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20화 (20/185)

<-- 20 회: 1권 - 육체의 한계 -->

“아오. 지겨워 죽겄다, 진짜.”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투덜거린 종연이 책상에 엎어졌다.

“엄살 피우지 말고, 오늘 스터디 모이기로 한 날이잖아.”

희진과 첫 대면한 그 날 이후 종연은 본격적으로 동아리를 만든다고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인원이 부족해서 정식 등록은 실패하나 싶었는데, 희진이 친구들을 모아오고, 영식도 몇몇 남학생들을 데려왔다.

“아. 그렇지 참. 우리 어여쁜 여학우들을 만나러 가야쥐.”

잽싸게 가방을 챙겨드는 종연을 보고 성진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네가 주도해서 만든 동아리인데 기왕이면 열심히 해.”

“그럼 그럼. 열심히 청춘사업을 진행해야지.”

“진짜 본심은 그거였구만.”

“헤헷.”

가방을 챙겨든 성진은 종연과 동아리 방이 있는 건물로 이동했다.

동아리 방을 여니 제법 많은 남녀 학생들이 둥근 책상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빠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형.”

희진과 다른 후배들이 인사했다.

“어째 전보다 수가 늘어난 거 같네?”

시작할 때는 10여 명이었는데 이제는 대략 그 두 배는 늘어난 숫자였다.

특히 여학생들이 많아졌다.

“저희가 애들한테 추천했어요. 오빠 영어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했더니 다들 모여든 거 있죠.”

희진이 웃으며 말했다.

“어. 그랬어? 그렇게 대단한 실력은 아닌데.”

“에이 대단하지 않다뇨. 진짜 형 정도면 대단한 실력이세요.”

쑥스러워하는 성진에게 다른 후배들이 앞 다퉈 엄지를 내밀었다.

실제로 성진에게 몇 번씩 영어 강의를 받아본 후배들이라 성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오늘도 한번 시작해볼까?”

“네에-.”

다들 또렷한 눈빛으로 성진이 프린트해온 종이들을 받았다.

동아리는 종연이 만들었지만 사실상 구체적인 강의나 진행은 성진이 맡게 된 지 한참이었다.

이제는 사실상 동아리 회장이자 전임 강사가 되어버린 성진은 한 자 한 자 끊어가며 천천히 영어 지문을 읽어 내려갔다.

“자 이제 다시 각자 해석해보고, 의문 나는 점 있으면 질문하도록 해.”

“저요, 오빠.”

희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어. 희진아.”

희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프린트를 직접 성진에게 들고 다가왔다.

“오빠. 여기 이 부분은 시제가 섞여 있어서요. 이런 건 어떻게 해석해요?”

“어. 이건 과거 시제하고, 현재 시제가 섞여 있는 지문이야. 그러니까 해석을 하자면, 미스트리스 에이미는…….”

단숨에 해석을 해주는 성진은 희진이 헷갈려 할 만한 부분도 조목조목 쉽게 풀이해줬다.

그런 성진의 모습을 지켜본 여학생들이 조그맣게 박수를 쳤다.

“오빠 멋있어요.”

남학생 중 한 명도 탄성을 질렀다.

“성진이 형 진짜 영어 잘 하시네요. 어떻게 이렇게 잘하세요? 어학연수 갔다 오신 거죠?”

“아니야. 난 외국으로 가본 적이 없어.”

“와아. 그러면 진짜 대단하시네요. 하긴 외국 간다고 다 영어 잘하는 건 아니더라구요.”

그렇게 저마다 성진의 영어실력에 감탄한 동아리 후배들이었다.

한참 성진이 영어 지도를 해주다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시간 다 됐네. 다음 주에 오늘 한 거 간단히 복습할 테니까 조금씩 공부해 와.”

“네에.”

후배들이 저마다 가방을 챙겨서 나가고 성진과 종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데 희진이 끝까지 남더니 성진에게 다가왔다.

“오빠. 이제 뭐하세요?”

“나야 뭐. 자취방 가서 공부해야지.”

“역시 성실하시네요, 오빠.”

은근슬쩍 성진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희진을 보고 종연이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야 희진아. 너 어째 좀…….”

“오빠. 소개팅하고 싶다고 하셨죠?”

희진이 대뜸 소개팅 얘기를 꺼내자 종연의 표정이 급변했다.

“소, 소개팅?”

“그거 제가 주선해드릴 수도 있어요.”

