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회: 1권 - 갑작스런 태클 -->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든 대강당 안.
총장이 직접 격려문을 읽는 와중에 성진의 이름이 호명됐다.
“자. 우리 대학교의 자랑스러운 학생, 한성진 군. 앞으로 나오세요.”
좌중의 주목 속에서 강연대 위로 올라가는 성진은 머쓱한 기분이었다.
‘초중고 때도 강당에서 상 받은 적은 없었는데.’
더욱이 총장이 주는 상장은 성적 우수 같은 게 아닌 선행 표창이었다.
“금번 귀교 학교행사와 관련하여 일어난 불미스러운 상황에서, 한성진 학생은 교우애와 용기를 발휘하여 큰 불행을 막았습니다. 이에 본 총장은 전 교원들과 학생들을 대표하여 한성진 학생에게 이 감사 표창을 전달합니다.”
하나둘, 박수 소리가 울리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대강당 안을 가득 메운 박수 소리와 함께 좌중의 이목이 성진에게 쏠렸다.
예전 같았으면 쑥스러워 눈을 아래로 향할 법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담담하게 사람들의 눈빛을 받아냈다.
“감사합니다.”
표창장을 받아든 성진은 꾸벅 인사하고 조용히 강단을 내려왔다.
이후 총장이 축제와 관련했던 좋은 부분을 칭찬하고, 다가오는 기말고사와 취업에서 좋은 성취를 얻도록 격려사를 읊은 뒤 연설이 끝이 났다.
“오우. 우리 학교의 자랑스러운 학우, 한성진 학생이 아니신가.”
종연이 총장의 말투를 장난스럽게 흉내 내며 다가왔다.
“까불지 좀 마라.”
“에이. 표창도 받았으면서 왜 그래?”
“야. 받고 싶어서 받은 거 아니거든.”
쑥스러움에 성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그래. 학교에 소문이 쫙 났으니까 총장님도 이렇게 표창장까지 주신 거지.”
종연이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축제 당일 갑자기 폭행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는데 그 한복판에 성진이 있었다.
목격자도 많고 증인도 많아서 성진이 폭행을 했다는 둥 루머가 퍼졌지만 현장에 있던 여학생들이 제대로 증언을 해서 오히려 성진에 대한 나쁜 소문은 좋은 이미지로 반전되었다.
“덕분에 표창까지 받았으니 어쨌든 잘 됐다. 나도 걱정 많이 했거든.”
그래도 친구라고 종연도 마음을 쓴 모양이었다.
“고맙다.”
“고맙기는. 야, 그런데 진짜 인간적으로 총장님 연설은 정말 언제 들어도 지겹다. 그렇지 않냐?”
“하핫. 다 그런 거지 뭐. 시간 넉넉하게 남았으니까 일단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먹어야 살지.”
성진이 식권을 꺼내 흔들었다.
“그 점심 제가 사도 될까요?”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시죠?”
낯선 여자였다.
짧은 단발 컷에 하늘색 블라우스와 검정 스커트.
이지적인 눈매가 돋보이는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섭섭하다는 투로 반문했다.
“저 모르시겠어요? 얼마 전에 서로 학과랑 이름 알려줬었는데.”
“예? 아!”
성진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경찰서에서 봤던 인상이랑은 천지 차이네.’
바로 축제날 성폭행 위기에서 성진이 구해줬던 바로 그 여학생이었다.
“뭐야. 또 다른 여자 분이냐?”
종연이 강당 천장을 우러러 보며 탄식했다.
“아 왜 나한테는 딱 한 명을 안 보내주시고…….”
“종연아. 제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라.”
종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 성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신방과 2학년이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정혜주 양 맞죠?”
혜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제 이름도 기억하시죠?”
“모를 리가 있나요. 우리 학교에서는 영웅으로 소문났는데요.”
“에이 영웅이라뇨. 운이 좋았던 겁니다.”
“아니요. 영웅이 맞으시죠.”
저한테는 더더욱-. 혜주는 입술만 달싹이며 뒷말을 삼켰다.
“실례되지 않으면 친구 분도 같이 가요. 제가 신세진 게 훨씬 크지만 일단 점심 한 끼는 대접하고 싶어서요.”
혜주의 말에 성진은 종연을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종연은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우리 대학로 맛집은 제가 쫙 꿰고 있습니다. 어디로 안내할까요?”
“후훗. 재밌으신 분이네요.”
혜주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지적이고 차가운 인상에 갑자기 미소가 걸리자 오히려 그 미모가 돋보였다.
“정 그러면 간단한 데로 가죠.”
성진은 그러면서 종연에게 속삭였다.
“종연아. 절대 비싼 데 고르지 마라.”
“걱정 말게 친구. 나도 그 정도 개념은 있다네.”
고개를 끄덕인 종연은 앞장서 걸어 나갔다.
“자, 따라 오세요. 갑시다!”
“그럼 가실까요?”
성진이 혜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고개를 끄덕인 혜주는 성진의 눈을 마주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 * *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종연이 넙죽 인사를 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점심 먹은 다음에는 강의실에서 낮잠을 때려줘야 제 맛이라서요. 히힛.”
