이 와 보게.”

성진이 가까이 다가가자 관장은 옥상 귀퉁이에 낮게 쌓여 있던 벽돌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잘 보게.”

벽돌이 허공으로 집어던져졌다.

그 순간 관장의 손가락이 벽돌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손가락 끝이 벽돌에 닿은 그 한순간.

자갈과 모래 가루가 바람에 휘날리고 벽돌이 땅에 떨어졌다.

성진이 떨어진 벽돌을 주워 살피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

벽돌 귀퉁이에 선명한 손가락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지점토에 손가락을 갖다 대서 꾹 눌러놓은 듯한 깨끗한 자국.

깜짝 놀란 성진이 관장을 돌아봤다.

관장이 웃으며 벽돌을 건네받았다.

“봤나? 소감이 어떠신가.”

“정말…… 뭐라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진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이것은 성진이 가지고 있던 모든 상식을 뒤흔들어 버리는 일이었다.

인공지능 팔찌도 성진의 내심에 동조했다.

- 불확정요소를 포착했습니다. 정확한 에너지 반응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인공지능 팔찌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

그 힘을 선보여 준 관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예는 공격을 행할 때 결국 타격을 중시하지. 적에게 얼마나 더 큰 피해를 줄 것인가. 이 문제를 고민하면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되지. 맨손으로 갑옷을 입은 적에게는 어떻게 타격을 가할 것인가. 그리고 다소 불편한 자세에서는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빠져 끊임없는 궁구를 시작하면 결국 저마다 특수한 타격법을 고안해내는 것이라네.”

“특수한 타격법이요?”

“그래. 흔히들 이를 발경이라 부르지.”

관장은 벽돌을 허공으로 높이 던져 올렸다.

벽돌이 허공에서 떨어져 관장의 눈앞을 지나려는 순간이었다.

“하압!”

기합과 동시에 관장의 양 손바닥이 벽돌을 찍어 눌렀다.

그러자 양 손바닥 사이로 모래와 자갈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벽돌은 양 손바닥 사이에 낀 채 잔뜩 금이 가 있었다.

그마저도 모래와 자갈을 흘리고 있었다.

거기에 관장이 조금 더 힘을 주자 완전히 부스러져 버린 벽돌이 형상을 잃고 돌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이것이 바로 우리 태합유문의 특별한 타격법, 태합유문의 발경일세.”

“아…….”

감탄한 눈으로 쳐다보는 성진을 보며 관장은 어깨를 활짝 폈다.

“자. 이제 우리 태합유문의 비기를 새로이 입문한 제자 한성진, 자네에게 전수하도록 하겠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