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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23화 (23/185)
  • <-- 23 회: 1권 - 축제의 밤 -->

    마치 염라대왕의 판결 같은 준엄함으로.

    입꼬리를 스윽 올린 교수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자. 시간 다 됐다.”

    그 말에 모든 학생들이 절망 섞인 음색으로 답했다.

    “으아아아아…….”

    “교수님. 제발 시간 좀 더 주세요.”

    “아악 교수님. 저 두 문제 남았습니다. 제발…….”

    하지만 교수님은 자비를 모르셨다.

    “당장 뒤에서 시험지 넘겨. 조교는 수 쓰는 놈 체크하고.”

    “예. 교수님.”

    20대 후반의 여조교가 일일이 시험지를 빼서 앞으로 넘기도록 했다.

    학생들은 속수무책으로 뒤에서, 다시 앞으로 시험지를 차곡차곡 걷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

    아쉬움과 탄식이 뒤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그렇게 중간고사 마지막 시험이 끝이나 버렸다.

    “휘유유. 나 완전 망했다.”

    종연이 죽을상을 한 채로 성진을 바라봤다.

    “그렇게 망했냐? 내가 준 요약본 외우지 그랬어? 거진 반 이상은 나왔잖아.”

    성진이 살짝 질책하는 투로 말하자 종연이 웃는지 우는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게……. 어젯밤에 기숙사 방 애들하고 술을 마시느라…….”

    “허.”

    기가 막힌 성진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내가 아는 애들 중에 시험 전날 술 마시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다.”

    “야. 정말 상황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야. 방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은데 어떻게 그걸 빠지니.”

    “변명은 참.”

    실소를 터트린 성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됐고 기말고사나 잘 봐. 기말고사도 순식간에 다가오는 거 알지?”

    “에이 짜식이. 복학해서 만나니까 왜 이런 범생이 소리만 하는지 몰라.”

    종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강의실 문을 나서는데 복도에 대자보가 눈에 띄었다.

    성진의 시선을 따라간 종연이 아는 척을 했다.

    “아 이거. 야, 이번에 우리 학교축제 하잖아. 유명한 가수들도 부르고 나름 크게 한다더라.”

    “그래?”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났으니 슬슬 축제시즌이기는 하다.

    종연이 포스터를 쓱 내려 보더니 기타 치는 폼을 잡았다.

    “나도 축제 한번 나가 볼까나.”

    “왜? 뭐 할 만한 거 있어?”

    “글쎄? 그러고 보니까 마땅한 게 없네.”

    “실없기는…….”

    피식 웃은 성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옆을 종연이 바짝 따라왔다.

    “성진아. 너 이제 시험도 끝났는데 뭐하냐.”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게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었다.

    대충 눈치를 차린 성진은 적당히 대꾸했다.

    “글쎄다. 뭐 들어가서 책이나 볼까?”

    “책? 책이라고? 야. 중간고사 끝난 날에 책이라고?”

    종연은 한껏 과장을 떨어댔다.

    “아아, 내 이 절친이 시험 끝난 날에 책을 본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통탄할 노릇은 또 뭐냐.”

    “통탄할 노릇이지. 이 화창한 가을날에! 햐. 책이라니. 애가 낭만이 없어.”

    까불기 시작하는 종연을 슬슬 눌러줘야 할 참이었다.

    성진은 적당한 말을 물색했다.

    “너는 전에 희진이가 미팅 주선해 준다더니 여친은 생겼냐?”

    “아 그거…….”

    종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바로 깨갱하는 것이 결과가 신통찮은 모양이다.

    “그러면 그렇지.”

    “……그건 내가 할 말이 없다.”

    혀를 차는 성진을 보고도 종연은 별다른 대꾸를 못 했다.

    기분을 달래줄 겸 성진이 제안을 던졌다.

    “집 가서 치킨에 맥주라도 할래? 내가 살게.”

    “치킨에 맥주! 그거 좋지.”

    금방 희희낙락해진 종연이 앞장서 걸었다.

    그때 새침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머, 오빠네 집 가는 거예요? 자취방?”

    “응?”

    소리가 난 곳을 보니 하얀 박스티에 청색 치마를 입은 희진이 예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오빠네 집 가는 거면 저도 따라가서 구경하면 안 돼요?”

    “어? 좋지. 야, 나야 대환영이다.”

    나서기 좋아하는 종연은 곧바로 환대했다.

