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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16화 (16/185)
  • <-- 16 회: 1권 - 싸움의 고수 -->

    요 근래 정훈은 심통이 잔뜩 났다.

    ‘저 망할 놈만 없으면…….’

    운동에 집중하는 척하면서 정훈은 딱 한 사람을 은근슬쩍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성진이었다.

    몇 달 전 대련 이후로 정훈은 자신이 개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망할 놈이 괜히 초짜인 척을 해서 사람을 골탕 먹여?’

    남들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정작 누구도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스스로 오해를 한 정훈의 앙심은 깊어만 갔다.

    그래도 최근 들어 몇 달 동안 성진이 사라지니 속이 다 시원했는데 요즘 들어 다시 도장에 나오니 정훈은 성진이 갈수록 거슬렸다.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선화 씨. 저 사람, 이름이 한성진이랬나? 볼수록 괜찮은 거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첫인상도 괜찮았는데 요즘 들어서 스타일이 더 샤프해졌다고 해야 하나?”

    바로 성진을 바라보면서 이따금씩 칭찬을 해대는 선화 씨가 문제였다.

    ‘하필이면 선화 씨가 저놈을!’

    이런 소리를 들으니 정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35살 평생을 살면서 정말 열렬히 마음에 품은 여자가 하필 악연으로 얽힌 놈에게 호감을 품으니 화가 있는 대로 치밀었다.

    ‘저 놈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렇다고 대놓고 시비를 걸 수는 없었다.

    이런 일에는 명분이 필요한 법.

    ‘이 자식. 두고 보자.’

    당장은 그저 지긋이 노려볼 수밖에 없다.

    다만 영문을 모르는 성진은 짜증만 잔뜩 날 뿐이었다.

    ‘저 아저씨가 남자면서 생리하나? 왜 저러는 거야, 대체.’

    무시하려 해도 매번 저러니 슬슬 성가시다.

    “에효. 일단은 내가 참아야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성진은 수련에만 집중했다.

    집안일을 일단락 지었으니 개학까지 남은 기간 동안 도장에 다니면서 호신술을 완전히 몸에 익게 할 생각이었다.

    - 마스터. 무술 동작은 많이 익숙해지셨습니까?

    ‘어. 물론이야. 역시 네 도움이 큰 거 같은데?’

    - 아닙니다. 저의 도움은 마스터께서 노력하신 만큼에 비례합니다. 모든 것은 마스터의 노력의 대가입니다.

    사실 인공지능의 두뇌 정보입력은 성진이 직접 신체를 사용해서 하는 기능을 한방에 가능하게 만들 수는 없다.

    요리법을 입력한다고 갑자기 일류 요리사가 되고, 축구 기술을 입력한다고 갑자기 국가대표급 축구 선수가 될 수는 없다.

    대신 끊임없는 반복 숙달 과정 속에서 성진의 몸동작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신체반응과 신호를 기록한다.

    이후 두뇌 잠재의식을 담당하는 영역에 조심스럽게 입력해서 자연스레 더욱 빨리 익숙해지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래도 네 도움이 큰 건 분명하지.’

    - 칭찬 감사드립니다, 마스터.

    성진은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인공지능 팔찌의 도움 덕에 남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무술을 익혀나가고 있음을 항시 잊지 않았다.

    수련에 열심인 이유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

    “노력한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 이거지!”

    남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데 성진은 재능의 문제를 인공지능 팔찌의 도움으로 커버했다.

    때문에 노력한 만큼 성과가 느껴지니 그 자체로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합!”

    그렇게 한창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데 점심시간을 알리는 시계 알람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라. 벌써 점심시간이네.”

    성진도 슬슬 간단히 씻고 밥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젊은 여자 관원 둘이 다가왔다.

    “성진 씨. 우리하고 같이 밥 먹지 않을래요?”

    “그래요. 혼자 먹으면 맛없잖아요.”

    운동은 별로 안 했는지 땀은 안 흐르고 얼굴에 화장기가 다분했다.

    생글생글 눈웃음까지 치는데 과거의 성진이라면 얼굴부터 붉혔을 것이다.

    성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선선히 응했다.

    “뭐 이런 미인 분들하고 같이 식사하면 저도 좋죠.”

    “어머. 미인이래.”

