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회: 1권 - 개강 -->
“여기로 계약하시죠?”
애써 미소 짓는 중년의 여성 부동산 중개인이 서류를 꺼냈다.
“어……. 글쎄요. 여기는…….”
성진이 찬찬히 이곳저곳을 훑는데 중개인이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저기 손님. 오늘 이런 집만 10군데를 넘게 보셨어요.”
“아하. 그런가요?”
성진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개학일이 다가오면서 등록금을 접수하고, 복학 신청을 마쳤다.
이제는 살 곳이 문제.
성진은 기숙사에 들어가는 대신 자취를 선택했다.
“이 정도면 솔직히 정말 좋은 집이에요. 손님이 까다로우신 거 같아서 일부러 가장 좋은 집으로 모신 거예요.”
성진이 살펴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 위치였다.
주변에 시끄러울만한 유흥시설도 없었고, 사람이나 차도 많이 다니는 것 같진 않다.
성진이 다니는 학교와의 위치도 가까운 편이었다.
“괜찮네요. 그러면 가격은 얼마나 될까요.”
“여기가 37평 오피스텔이거든요. 전세 시세가 2년 기준으로 대충 일억 이천쯤 되요.”
억 단위 소리가 나오는 액수였다.
하지만 지금 성진에게는 불가능한 금액은 아니었다.
“전세 계약하죠. 바로 결제하겠습니다.”
중개인이 희희낙락해져서 갖은 아부성 발언을 늘어놓았다.
“아유 어쩜. 잘 선택하신 거예요.”
15층 꼭대기에 위치한 오피스텔에서 은행으로 내려가는 와중에도 중개인은 성진의 마음이 바뀔까봐 불안한지 연신 입바른 소리를 입에 담았다.
“저도 좋은 거 같네요.”
남은 잔고에서 즉시 전세금을 치룬 성진의 통장에는 이제 수천만 원 정도가 들어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넉넉하지.’
어차피 인공지능 팔찌의 기능을 활용하면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일은 도처에 널렸다.
“그러면 제가 맡아둔 키가 있으니까, 오늘부터 바로 쓰셔도 됩니다.”
중개인이 오피스텔 키를 건넸다.
“예. 고맙습니다.”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간 성진은 다시 오피스텔을 훑어봤다.
전 주인이 쓰던 집기도 고스란히 있었고, 곰팡이가 슬어 있거나 때가 심하게 묻은 곳도 없어서 벽지도배를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괜찮네.”
좋은 가격에 구매를 했다 싶은 성진은 바로 차를 몰고 나왔다.
성진이 다시 차를 몰고 찾은 곳은 과천 경마공원이었다.
아직 경기가 없는 평일이라 경기가 열리는 주말보다는 한산했다.
“가만 있어보자. 여기서 어떻게 찾지?”
성진이 경마공원을 찾은 이유는 바로 영식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 제가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린 녀석이 맹랑하게 소리쳤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녀석. 참.’
웃음이 난 성진은 문득 영식과 같이 갔던 식당이 생각났다.
“꽤 친하게 지내던 것 같았는데.”
곧장 그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심 장사를 할 무렵이었는데도 식당은 고요했다.
정확하게는 딱 한 개 테이블 빼고는 아예 손님이 없었다.
“계세요?”
성진이 큰 소리로 기척을 내자 주방에서 다급한 발걸음이 들렸다.
“어서 오세요!”
활짝 웃은 미란이 앞치마 차림으로 달려 나왔다.
순간 성진을 본 미란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아, 안녕하세요…….”
방금 전까지 주방 일을 하느라 물 묻은 고무장갑을 낀 채였다.
‘하필이면…….’
서둘러 고무장갑을 벗은 미란이 어색한 미소로 눈길을 피했다.
그 날 이후로 성진에 대한 좋은 기억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헌데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일하느라 망가진 옷매무새를 하필이면 성진에게 보일 줄이야.
“어, 어서 오세요.”
일단 자리로 안내하려는 미란의 마음은 모르고 성진은 용건부터 꺼냈다.
“아니요. 밥은 나중에 먹을게요. 여기 혹시 영식이 안 왔나요?”
“영식이요? 아……. 영식이는 잠깐 심부름 나갔어요. 잠깐 기다리시면 곧 올 거예요.”
“예에.”
고개를 끄덕인 성진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기 뭣해서 간단한 백반을 시켰다.
메뉴를 내오는 미란에게서 반찬 그릇을 받는데 성진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영식이하고는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네에. 영식이가 우리 가게에서 밥을 얻어먹곤 했어요. 이 가게가 저희 아버지 건데, 엄마가 가끔 밥을 공짜로 먹이셨거든요.”
“예에.”
성진은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꽤 인정이 많으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작년에 엄마가 병이 나신 뒤로는 아버지가 영식이만 보면 역정을 내셔서요.”
“그랬군요.”
알 만 했다.
아내가 몸이 아프게 됐으니 괜한 데서 화가 치밀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영식이하고 아직 잘 지내시나 보네요.”
“헤. 저도 그냥 영식이하고 나름 친해졌으니까요. 엄마도 영식이 좋아하셨구요.”
수줍게 웃는 미란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웃는 게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보고 있으려니 긴 머릿결을 뒤로 질끈 묶어서, 희디 흰 가녀린 목덜미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순간 얼굴이 뜨거워진 성진은 화제를 돌릴 겸 다른 얘기를 했다.
“제가 이제 학교를 곧 복학하는데 혹시 미란 씨도 복학하세요?”
“어머 그럼요. 저는 사범대학교에 다녀요.”
