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25화 (25/185)

<-- 25 회: 1권 - 축제의 밤 -->

*   *   *

“아이고. 죽갔네…….”

박살 운운하던 기세는 사라지고 종연의 손에 공이 들리자마자 뺐기기 일쑤였다.

어느새 스코어는 15대 6으로 지고 있었다.

그나마 6점도 성진이 간신히 낸 득점이었다.

이제 30점을 먼저 따면 이기는 것이 룰.

“에휴휴휴…….”

그래도 미란과 희진은 열심히 응원을 거듭했다.

정확하게는 성진에게만.

“성진 오빠! 파이팅!”

“성진씨, 힘내요!”

그 모습을 본 농구부운들이 야릇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에이 여자들 데리고 응원까지 들으면서 이게 뭡니까. 좀 열심히 좀 해봐요.”

시비성 말투에 종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라고?”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성진이 나섰다.

“괜히 저런 말에 흥분하지 말자.”

“아 진짜 뭐 저런…….”

종연을 다독이면서도 성진도 은근히 기분 나쁜 것은 사실이었다.

인공지능 팔찌의 스캔 기능으로 상대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보였지만 기본적인 농구 기술이 젬병인 성진이 맞서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손발을 자유롭게 내뻗을 수 있는 격투와 구기 운동은 전혀 다른 까닭이었다.

‘진심으로 해볼까?’

정밀 스캔정보 가동.

감각 제한 해제.

인공지능 팔찌가 성진의 의사를 입력받은 즉시 새로운 변화가 펼쳐졌다.

본래 2단계 육체강화에 성공하면서 성진의 감각은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심하면 잠자는 와중에 천장의 벌레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때문에 평소에는 인공지능 팔찌가 일부러 정보량을 차단했다.

그 봉인을 이제 풀어놨다.

“이제부터는 좀 다를 겁니다.”

“엥? 글쎄. 말로만요?”

상대는 아직도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성진은 쏜살같이 달려 나가 공을 뺐었다.

상대가 움직이려 하는 반응, 호흡, 근육의 긴장, 신체의 움직임.

모두 한 가닥 리듬이 되어 물 흐르듯 성진에게 심상으로 전달되어 왔다.

상대의 감각이 그대로 느껴지자 사실상 마네킹들을 상대로 게임을 진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헛.”

“큭.”

연이어 성진의 드리블에 돌파당한 상대 선수들은 여유롭게 덩크슛을 넣는 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빠 멋있어요!”

“화이팅! 성진씨 멋져요.”

희진과 미란의 응원 소리가 더욱 커졌다.

농구부 동아리들은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쳇. 운이 좋았던 거지 뭐.”

애써 방금 전 성진의 공격을 폄하하려 드는 선수도 있었다.

성진은 속으로 웃었다.

‘이제부터는 계속 운이 좋을 텐데?’

바로 이어지는 경기에서도 성진의 독무대였다.

간간이 상대편도 득점슛을 넣었지만 성진은 그 배를 넣었다.

연이어 터지는 득점슛에 마침내 스코어가 19대 20으로 역전되자 상대편은 모두 얼굴 표정이 흙빛이 되었다.

“아 이런 씨.”

“이거 어쩌죠? 아무래도 우리가 이길 거 같은데.”

이제는 종연이 한껏 여유를 부려댔다.

“으으…….”

농구 동아리 부원들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농구 동아리의 길거리 농구 코너는 참가하고 싶어하는 팀이 참가금 15만원을 내고, 대신 이기면 30만원을 따 갔다.

사실 도박에 가까운 일이라 학생회가 매년 트집을 걸었지만 오랜 전통을 내세워 버티고 있었다.

거기에 농구 동아리에게 엄연히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길거리 농구기술로 잔뼈가 굵은 부원들 덕에 손해는 절대 본 적이 없었다.

“자. 정신 차려!”

“농구 동아리 파이팅!”

다시 전의를 불태우는 농구 동아리 일동.

하지만 결국 성진의 일방적인 독주에 게임은 패배로 끝이 나버렸다.

“후……. 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상금 30만원을 챙긴 성진을 종연과 영식이 경탄의 눈길로 바라봤다.

“우와. 이거 헹가래라도 쳐줘야겠는데?”

종연의 호들갑에 성진이 손을 저었다.

“절대 하지 마라. 아무튼 이걸로 술값이나 계산하자.”

“그래. 야, 그런데 너 진짜 못 하는 게 없네. 원래 농구 좀 했었냐?”

“그냥 뭐. 가끔 했지.”

감각을 직관적으로 읽어 들이는 2단계 육체의 감각능력과 인공지능 팔찌의 서포트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결국은 간발의 차다.

농구 기술이 뛰어난 건 절대 아니었다.

국가대표급 농구 선수가 있다면 성진이 아무리 대단한 감각을 지녀도 기술차이가 엄청나 결국 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굉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빠 진짜 멋졌어요.”

“농구 정말 잘하던데요?”

“별로 잘 하는 건 아닙니다.”