그러면서 종연을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손짓하는데 종연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오, 오오. 그래. 알았다. 응. 성진아. 희진이하고 동아리 방 정리 좀만 해줘. 내가 급한 일이 좀 있어서.”

“야, 급한 일은 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이없어진 성진이 묻는데 종연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가방을 챙겨 달아나버렸다.

“어머 종연이 오빠가 많이 급한가 봐요.‘

희진이 웃으며 뒷머리를 쓸어 넘겼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그냥 뺀질대는 거 같은데.”

성진이 희진을 지긋이 바라보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빨리 정리하고 나가야지.”

성진이 마저 정리를 서두르자 희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

둘이 정리를 마저 끝내고 나온 뒤, 성진이 동아리 방문을 열쇠로 잠갔다.

“정리하느라 수고했어.”

성진의 말에 희진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오빠 그럼, 저 교문 나가는 데까지만 바래다주세요.”

“그래? 그러지 뭐.”

그렇게 둘이서 나란히 걷는데 희진이 말을 걸어왔다.

“오빠, 영어 정말 잘 하시던데요? 진짜 애들이 다 오빠 영어실력에 완전히 껌뻑 죽었어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어머 아니에요. 저도 사실 대학 들어오기 전에 영어학원도 다녀보고, 나름 동영상 강의도 들어봤는데 오빠만큼 쉽게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던데요.”

“칭찬 고맙다.”

“그냥 칭찬하는 거 아니에요. 오빠, 사실…….”

말끝을 흐리던 희진은 머뭇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좀 멋있는 거 같아요.”

“응?”

놀라 반문한 성진은 당황해서 뭐라 말을 잇기가 어색했다.

그 틈을 희진이 연이어 찔러 들어왔다.

“오빠. 내일 주말에 할 일 없죠?”

“어? 어.”

대답한 순간 성진은 묘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거?’

“잘 됐네요. 오빠 그럼 주말에 저랑 놀러가요.”

“혹시 그거 데이트 하자는 거니?”

성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희진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손을 저었다.

“어머 데이트라뇨. 전 그냥, 음……. 오빠랑 놀러가고 싶다는 건데요? 그냥 순수한 의미로요.”

말은 변명하느라 바빴지만 이미 얼굴이 붉어져서 설득력이 별로 없었다.

“하핫. 그래?”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번의 미란에게도 그랬지만 성진은 자신한테 주는 호감을 무턱대고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데이트 한다고 꼭 사귀는 건 아니니까.’

아직 특별히 좋아하는 여자도 없고, 이성경험이 부족한 만큼 가볍게 만나서 같이 노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만나봐야 어떤 여자를 좋아할지 알 게 아닌가.

“좋아. 그럼 내일 토요일 오전 괜찮겠어?”

“정말요?”

희진이 눈을 빛냈다.

“음……. 그럼 내일 우리 학교 정문 앞에서 봐요.”

“그래.”

“시간은……. 오전 11시쯤?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아.”

“헤헤. 잘됐다. 그럼 만나서 같이 점심 먹어요.”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마침 학교 정문이 가까워졌다.

희진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손을 흔들었다.

“오빠, 내일 봐요.”

“잘 들어가. 내일 보자.”

성진은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뒤돌아서서 걸어가는데 작은 미소가 입에 걸렸다.

‘데이트라…….’

생각해 보니 데이트 코스는 남자가 보통 짜둔다고 하던가?

‘있지. 남녀가 같이 즐길만한 데이트 코스 좀 검색해줘.’

인공지능 팔찌의 정보 수집력이 생각난 성진은 바로 부탁했다.

-예. 알겠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결과를 출력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그렇게 정보 수집을 인공지능 팔찌에게 맡긴 성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희진과 놀러 다닐 내일을 기대하면서.

*   *   *

다음날 오전 점심 무렵.

은색 G7 대형승용차 한 대가 추원대학교 정문 앞으로 다가갔다.

바로 성진이 몰고 온 차량이었다.

차를 몰고 잠시 멈춰 세운 성진이 정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희진에게 소리쳤다.

“희진아. 여기야.”

“어? 오빠.”

하얀 투피스 차림에 생머리를 늘어뜨린 희진은 누가 봐도 청순한 여대생의 모습이었다.

발목이 드러나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면서 다가온 희진이 성진과 차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이거 오빠 차 맞아요?”

“그야 당연하지.”