“아. 그러세요? 저는 추원대학교 통상무역과에요. 미란씨도 혹시?”
“아. 추원대 다니시는구나. 저는 그 옆에 정거장 몇 번 거치면 있는 동희여대에요.”
“아! 그래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들은 둘은 급속히 친해졌다.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한참이 지났을 때 가게 문이 열렸다.
“누나. 단골 야채가게가 문을 닫아서 좀 늦었……. 어?”
양손 가득 채소꾸러미를 든 영식이 놀란 표정으로 성진과 미란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 언제 오셨어요?”
성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좀 됐어. 그동안 지낼 만 했냐?”
“그럼요. 전 잘 지냈죠.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 너 데려가려고 왔지.”
“저를요?”
반문하는 영식에게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 계속 여기서 지낼 거야? 곧 겨울인데 한데서 지낼 수는 없잖아.”
“아뇨. 전 여러 번 겨울 났으니까…….”
“됐다.”
성진이 단박에 말을 잘랐다.
“내가 집을 구했으니까 같이 지내면 돼. 둘이 지내기에는 넓은 곳이고.”
“그래도……. 될까요?”
머뭇거리는 영식은 아직도 영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눈치 볼 거 없다. 나 혼자 사는 거니까. 혹시, 아직도 경마장 떠나고 싶은 마음 없는 거냐?”
“아니요. 저도 올 해 지나면 스무 살이니까요.”
무작정 경마장에 있기에는, 이제는 젊은 나이였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성진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나 믿고 따라온다고 했지?”
“당연히 그렇습니다. 형님.”
“그래. 그거면 됐어.”
서로 고개를 끄덕이는 영식과 성진을 번갈아 보면서 미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에요, 둘이?”
“그냥 남자들끼리 일이야, 누나.”
영식이 짐짓 건방진 말투로 말하자 미란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휴. 그러셔?”
성진이 미란을 보며 말을 이었다.
“미란씨도 한번 와 볼래요? 제가 자취방을 하나 구했는데 거기서 영식이랑 지내기로 했어요.”
“그래요? 그럼 한번……. 가 볼까나.”
미란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데 표정에 왠지 모를 홍조가 피었다.
영식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미란을 바라봤다.
“누나. 어쩐지 수상…….”
“어머 얘는 참! 너 밥 안 먹었지?”
미란이 화들짝 일어나면서 영식의 등짝을 후려쳤다.
“컥!”
“잠깐 기다려? 빨리 차려줄게.”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하는 미란이 성진이 안 보이는 방향에서 슬쩍 영식에게 눈알을 부라리며 입가에 손가락을 댔다.
‘쓸데없는 말하지 마, 이 짜식아.’
‘헤헤. 난 다 알아버렸지롱.’
눈빛만으로 서로 생각을 교환한 영식과 미란은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성진도 바보가 아니었다.
“크음, 흠.”
성진도 미란이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은 눈치가 있었다.
그런데 방금 전 행동으로 완전히 명확해졌다.
헛기침을 한 성진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식아. 지금 해야 할 일 있니?”
“예? 아뇨.”
“그럼 나랑 지금 바로 집으로 가자.”
“지금요?”
“그래. 일단 여기서 밥 먹고, 바로 가자.”
“예. 그럴게요.”
성진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영식의 밥값까지 건넸다.
미란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그냥 제가 대접한 거예요. 이건 그냥 식사 대접한 걸로 쳐주세요.”
“예에. 그러면 감사하구요.”
빚지는 기분이라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성의를 무시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면 금방 차려올게요.”
미란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성진이 물었다.
“너 주변 정리는 됐니? 정말 오늘 바로 들어가도 되겠어?”
“그럼요. 저야 여기서 뭐 가진 것도 없고 그러니까요.”
“그래…….”
미안해하는 눈치라 단호하게 말은 했지만 성진은 강요해서 남을 곤란하게 하는 걸 제일 싫어했다.
“당분간 뭐할 거니?”
“글쎄요…….”
성진은 솔직한 심정으로 학교에 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하지만 영식은 나이도 이제 내년 스물이고 시기도 놓쳤다.
“검정고시 준비는 꼭 해라.”
“네?”
눈이 휘둥그레진 영식에게 성진은 냉정하게 말했다.
“검정고시는 꼭 준비해. 적어도 내년에는 합격해라.”
“네, 네…….”
박력에 눌린 영식은 그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가 원하면 당분간 일 좀 해볼래? 우리 부모님 가게가 하나 있거든. 월급은 꼬박 챙겨줄 거야. 그리고 알바생들을 넉넉하게 쓸 거라 많이 힘들진 않아.”
“뭐 저야 좋죠.”
“그래.”
일방적으로 시키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영식 입장에서는 집도 받고, 직장도 받는 셈이었다.
“너한테 절대 손해는 안 간다.”
“에이, 손해는요. 전 형님 믿기로 했습니다, 무조건.”
“그래. 고맙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일면식이 전혀 없던 두 사람이다.
딱 한번 만나서, 의형제를 맺기로 하고, 또 지금도 전혀 의심이 없었다.
이상하게 끌리는 사람, 끌리는 인연이었다.
“너하고 나, 끝까지 같이 가자.”
“예. 형님.”
그러면서도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의 대사 스캔으로 영식의 반응을 읽고 있었다.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영식의 신체는 진실 쪽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미안하다.’
희미한 의심을 못 버려서 인공지능 팔찌의 대사 스캔을 영식에게 사용한 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믿음은 앞으로 더욱더 깊이 키워나갈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