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회: 2권 - 구출 -->
“김경환씨.”
“예?”
대뜸 알려주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경환이 깜짝 놀랐다.
“당신도 가정이 있더군.”
경환의 기억을 훔쳐본 데서 나온 장면이었다.
심술궂은 두 딸과 욕쟁이 아내.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 소중한 가정의 존재.
“딸들한테 감사해. 원래는 사지 한 군데를 불구로 만들어볼까 했지만 그래도 자식들 먹여 살려야 하니까 봐주겠어. 대신…….”
성진은 경환의 손가락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끄아아악!”
부러진 게 분명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건 딱 영식이 몫이고.”
“으아아악.”
과연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는 경환의 뒷목을 곧바로 내려쳤다.
의식을 잃고 허물어지는 경환을 붙잡은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건 내가 내리는 벌이야. 나노 로봇을 주입해서 발기를 못하게 만들어버려.”
- 예, 마스터.
직접 경환의 입에 인공지능 팔찌를 갖다 댔다.
인공지능 팔찌의 나노로봇을 주입하는 일은 직접 입 같은 곳에 한참을 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오직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만 제대로 주입할 수 있었다.
직접 발기신경에 관여하게 된 나노로봇이 이제 경환의 쾌락을 송두리째 지워버릴 것이다.
당분간 남성의 기쁨을 잃게 될 경환을 짓궂은 눈빛으로 내려다 봤다.
“훑어본 기억에서는 허구헌날 유흥업소만 다니던데. 이제 한동안 가정밖에 모르는 남자가 되도록 하라고.”
너무 가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어서 미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너무 약하다 싶은 생각도 든다.
“어쩌겠어. 이런 쪽으로는 내가 너무 착한데.”
성진은 피식 웃으며 인공지능 팔찌에게 물었다.
어차피 조만간 경환을 비롯한 놈들 모두 더욱 제대로 된 응징을 가할 것이다.
어깨를 으쓱한 성진은 나머지 쓰러진 깡패들에게도 차례로 나노 로봇을 주입했다.
“영식이 얼굴도 봤지만 내 얼굴을 봤으니까. 가만 놔두면 안 되지.”
경환에게 주입한 나노 로봇은 발기신경에까지 작용하도록 양을 따로 더 넣었지만 다른 깡패들에게 주입한 것은 오직 두뇌 뉴런에 작용하는 나노 로봇이었다.
- 이제 영식 군과 마스터께 관련된 일에 대해 연상하는 즉시 극심한 두통, 어지럼증, 구토 등을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좋아. 완벽해.”
직접 내린 지시였지만 새삼 생각해보면 인공지능 팔찌의 기능은 경악할 수준이었다.
욕심이 난 성진은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혹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조작할 수는 없을까?”
- 인간의 기억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특정한 연상 작용을 방해하는 것이 한계입니다 마스터.
“흐음. 그렇군.”
결국 새로운 기억을 심거나 기억 자체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대충 상황을 마무리한 성진은 다른 놈들이 몰려 오기 전에 재빨리 움직였다.
“후. 이제 빨리 떠야지. 영식이부터 병원으로 데려가야겠다.”
성진은 밖에 주차되어 있던 조직폭력배들의 차량 중 아직 시동이 걸려 있는 차량을 인공지능 팔찌로 바로 해킹했다.
문이 열리자 성진은 바로 영식을 업고 차에 태웠다.
“아직은 괜찮은 것 같지?”
- 그렇습니다. 현재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놈들을 제압하자마자 비상 투입한 나노로봇들이 염증의 진행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었다.
“후. 다행이야.”
차량을 몰고 길을 빠져나오면서 성진은 못내 영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사실 누구보다도 영식이 소중했다면 당장 눈이 뒤집혀서 영식이부터 병원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내내 성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우리 식구들 건드릴 가능성은 없는 게 정말 다행이구나.”
여기까지 오면서 강박에 가깝게 불안했던 것은 영식에 대한 염려만이 아니었다.
성진의 존재에 대해 놈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성진 자신은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지만 혹시라도 성진의 가족들에게 닿는 마수는 감당하기 어렵다.
이제 막 여유롭게 살기 시작하신 부모님과, 곧 대학에 들어갈 여동생 성희.
성진이 내내 불안하게 생각했던 것은 가족들이 이제라도 속편하게 사는 삶에 조금이라도 먹구름이 드리워질까 걱정했던 것이다.
정말 미안하게도 영식은 결국 그 다음이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 놈이구나.”
백미러로 비치는 영식을 보면서 성진은 자신을 꾸짖었다.
영식은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말하지 않다가 갖은 꼴을 당했는데 성진은 자신의 가족들만을 우선했다.
“고맙다 영식아.”
적어도 영식이 보여준 신의와 믿음, 의리에 대해서만은 꼭 두고두고 보답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엑셀 페달을 밟은 성진의 차량이 빠르게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어떻게 된 꼴이야 이거!”
뱀대가리, 독사대갈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문식.
째진 눈에 창백한 피부, 새파란 입술을 가진 장신의 사내는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
눈물,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경환이 부러진 손가락을 달고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 한심한 몰골을 쳐다보던 문식은 주먹을 들어올렸다.
“이 악물어라.”
“헙!”
문식의 주먹질에 휘청거리며 나가 떨어진 경환이 바닥에 엎어졌다.
허둥지둥거리면서도 잽싸게 다시 일어선 경환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문식이 말했다.
“깨졌다길래 적당히 좀 맞고 말소리나 오가는 줄 알았지, 이렇게 개박살이 나? 이 자식아,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죄, 죄송합니다! 형님!”