사실을 담은 말이었지만 게임 내내 성진 혼자 3명을 상대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오히려 겸손으로 비쳤다.

“에이 성진이 형이 다 하셨죠 뭐.”

영식도 성진을 추켜세웠다.

“다들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 운이 좋았으니까.”

성진이 손사래를 치는데 갑자기 어두운 밤하늘 한 구석이 환해졌다.

쉬이잉.

펑!

“야. 불꽃놀이 시작했다.”

종연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울긋불긋한 화려한 빛깔이 하늘을 환하게 수놓기 시작했다.

형형색색 다양한 불꽃놀이 모양들이 수많은 관중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와아.”

여자인 희진과 미란이 특히 불꽃놀이를 빠져들 듯 바라봤다.

영롱한 불빛이 여심의 낭만을 자극했다.

그녀들이 불꽃놀이를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돌린 시선 끝에 성진이 서 있었다.

아직은 알 듯 모를 듯 무심하기만 한 남자.

“하아…….”

“후우…….”

거의 동시에 한숨을 흘린 그녀들은 서로를 돌아봤다.

그 상황이 웃겨서 서로 웃음이 터졌다.

“후훗. 희진 씨 앞으로 누가 이길 진 몰라도 정정당당히 해봐요.”

“헤에. 미란 언니도 파이팅. 하지만 제가 이길 거예요.”

서로 약속하는 두 여인들은 그 와중에도 내내 성진을 의식하고 있었다.

*   *   *

“다들 조심해서 들어가요.”

“네에.”

“나중에 봐요, 성진 씨.”

너무 야심한 시각이 되기 전에 서둘러 여자들부터 돌려보낸 성진은 슬슬 돌아갈 준비를 했다.

“영식아. 난 지금 돌아갈 건데 넌 어쩔 거야?”

“형. 전 좀 더 놀다가 들어갈게요.”

아무래도 영식은 대학 축제의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 종연이랑 잘 놀고 조심해서 들어와.”

“예 형.”

“종연이, 너도 영식이 좀 잘 봐줘.”

“야. 이 엉님만 그저 믿어라.”

“그래 믿는다.”

인사를 나눈 성진은 정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는데 멀리 구석진 풀숲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보였다.

“응?”

문득 주변을 살펴보니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설마…….”

이상한 기분이 든 성진은 청각능력 제한을 풀어서 해당 방향에 귀 기울였다.

흐으으응…….

여성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헛짚었나…….’

커플들이 축제날 인적 드문 곳에서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굳이 엿듣는 취미는 없었다.

신경을 거두려는데 결정적인 한마디가 들려왔다.

“아오……. 겁나게 삼삼한 골뱅인데?”

“야, 급해. 빨리 좀 벗겨봐.”

젊은 남성 두 명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더욱이 대화의 내용은 위험한 수준이었다.

‘골뱅이라고?’

흔히들 술 취한 여성을 멋대로 얕잡아 부르는 은어가 골뱅이다.

군대에서 선임들의 대화를 듣다 알게 된 소리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저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 놈들 강간범이잖아?’

성진은 일단 현장 확인을 위해 잽싸게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기척을 죽인 성진은 뒤에 몰래 숨어 상황을 지켜봤다.

본래 성격 같았으면 이런 일에는 곧바로 달려들어 때려눕혔겠지만 최근 몇 가지 일을 겪으면서 성진은 신중해질 필요를 느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현행범들이구만.’

어려보이는 남자 둘이서 술에 잔뜩 취해 침까지 흘리는 여성을 눕혀놓고 옷을 뜯어내다시피 잡아당기고 있었다.

거친 손길로 마구 탐하려 드는 걸 보니 더는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찰칵.

성진이 꺼내든 휴대폰이 연속 비디오 촬영으로 상황을 찍어댔다.

별안간 촬영음과 함께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깜짝 놀란 녀석들 둘이 성진 쪽을 돌아봤다.

“뭐야, 이 자식은.”

“야, 너 뭐하는 놈이야.”

척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이걸로 증거 확보.’

성진은 그 모습까지 모조리 찍은 후 종료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챙겨 넣은 성진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두 놈을 바라봤다.

“내가 누구인지 왜 중요하냐? 니들이 쓰레기라는 게 중요하지.”

“뭐?”

두 놈은 슬쩍 주변을 지켜보더니 인적이 없는 것을 깨닫자 표정이 변했다.

“넌 오늘 진짜 잘못 걸렸다.”

그러면서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쥐었다.

얼굴 가득 독기가 서는 것이 성진은 놈이 어떤 짓을 할 요량인지 대강 눈치를 챘다.

“칼이냐?”

비웃은 성진은 한달음에 짓쳐들었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가 칼을 쥔 놈의 손아귀에 발차기를 때려 넣었다.

“끄악.”

칼을 놓치자마자 맞은 손을 감싸 쥔 녀석은 성진의 주먹질을 연달아 얻어맞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다른 한 놈은 엉거주춤 망설이더니 그대로 뒤로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놓칠 거 같니?”

얼마 도망가지도 못한 채로 성진의 날라차기에 등판을 얻어맞은 녀석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으아악. 사람 살려.”