“에에. 이거 딱 봐도 오빠 아버지 차인 거 같은데.”

“아니야. 속고만 살았니? 이거 오빠 차 맞아.”

“제가 속는 셈 치죠 뭐. 아무튼 고마워요.”

성진은 말없이 웃으며 옆자리 문을 열어줬다.

희진이 올라타고 차를 출발시켰다.

“밥부터 먹어야겠지? 지금 11시니까.”

“그래요. 오빠 잘 아는 집 있어요?”

“음……. 잘 아는 집이라.”

순간 성진 자신의 가게로 데려갈까 싶었지만 첫 데이트부터 부모님을 만나면 부담스러운 일이다 싶어 제쳐뒀다.

“맛있다고 소문난 레스토랑이 있어. 가보자.”

“네. 기대할게요.”

성진이 희진을 데려간 곳은 프랑스 음식 전문점이었다.

가벼운 점심용 메뉴를 주문하니 샐러드, 빵, 버섯 스테이크 등이 나왔다.

“맛은 괜찮아?”

“네. 여기 맛있는데요.”

“그래?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네.”

말은 그래도 인공지능 팔찌가 검색한 인기 맛집 중에서 특히 젊은 여성들한테 반응이 좋은 곳을 고른 결과였다.

밥을 먹고 나오자 희진이 말했다.

“오빠. 한강 쪽에 가보지 않을래요?”

“한강?”

“네. 거기가 운치도 있고 좋을 거 같은데요.”

“그래. 그러자.”

본래 따로 준비한 코스가 있었지만 성진은 희진의 의견을 최대한 따라줄 마음이었다.

한강 쪽으로 차를 몰고 가니 이제 늦여름 가을인데도 대낮부터 한강변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기 오리배네요.”

희진이 손가락으로 한강에 떠다니는 오리배를 가리켰다.

“우리도 오리배 타요. 오빠.”

“그럴까?”

오리배 선착장으로 가니 모터와 수동식 발이 달린 오리배가 따로 있었다.

“수동식으로 주세요.”

요금을 내려는데 희진이 먼저 지갑을 꺼냈다.

“잠깐만요 오빠. 밥은 제가 얻어먹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다 낼게요.”

“응?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미안해서요.”

혀를 낼름 내민 희진이 지폐를 꺼내 계산을 했다.

성진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희진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우리 성희가 이런 걸 반이라도 따라가야 할 텐데.’

기회만 되면 오빠를 부려먹으려고만 드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생각난 성진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쿡.”

“응? 오빠, 왜 그래요?”

“아니야 아무것도. 어서 타자.”

“그래요.”

안내 받은 오리배를 탄 성진이 페달을 밟자 제법 쭉쭉 잘 미끄러져 나갔다.

“분위기 좋네요.”

“그래.”

아직 따뜻한 초가을이라 가끔씩 부는 바람도 쌀쌀하기보다 기분 좋게 선선한 느낌이었다.

주변에 오리배를 탄 가족들, 젊은 연인들이 서로 적당히 떨어져 담소를 나누는 분위기가 제법 운치가 있었다.

“오빠. 저 사실 오빠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거 아세요?”

희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성진은 난감한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모르지는 않지만…….’

여기까지 와놓고 희진의 마음을 눈치 못 챈다면 그건 대인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일 것이다.

‘고백하려고 여길 오자고 한 거구나.’

성진은 잠시 고민한 후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희진아. 오빠는 아직 누구를 진지하게 교제상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

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오빠 그러면 아직 애인 같은 건 없는 거죠?”

“그렇지.”

“그럼 됐어요. 제가 오빠 좋아한다는 거 아셨으니까 이제부터는 어찌됐든 저를 의식하실 거잖아요?”

“흐음…….”

성진은 그런 희진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너한테 아무것도 약속을 못 해줘. 널 꼭 좋아하겠다는 약속도 못 해주고, 나중에라도 내가 다른 사람을 사귈 수도 있는걸.”

“상관없어요.”

조금 얼굴이 붉어진 희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오빠 맘이죠. 제가 오빠 좋아하는 건 제 맘이구요. 어떻게 사람 마음을 강요하겠어요.”

성진은 순간 희진이 조금 더 예뻐 보였다.

‘당찬 면이 있구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성진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맙지.”

“그럼 오빠. 이제 다른 얘기해요, 우리.”

그렇게 얘기가 일단락되고 다른 화제들로 조금씩 대화를 이어나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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