    슬쩍 손으로 입을 가려 웃는 두 여성들은 작게 킥킥댔다.

    성진도 마주 웃어보였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정훈의 배 속에서 불이 났다.

    ‘이 자식이!’

    성진에게 말을 건 여성 중 한 명은 정훈이 애 닳아하는 바로 그 선화 씨였다.

    ‘선화 씨가 하필이면…….’

    이를 갈아붙인 정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어 성진이.”

    팔을 걷어붙이고 다가든 정훈이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지난번에 우리 붙었다가 흐지부지 끝났지? 어때. 한 판 제대로 해보는 게?”

    “글쎄요…….”

    성진은 정훈의 표정을 살폈다.

    겉으로는 친한 척 정중한 말투지만 그게 더 기분 나쁘다.

    ‘이런 사람하고 부딪혀서 뭐가 좋겠어.’

    정당한 핑계를 둘러대려는데 정훈이 먼저 나섰다.

    “아! 마침 여자분들도 계시니까 점심 내기 어때? 지는 사람이 이 아가씨들 식사까지 다 쏘는 거야.”

    그러자 가만 있던 선화와 친구가 손뼉을 치며 끼어들었다.

    “어머 그래도 되요?”

    “어머 정말? 그럼 누구를 응원해야 되나?”

    이쯤 되니 발을 빼기가 힘들어졌다.

    ‘당했구나.’

    남자 체면에 여자들 앞에서 판이 깔리니 성진도 도리 없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아하하하.”

    정훈은 짐짓 쾌활하게 웃어댔지만 속을 빤히 아는 성진은 가식적인 작태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 양반이 기어코 일을 만드네.’

    정훈은 정훈대로 속으로 뇌까렸다.

    ‘넌 오늘 제대로 밟아준다.’

    지난 번 일은 분명히 방심해서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 된다.

    킥복싱에 유도, 태권도까지 오랜 기간 익혀온 자신이 질 리가 없다.

    ‘같잖은 속임수는 두 번 안 당한다.’

    기세등등하게 링 위로 올라선 정훈이 헤드기어에 글러브를 끼고 자기 양주먹을 마주 처댔다.

    성진도 장비를 착용하고 정훈을 지긋이 바라봤다.

    ‘이 아저씨 이거 진짜 안 되겠네.’

    굳이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드니 슬슬 화가 치민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일까.

    아무래도 오늘 제대로 매듭을 지어야 할 모양이었다.

    “자. 가볍게 한판 해보자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양 웃는 정훈에게 성진도 마구 웃었다.

    “예에.”

    그러면서 살짝 가까이 다가가 소곤거렸다.

    “아저씨. 오늘 일로 감정 쌓인 거 좀 끝냅시다.”

    “뭐?”

    정훈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더 이상 사람 신경 쓰이게 하면 나도 가만 안 있는다구요.”

    “이 자식이…….”

    정훈이 성질을 내려는데 성진이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자! 시작하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정훈은 애써 화를 눌렀다.

    “으응. 그래.”

    그러면서 노려보는 정훈을 성진은 미소로 답했다.

    눈앞에서 히죽 웃는 성진을 보고 정훈은 눈이 뒤집혔다.

    ‘이 자식이! 아주 제대로 밟아주겠어.’

    그런 정훈의 생각을 빤히 읽으면서 성진은 인공지능에게 물었다.

    ‘열 좀 받은 거 같지?’

    - 심박수와 심장 부근의 혈류량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심적 흥분 상태로 추정됩니다.

    성진이 대놓고 말을 한 게 정말 감정을 털자는 의도는 아니었다.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말해서 누가 선선히 동의를 할까.

    그저 열 받게 하려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성진은 만족했다.

    “그럼 갑니다.”

    경고와 함께 단박에 성진이 지척으로 파고들었다.

    성진의 주먹이 순식간에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헛!”

    정훈이 잽싸게 가드를 올렸다.

    팔에 시큰한 통증이 새겨지는 순간,

    다시 쏟아지는 성진의 어퍼컷에 스트레이트 소나기가 연달아 정훈을 때렸다.

    급작스런 충격에 정훈이 뒷걸음질 치며 휘청거렸다.

    “큭.”

    가까스로 쓰러지는 추태를 면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황당하다.

    ‘말도 안 돼.’

