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9화 (19/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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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 집이 이렇게 넓어요?”

    오피스텔로 들어온 미란은 깜짝 놀랐다.

    자취방이라 하기에 하숙집 비슷한 곳일 줄 알았는데 딱 봐도 수십 평은 될 만한 오피스텔이었다.

    성진이 웃으며 말했다.

    “예. 운이 좋아서 마련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종종 놀러오세요.”

    “그래도 될까 모르겠네요.”

    살짝 입을 가려 웃는 미란은 새침을 땠지만 속으로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 진짜 좋다.’

    37평짜리 오피스텔이 평범한 20대가 지낼만한 거처는 아니었다.

    “넓어서 좋기는 한데 청소하기 힘들었어, 누나.”

    영식이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들어오자마자 걸레를 쥐고 성진과 함께 집안 곳곳의 먼지를 닦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얘는? 네가 그런 소리 할 상황이니? 집값도 안 내고 공짜로 살면서.”

    “헤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오늘 저녁은 제가 지을게요. 반찬도 넉넉히 해왔어요.”

    가져온 보따리를 풀자 반찬통이 쏟아져 나왔다.

    “우와아. 이게 웬 진수성찬이야?”

    “이거, 제가 수고비라도 드려야겠는데요.”

    “에이 수고비는요. 그냥 동생한테 누나가 반찬해준 거라고 생각하세요. 알았지, 영식아?”

    눈웃음을 찡긋하는 미란에게 영식이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번번이 감사합니다. 제가 언제, 거하게 한번 쏘겠습니다.”

    “그 약속 잊지 않기에요?”

    미란이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성진이 살짝 쑥스러워하다가 새끼손가락을 마주 내밀었다.

    “예. 약속입니다.”

    “우와아. 이거 왠지 분위기가…….”

    까불대던 영식에게 미란의 가차 없는 손길이 떨어졌다.

    “어머 얘는 참.”

    “컥.”

    휘청대는 영식을 뒤로 하고 부엌으로 들어간 미란은 화려한 요리 솜씨를 뽐내더니 금방 찌개며 갖가지 전, 부침개를 부쳐 내왔다.

    금방 저녁상이 한상 차려진 걸 보고 성진과 영식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야 역시. 누나 최고다.”

    미란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래 봬도 식당에서 10년 가까이 주방일 도왔어요. 자 어서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누나.”

    그렇게 미란의 집 방문이 끝나고 성진은 개강일정에 맞춰서 학교를 나갔다.

    막상 학교를 다니려니 대형 세단인 G7은 어린 학생 입장에서 타고 다니기 부담스러웠다.

    대형 세단을 몰고 학교 정문을 통과할 생각을 하니 영 편하지가 않았다.

    ‘아. 좀 작은 걸 살 걸 그랬나.’

    기분 내키는 대로 큰 차를 살 땐 좋았는데 이제는 좀 후회된다.

    차를 아버지께 드리다시피하고 지하철로 통학한 성진은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들의 면면을 보고 절망했다.

    ‘젠장. 아는 애가 한 명도 없어.’

    복학생의 설움이 제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성진은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바로 군대를 간지라 비슷한 동기가 안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어? 성진이냐?”

    “응?”

    뒤돌아보니 역시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문종연?”

    “이야 한성진! 야. 살아 있으니 만나는구만.”

    “야 종연아.”

    삐딱하게 서서 한껏 건들거리는 폼이 익숙하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동기라 성진은 환대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넌 나보다 군대 늦게 갔잖아.”

    “어……. 나, 군 면제 받아서 잠깐 어학연수 갔다 왔어.”

    “군 면제?”

    말로만 듣던 신의 아들이 눈앞에 있었다.

    “이야. 진짜 운 하나는 아주 텄네.”

    “헤헤.”

    콧잔등을 긁적거린 종연은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야. 그나저나 올해 우리 과에 아주 대단한 얼짱이 들어왔다.”

    “얼짱?”

    “엉. 이 형님이 신입생 환영회 쫓아가서 찍었잖아.”

    종연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생머리를 한 단아한 옷차림의 여학생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야. 내가 동아리 신청했는데 쟤를 어떻게 입부시킬 수 없을까 싶은데.”

    “동아리는 또 뭔데?”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 아니냐. 외국어 동아리를 만든다 이거야.”

    “외국어 동아리?”

    성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 1학기 때도 영어 시험점수 바닥이었잖아.”

    “에이. 외국어는 공부하면 그만이지 뭘.”

    “나 참.”

    예전에도 대책 없는 기질이 있더니 시간이 흘러서도 여전한 모양이었다.

    “왜 하필 외국어 동아리야?”

    “쟤. 읽고 있는 책이 영어 토익 책이잖아.”

    “겨우 그런 이유였냐?”

    “말 나온 김에 어디 한번 가 볼까나?”