몇 년차 선배 앞에 선 신입처럼 경환은 속수무책으로 그저 죄송합니다, 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너한테 쥐어준 애들이 아무리 떨거지밖에 안 되는 신입들이라도 쪽수가 삼십이야. 삼십! 말해. 몇 놈이나 끌고 왔길래 이 지경이 됐는지.”
“저, 그것이…… 윽.”
어떻게 당했는지를 말하려던 경환은 갑자기 머리를 쥐고 떨더니 바닥에 엎어져 뒹굴거렸다.
“뭐야, 이거? 너 지금 꾀병 부리냐? 죽으려고 작정했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문식이 뒹굴거리는 경환의 등판을 차버렸다.
하지만 경환은 문식이 원하는 반응 대신 침과 가래가 섞인 구토를 해댔다.
그것도 문식의 신발에 말이다.
“으앗! 더럽게 뭐 하는 짓이야 임마!”
경환을 차버린 문식은 그럼에도 계속 경련에 구토까지 해대는 경환을 보고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이거 진짜 맛이 가도 단단히 갔구만. 야. 사무실에서 송장 치우기 싫으니까 얘 병원 좀 보내.”
“예, 형님.”
부하들이 경환을 끌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문식은 혀를 끌끌 찼다.
“저건 대체 왜 저 모양이야?”
무슨 간질이라도 갑자기 도졌는가 생각한 문식은 대신 현장에 있던 다른 신입들을 불렀다.
“네가 그래도 얘네 중에서는 짬이 되지? 니가 말해봐라.”
개중 비교적 선배격인 녀석을 향해 묻자 떨며 대답을 시작했다.
“예 형님. 그때 어떻게 됐냐면…….”
말을 이어나가던 녀석은 돌연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을 굴렀다.
“아으으아! 으아아아.”
“뭐야, 이거. 이건 또 왜 이, 이래?”
놀란 문식이 깜짝 놀라서 뒤로 떨어졌다.
“이게 경환이 밑에 있다 옮았나. 뭐 하는 것들이야 대체. 아니지. 이것들 혹시 단체로 꾀병 아니야?”
열이 학 오른 문식은 무자비한 발길질로 녀석을 마구 구타했다.
하지만 구타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비명소리는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으아아악! 끄아악!”
결국 포기한 문식은 또 혀를 찼다.
“어이구. 쌍으로 난리구만. 이거 당장 치워.”
부하들이 녀석을 끌고 나가고 다른 신입들을 한꺼번에 데려왔다.
“야. 니들이 좀 말해봐라.”
하지만 잠시 뒤에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끄아아…… 하아아악!”
“흐악. 하으아아악!”
수 십 명이 머리를 감싸 쥐고 나뒹구는 모습이 기이하고 충격적이었다.
다만 열 받은 문식은 무자비한 구타로 응징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결국 화만 잔뜩 난 문식은 이를 북북 갈면서 핏대를 세웠다.
“아놔, 이거. 무슨 요즘은 간질도 집단으로 발작하냐? 떼로 난리네. 이것들 다 싸그리 치워버려!”
어이가 없어진 문식은 그저 답답해서 가슴을 쳐댈 뿐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 *
- 어떻게 된 일이야?
성진이 학교를 안 나온 것을 알고 종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 그냥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나중에 말해 줄께.”
- 오늘 강의 받을 교수님들한테는 연락 드렸냐?
“간밤에 문자 다 보냈다.”
-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잘 해결하고 와라.
“그래. 전화 줘서 고맙다 종연아.”
- 짜식 우리 사이에 당연한거지 뭘. 잘하고 와. 참, 희진이도 걱정하더라. 희진이한테 전화 좀 줘.
“그래. 알았어.”
- 그럼 끊는다.
“어. 가서 보자.”
- 그래.
종연의 전화가 끊어지고 성진은 다시 병동 데스크로 발길을 옮겼다.
경기도 바로 아래 충북에 있는 대학병원.
가까운 경기도 근처에 영식을 입원시키면 혹시라도 놈들이 금방 찾아낼 것 같아 일부러 밤을 새워 달려 바로 아래 충북지방의 대학병원에 찾아왔다.
“영식이 깨면 제 휴대폰으로 바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예. 환자분 깨면 바로 보호자분께 연락드리겠습니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성진은 다시 부탁인사를 한 뒤 병실로 향했다.
영식은 아직 눈을 감은 상태로 링겔을 잔뜩 꽂아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보자 영식아.”
아직 잠들어있는 영식의 손을 매만진 성진은 조용히 병실 문을 나섰다.
병원을 나선 성진은 곧바로 택시부터 잡았다.
중간에 타고 온 차는 놈들의 추적을 염려한 성진이 번호판만 떼어 도로변에 방치해놓고 왔기 때문이다.
결국 병원은 장시간 택시를 타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손님.”
기차역으로 가는 와중에 희진이 생각난 성진은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지금 시간이면 수업도 끝났겠지?”
전화를 걸자 희진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빠. 무슨 일이에요? 학교도 안 나오고,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겼거든. 동아리는 다음 주에 하자.”
- 동아리가 무슨 문제에요. 오빠는 괜찮은 거죠?
“응. 그럼.”
- 그럼 천천히 오세요. 나중에 봐요 오빠.
“어. 고마워, 희진아. 나중에 봐.”
전화를 끊은 성진은 희진의 새침한 척하던 모습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 택시는 도심을 가로질러서 기차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손님 다 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미터기에 찍힌 액수대로 요금을 건넨 성진은 바로 역으로 들어가 기차표를 끊었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
의자에 몸을 눕힌 성진은 눈을 감았다.
유난히 피곤이 몰려온 성진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