    시작하자마자 난데없는 주먹질에 일방적으로 난타 당했다.

    완전히 무력하게 당한 걸 깨달은 정훈이 수치심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걸 본 성진은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생각보다 너무 쉽네.’

    기왕 싸움이 붙었으니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지 감을 잡아볼 셈이었다.

    성진은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지만 그런 성진을 상대하는 정훈은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정에 휘둘려서 싸움을 걸긴 했지만 멍청하진 않다.

    방금 전 얻어맞은 것만으로도 이미 실력의 격차가 확연히 느껴졌다.

    모골이 송연해진 정훈은 헛숨을 흘렸다.

    “으…….”

    완전히 기가 질린 모양을 보고 성진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더는 안 되겠네.’

    제대로 실력을 점검해보고 싶었던 성진은 정훈이 금방 꺾인 게 아쉬웠다.

    인공지능 팔찌가 성진의 마음을 달랬다.

    - 마스터. 현재 지구 인류의 평균적인 무술 능력으로는 마스터를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래?’

    성진은 깜짝 놀랐다.

    제대로 실력을 점검해보기 위해서 인공지능의 서포트를 정지시킨 상태였기 때문이다.

    ‘네 도움이 없는 상태인데도 그 정도라고?’

    - 그렇습니다. 현재 마스터의 반사 신경과 육체작용의 조율 능력은 인류의 육체적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또한 기술적 숙련도 역시 수준급입니다. 저의 분석으로는 통상적으로 상위에 속하는 무술 능력자들도 마스터를 감당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됩니다.

    ‘호오.’

    솔깃해지는 소리다.

    인공지능 팔찌가 가진 강력한 정보 수집력과 분석력으로 내린 판단이라면 신뢰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딴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전의가 상실된 정훈은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성진은 성큼 다가갔다.

    “흣!”

    질겁한 정훈이 뒤로 물러섰지만 성진이 더 빠르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이쯤 하죠. 굳이 망신당하고 싶진 않으시죠?”

    귀찮게 한 정훈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성진의 성격상 이 정도의 일로 사람들 앞에서 남을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정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미안하다.”

    성진은 피식 웃었다.

    “됐습니다.”

    그렇게 대련이 흐지부지 끝나고 성진은 판을 정리하려고 능청을 떨었다.

    “이거 실력이 대단하신데요. 더하면 다칠까봐 안 되겠네요.”

    “어, 어……. 으응.”

    어색하게 웃은 정훈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가만히 구경하던 여성 관원들은 땀도 별로 흘리지 않고 겉보기에 시시하게 끝난 결과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에게? 이걸로 끝?”

    “누가 이긴 거예요, 그러면?”

    두 여자들이 빤히 바라보자 정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진 겁니다. 밥 먹으러 가죠. 제가 맛있는 걸로 쏘겠습니다.”

    “와아. 그럼 빨리 나가요.”

    “그럼 오늘 잘 먹을게요, 정훈 씨.”

    선화 씨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정훈의 얼굴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그 변화를 포착한 성진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지 이제야 알겠네.’

    대충 눈치 챈 성진은 가까이 다가가 작게 말했다.

    “잘해 보세요. 응원할 테니까.”

    “응?”

    화들짝 놀란 정훈은 바로 말뜻을 알아듣고 얼굴을 붉혔다.

    “끄응…….”

    속살까지 들켜버린 정훈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처박고 황급히 나갔다.

    성진도 여자 관원들과 같이 따라 나서는데 멀찍이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저 녀석……. 완전히 동작이 익었구만.’

    그는 바로 관장이었다.

    눈여겨보던 성진이 정훈과 대련을 하려하자 흥미 있게 지켜봤다. 이제는 웬만한 관원들은 전혀 상대가 되질 않았다.

    정훈도 나쁜 자질은 아니었는데 격이 전혀 다른 역량이었다.

    “허어. 저게 정말 천재라는 건가.”

    처음에는 동작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잔뜩 박힌 초보 중의 왕초보였다.

    분명 그랬는데 한 달 남짓 시간이 흐르고 눈부시게 발전하니 제자 삼고 싶은 마음까지 들 지경이었다.

    중간에 두 달쯤을 쉬고 다시 나타나니 이제는 동년배에 적수를 찾기 힘들 성 싶었다.

    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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