    종연이 성진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야. 뭘 어쩌려고?”

    “에헤이. 일단 같이 가서 말이라도 걸어 봐야지.”

    앞장서 간 종연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성진이 말리려 걸음을 옮겼다.

    “야. 괜히 이상한…….”

    순간 말리려던 성진의 손을 끌어서 종연이 여학생 쪽으로 성진을 밀어붙였다.

    “어, 어?”

    방심한 순간 그 여학생의 눈앞으로 성진이 다가서자 한창 책에 집중하던 여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예? 어, 어어. 그러니까 나는…….”

    성진이 당황해서 변명거리를 찾는데 종연이 끼어들었다.

    “안녕? 후배님. 우리는 외국어 동아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후배님도 외국어에 관심이 있는 거 같으니까, 같은 1학년들끼리 한번 스터디를 열심히 해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말이야.”

    여학생은 웃으며 물었다.

    “환영회 때 만난 오빠네요. 옆에는 친구?”

    “어? 응. 그럼. 우리 다 올해 복학한 오빠들이지.”

    종연은 당당하게 떠벌거렸지만 상식선의 관념을 지닌 성진은 쪽팔리는 심정이었다.

    ‘누가 봐도 작업 거는 수작이잖아, 이건.’

    게다가 하필 종연이 등을 떠밀어서 먼저 다가선 성진이었다.

    “그럼 오빠들. 이 문제 지문 좀 해석해줄래요?”

    여학생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어? 그, 그건 그러니까…….”

    당황한 종연이 이번에도 성진을 떠밀었다.

    “이 친구가 영어를 참 잘하지. 이 친구한테 한번 물어봐.”

    “야 인마…….”

    성진이 인상을 쓰려다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제법 예쁘장한 인상이었다.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뚜렷해서 청순하고 연약한 느낌이었다.

    “선배. 영어 잘하세요?”

    “글쎄, 뭐……. 어디 가서 창피당할 수준은 아니지.”

    사실 인공지능 팔찌의 도움으로 그간 영어를 비롯해서 웬만한 외국어는 완전히 익혀버린 상태였다.

    “오, 대단한 자신감이시네요. 선배 그럼 이거 한번 해석해주실래요?”

    여학생이 영어 지문을 가리켰다.

    어쩐지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눈을 빛내면서 바라보는 여 후배는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성진은 피식 웃으면서 영어 지문을 해석했다.

    “마이클 핀은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다가올 미래에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막힘없이 지문을 모두 해석해서 들려주자 여학생과 종연 모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우와. 한성진 짱인데.”

    “오빠 정말 영어 잘하시네요.”

    그 사이에 해석 지문을 읽어보며 맞춰본 여학생은 성진의 해석이 정확한 걸 알고 더욱 감탄했다.

    특히 해석을 요구한 지문은 가장 어려운 단계의 응용력이 필요한 복잡한 지문이었다.

    “오빠, 전 김희진이라고 해요. 오빠가 영어 가르쳐주시는 동아리라면 꼭 가고 싶은데요.”

    웃으며 말하는 희진에게 성진도 마주 웃어줬다.

    “그래. 난 한성진. 그런데 동아리 건은 만든다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말이야.”

    슬쩍 종연을 바라보는데 찔린 종연은 딴청을 피웠다.

    “에이 뭐 이렇게 된 거 우리 셋이라도 스터디를 열심히 하면 그게 동아리지 뭐.”

    “그럼 오빠도 꼭 하시는 거죠? 성진이 오빠.”

    눈웃음을 치며 다가오는 희진이었다.

    어린 여후배가 웃으며 애원하는 데에 아직 성진은 내성이 없었다.

    “어? 그래, 뭐.”

    얼떨결에 반승낙해버린 성진에게 희진이 쐐기를 박았다.

    “와 성진이 오빠. 그럼 제 번호 드릴게요.”

    바로 수첩을 꺼낸 희진은 전화번호를 적어 건넸다.

    “이따가 연락 부탁드려요.”

    “그, 그래.”

    결국 전화번호를 받아서 자리로 돌아온 성진을 두고 종연만 신이 났다.

    “아싸. 야, 우리 과 신입생 최고 얼짱을 이렇게 손쉽게 낚았네.”

    “낚기는 무슨. 사람 많은데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

    성진이 핀잔을 줬지만 종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이제 스터디 하면 맨날 저 예쁜 얼굴 보겠네. 참 너 영어는 언제 그렇게 익혔냐?”

    “영어 공부야 뭐 꾸준히 한 거지.”

    대충 둘러댄 성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괜히 귀찮아 지려나.’

    하지만 모처럼 복학한 학교생활이 외로워지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책을 펼쳐드는데 문득 뒤로 돌아본 희진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꾸벅 웃으며 인사한 희진에게 마주 고개를 살짝 숙인 성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뭐. 나쁘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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