“이따가 보자.”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중에 또 봐요, 종연 씨.”
“예. 나중에 또 봐요.”
종연이 가버리자 성진이 혜주를 바라봤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요.”
“다행이네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 때 저를 최대한 보호해주셨던 거 정말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누구나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보다는 혜주 씨가 괜찮으신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저도 충격이 좀 컸어요. 사실 성진 씨한테 안 좋은 소문이 퍼진 것도 고소를 진행하다 늦게 알았거든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경황이 없으셨겠죠. 그래도 괜찮으신 거 같아서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도 장래에 기자를 꿈꾸는 사람이 이깟 일로 기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혜주는 씨익 웃어보였다.
“기자가 되시려구요?”
“네. 신방과에 다른 진로도 많이 있지만 저는 원래 기자가 되기 위해 들어온 거라서요.”
성진은 그 날 형사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혜주 씨는 훌륭한 기자가 되실 거 같네요.”
“정말요? 어떤 점에서요?”
“제가 알기로 보통 그런 일을 당한 여성분들은 두려움에 회피하시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혜주 씨는 당당하게 행동하시더군요.”
“말씀 감사해요. 사실 요즘 꿀꿀했는데 칭찬 들으니까 기분이 좋은데요?”
“하핫. 참 이만 일어날까요? 수업 들어가야 하니까.”
“예. 그래야죠. 참.”
“점심 잘 먹었습니다.”
“별 말씀을요.”
가게를 나와서 학교 정문 앞에 이르자 혜주가 머뭇거리며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저기. 나중에 또 연락드려도 될까요?”
성진은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럴까요?”
알고 지내도 괜찮다 싶은 사람이었다.
‘됨됨이가 나빠 보이진 않으니까.’
성진에게는 딱 그 정도 감상이었지만 번호를 건네받는 혜주의 양볼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성진 씨.”
“예. 오늘 밝은 모습 봐서 좋았습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보죠.”
인사를 나눈 성진은 학과 건물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오후 수업이 끝난 성진이 가방을 챙기는데 종연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성진아. 마이 베스트 프랜드여. 오늘 리포트를 좀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없겠는가?”
“아까 그 국제통상 사고사례 분석 말이야?”
“어! 야 그거 가지고 ppt 발표까지 시킨다는데 진짜 미치겠다.”
“개별 주제 발표니까 걸린 점수가 좀 세겠지.”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대안까지 제시하라는데 나 솔직히 감도 안 잡히거든.”
“그래. 같이 가서 준비하자.”
집으로 들어간 성진과 종연은 간단히 라면을 끓여먹고 리포트 작성에 착수했다.
한참 진행되는 동안 종연은 노트북으로 열심히 자료를 찾았지만 성진이 뽑아서 보여주는 자료량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야. 너 대체 어디서 이렇게 찾아오는 거냐? 자료 사이트 어디 가입했어?”
“가입은 무슨. 그냥 검색해서 찾은 거야.”
성진은 가볍게 대답했지만 종연이 보기에도 마구잡이로 뽑아 올린 자료들이 아니라 주제에 맞게 정리된 형태였다.
그렇게 사례 분석과 논문 정리 등은 인공지능 팔찌의 도움을 받으면 금방이었다.
키워드를 입력해서 관련된 내용 중심으로 요약한 문서들을 나열해주니 손쉽게 선별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도 일반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자료 사이트와는 격이 달랐다.
해외 대학 도서관이나 연구소 등에서 공개된 문서 중심으로 완벽하게 용어까지 번역이 된 자료들을 발췌할 수 있었다.
거의 대기업의 기획서에서나 쓰일 법한 자료들을 모은 성진은 관련 자료들을 블루투스 기능이 장착된 프린터로 인쇄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직 주제 안 정했으면 내가 생각한 것 중에서 하나 해볼래?”
자료를 보면서 성진은 몇 가지 주제가 떠올랐다.
일인당 한 가지 주제발표니 가장 마음에 드는 주제를 제외하고 종연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달게 받겠네, 친구.”
골치를 앓던 종연은 히죽거리면서 넙죽 받았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진행하고 있으려니 얼추 발표문의 골격이 완성되고 있었다.
“와. 정말 빠르다. 벌써 거의 완성인데? 고맙다, 진짜.”
발표준비는 자료 조사가 반이라는 말이 있다.
성진이 주제를 넘겨주면서 해당 주제에 맞춘 자료들을 정리해서 넘겨준 데다가 어려운 용어가 나오면 수시로 설명해주니 빠를 수밖에 없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밥 한 끼 사.”
“그래. 까짓 거 한 끼가 아니라 몇 끼라도 산다.”
학점 까다롭게 주기로 소문난 교수님이 내신 과제였다.
종연 자신이 보기에도 이만하면 흠 잡기 힘들 수준으로 보였다.
“나머지는 내 기숙사가서 할게. 오늘 고맙다, 성진아.”
“궁금한 거 있으면 전화로 물어봐. 난 늦게 자는 편이거든.”
“땡큐. 내일 보자.”
“잘 가라.”
가방을 챙긴 종연이 나가고 혼자 남은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로 증권 정보를 챙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