    성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우리야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남자 둘이 방에서 술 마시러 가는 건데 재미가 있겠어?”

    “어머 그럼요. 저 술 잘 못 마시기는 해도, 술 마시면서 얘기하는 건 나름 좋아해요.”

    희진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라.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특히 이 종연이 녀석은 음흉 그 자체거든.”

    “야, 넌 또 왜 나를 가지고 그러냐?”

    “괜찮아요. 종연 오빠가 좀 가벼워 보이기는 해도 나쁜 짓을 할 만큼 불한당은 아닌걸요.”

    그 말을 한 희진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종연이 그런 희진을 지긋이 노려봤다.

    “희진이 너 지금 그거 칭찬 아니지?”

    “호호. 글쎄요?”

    “하핫.”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성진도 모처럼 크게 웃었다.

    그렇게 셋이서 얘기를 나누며 걷길 잠시 후.

    지하철을 갈아타고 드디어 성진이 살고 있는 동네에 도착한 종연과 희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야 어디야? 여긴 하숙방 놓는 데가 없잖아.”

    “그러게요. 여긴 하숙집 같은 곳이 없는데요? 선배 정말 이 동네 사세요?”

    “왜? 눈앞에 있잖아.”

    성진이 손으로 가리킨 건물.

    그것은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대형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헉.”

    종연이 깜짝 놀라 바라봤다.

    “성진아 너 정말 여기 사냐?

    “응. 들어가자.”

    담담히 말하는 성진과 달리 종연과 희진은 놀란 눈치였다.

    이제 대학교 1학년이라지만 세상 물정은 아는 나이다.

    경기도 중심 상권에 있는 이런 오피스텔이라면 이 나이 또래 학생이 쉽게 묵을 만한 집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간 용석은 바로 질문부터 던졌다.

    “야, 여기 어떻게 구한 거야? 부모님이 구해주셨어?”

    “그냥 뭐. 어쩌다 보니.”

    대충 둘러대는 성진을 힐끗 노려본 종연은 희진을 다그쳤다.

    “야 희진아. 너도 궁금하잖아. 빨리 물어봐.”

    하지만 희진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니에요. 오빠가 말하고 싶었다면 스스로 말해줬겠죠. 전 오빠가 말하는 거 아니면 굳이 질문하고 싶지 않아요.”

    “에이 뭐야. 나만 나쁜 놈이네.”

    종연이 투덜거리자 성진이 가볍게 면박을 줬다.

    “그래. 너만 나쁜 놈 맞아. 그리고 뭐 대단한 비밀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를 전세로 얻게 됐어. 그게 다야.”

    “그래? 햐. 부모님이 좀 여유가 있으신 모양이네.”

    “거기까지 해라 종연아. 일단 치킨이나 시켜. 먹고 싶은 걸로.”

    “그래! 물주님의 명령이라면야.”

    종연이 전화로 치킨부터 주문했다.

    희진은 주변을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오빠 혼자 사는 거예요, 이 집?”

    “아. 나 말고 아는 동생이랑 같이 살아.”

    “동생이요?”

    “응. 친한 동생인데 곧 올 때가…….”

    곧바로 딩동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나 본데? 잠깐 기다려요. 나갈게요.”

    성진이 잽싸게 나가 현관 밖을 살피자 예상대로 영식이 서 있었다.

    “영식아. 어서 와라.”

    현관문을 열어주자 영식이 웃으며 말했다.

    “형. 미란이 누나도 같이 왔어요.”

    “뭐?”

    곧바로 영식의 뒤에 서 있던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성진 씨.”

    “아. 예.”

    깜짝 놀란 성진이 인사하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거, 혹시 희진이랑…….’

    아니나 다를까 희진이 뒤에서 걸어 나왔다.

    “누구에요, 오빠?”

    “엉? 누구세요?”

    어리둥절하게 묻는 영식을 제쳐두고 미란이 나섰다.

    “누구죠? 성진 씨.”

    그 말에 반응을 보인 건 희진이었다.

    그녀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성진 씨?”

    ‘어라…….’

    성진은 갑자기 잔뜩 날이 선 두 여자의 기세 사이에 끼어버렸다.

    ‘이게 대체 뭐야.’

    미란과 희진은 이제 서로를 살피며 탐색전을 벌이다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대체 누구에요? 성진 씨.”

    “누구에요? 오빠.”

    말이 맞부딪히자 다시 서로를 바라본다.

    성진은 이상하게 흐르는 분위기에 한숨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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