고성이 쩌렁쩌렁 울리자 멀리서부터 몇몇이 몰려들어 왔다.

젊은 남녀 학생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눈으로 보이는 상황을 보고 다들 놀란 눈치였다.

“경찰에 신고부터 해.”

남자 학생 중 한 명이 소리치고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성진의 주변을 에워쌌다.

“오해한 모양인데 나는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신이 이 사람들 다 때려눕힌 거 아니에요?”

“흐음…….”

오해할만한 상황인 건 사실이었다.

상황을 판단한 성진은 일단 여학생들 몇몇을 지목했다.

“거기 여학우분들, 저기 정원나무쪽에 한번 가주세요.”

성진의 말에 여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볼 뿐이었다.

“제발 부탁합니다. 여학우분들이 가서 좀 살펴주실 게 있어요.”

거듭된 부탁에 몇몇 여학생들이 다가가자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야.”

“무슨 일이야?”

남학생들이 다가가려 하자 이번에는 도리어 여학생들이 막았다.

“야! 오지 마.”

“오면 안 돼요.”

이번에는 남학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진을 봤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일단 이 사람들 다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갑시다. 경찰이 오면 다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다른 곳으로 가자는 성진의 제안에 남학생들은 의심하는 기색이었지만 오히려 여학생들이 소리를 질렀다.

“야! 그 사람 말대로 해.”

“빨리 다른 데로 가줘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남학생들은 의문스러워하면서도 쓰러진 다른 남자들과 함께 성진을 다른 쪽으로 데려갔다.

잠시 후 경찰이 오자 성진은 경찰관 몇 명에게 귓속말을 한 다음 경찰관들이 있는 장소에서만 문제의 휴대폰 동영상을 틀어줬다.

“증거 자료로 찍은 영상입니다.”

“하! 이런.”

“나쁜 놈들이었구만.”

“이 정도면 증거가 되겠죠?”

“당연하죠. 물론입니다. 다만 참고조서를 써주셔야 하는데 죄송하지만 경찰서까지 같이 가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피해자 관련해서는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제가 다른 곳에 여학우들과 함께 뒀습니다. 피해자 신원이 절대 노출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혹시라도 학교 학생이라면 안 좋은 소문에 휩싸일 테니 학교  생활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성진이 다른 사람들 눈에 피해자가 보이지 않도록 신경 쓴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피해자를 돌보는 여학생들이 있는 방향을 손짓하자 경찰관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와중에 그런 부분까지 배려하시고 참 대단한 분이시네요.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조치하겠습니다.”

“예. 그럼 경찰서로 가죠.”

경찰관들이 여학생들에게 이끌려 다가오는 피해 여성을 부축했다.

성진도 그날 밤 경찰서에 가서 밤늦게 참고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제 막 술이 깨 얼떨떨하면서도 큰 위기를 겪었음을 깨달은 피해 여성은 어떻게든 침착해 지려고 애를 쓰는 눈치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절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옷매무새를 다듬은 여성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겁니다.”

“어쨌든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제가 다른 학생들한테 보이지 않도록 신경써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인걸요.”

“네에…….”

여학생은 성진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전 신방과 2학년 정혜주라고 해요. 나중에 이 빚은 꼭 갚겠습니다.”

“그렇게 부담 갖지 마세요. 전 통상무역과 1학년 한성진입니다. 나중에 인연이 되면 또 보죠.”

“네. 그럼 나중에 뵐게요.”

인사를 한 여성이 밖으로 나가는데 아직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앞에 앉은 형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도 이건 뭐 참고인께서 증거도 확보하셨고, 워낙 죄상이 명백하니까 속전속결로 해결될 거 같네요. 저 여성분 의지도 아주 단호하구요.”

“그런가요?”

“그럼요. 보통 성범죄를 당한 여성분들은 고소해서 처벌까지 하려는 생각을 잘 안 하세요. 이 성범죄라는 게 친고죄거든요. 친고죄가 뭔지 아시죠?”

“예 압니다. 피해자가 직접 고발해야 처벌이 되죠.”

“그래서 유야무야 훈방되는 경우가 꽤 되고 그러죠. 그런데 저 여성분은 이런 일을 당했는데 가족도 따로 안 부르고 고소장까지 혼자 망설임 없이 작성하시는 거 보니까 아주 단호한 편이시라는 거죠.”

“예에.”

“아무튼 그 와중에 현장을 촬영할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잘 하신 겁니다. 그런 놈들은 증거가 없으면 아주 뻔뻔하게 굴거든요. 피해자도 의식 불명이었으니까 촬영을 안 하셨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성진을 칭찬한 형사는 직접 차비까지 쥐어주었다.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용감한 시민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택시타고 편히 가세요.”

“예. 그럼 수고하세요.”

경찰서를 나온 성진이 시간을 보니 시간이 무려 12시 정각이었다.

“아이고. 집에 들어가면 새벽이구나.”

한숨을 쉰 성진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록 밤늦은 시간까지 조사를 받는 불편은 있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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