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회: 1권 - 아들 노릇 -->
7억 원.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노력해도 손에 넣기 힘든 거금이다.
성진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몇 달 전에는.
하지만 지금 성진이 가진 통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잔액 액수였다.
“계좌이체 출금 부탁합니다.”
은행 출금창구 여직원에게 다가간 성진은 통장을 내밀었다.
깻잎머리를 한 여직원이 통장을 펼쳐보며 물었다.
“얼마 출금하시게요?”
“1억이요.”
“예?”
놀란 여직원이 통장 잔액을 확인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고객님.”
이윽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아저씨에게 다가가더니 아저씨까지 일어나 성진에게 몰려들었다.
“아이고 고객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잠시 안에 들어가서 차 한 잔 하실 수 있겠습니까?”
돈을 인출하러 왔을 뿐인데 차라니.
어안이 벙벙해진 성진이었지만 싱글벙글 웃는 중년 남자는 뒤편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성진을 안내했다.
들어간 방은 이런 공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널찍했다.
아담한 소파에 잘 꾸며놓은 액자며 꽃병이 보기 좋게 장식되고 서가에는 경제, 시사 잡지들이 한 가득이었다.
‘고객 응접실인가.’
아무래도 이 중년 남자는 이 은행지점 지점장쯤 되는 위치인 듯 했다.
“차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이 요즘 날씨도 더운데 정력에 좋다는 그, 보이차로 올릴까요?”
사근사근 비위를 맞추려고 드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예 그냥 그걸로 주세요.”
웃어 보인 성진은 그냥 이 분위기를 즐기기로 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VIP대접인가 보네.’
왜 이러는지 속사정은 짐작이 간다.
은행마다 고액의 자금예치 경쟁이 치열한 까닭일 것이다.
6억 정도를 예치한 것만으로도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거 고객님 같은 분이, 허허 저희 지점과 새롭게 인연을 맺어주시니 이제 또 아주 좋은 인연이 될 거 같습니다. 어허허허허.”
허허롭게 웃는 지점장이 여직원이 타온 보이차를 성진에게 내밀었다.
“지금 총 예치금이 약 칠억 원 정도신데……. 일단 세금 혜택을 좀 더 받는 통장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차후에 좀 더 예치를 해주신다면 뭐 저희가 또 그만큼 혜택을 적극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어허허허.”
“뭐 잘해주시면 그만큼 저도 고려해야죠.”
대접받는 분위기가 낯설긴 했지만 재미는 있었다.
차를 홀짝이던 성진은 금방 일어서려 했지만 지점장이 붙잡아 결국 10분을 더 예금 상담을 한 끝에 은행 문을 나설 수 있었다.
‘확실히 돈이 있으면 대접이 따라오지.’
달리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진이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새삼 문제의식을 가지고 투쟁 같은 걸 할 마음은 없다.
그저 성진 자신이 당장 이용할 수 있는 걸 이용할 뿐.
“그나저나 이 돈을 보여드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려나.”
5만원 권을 빼곡히 채운 1억짜리 백팩을 메고 은행을 나선 성진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성진은 다음으로 곧장 자동차 대리점에 찾아갔다.
돈을 벌면 꼭 자가용부터 사리라 생각했었다.
자신의 자동차를 갖는 것.
남자라면 누구나 생각해 두는 일이다.
거기에 돈이 생겼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자리를 지키던 자동차 딜러가 화급히 일어나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한창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던 성진은 본래 마음에 담아뒀던 중형차 모델 G5를 생각했다.
하지만 딜러의 권유로 상위 모델인 G7을 보자 훨씬 더 넓은 실내 공간 등이 마음에 들었다.
“얼마죠?”
“풀옵션 기준으로 사천만 원입니다.”
G5보다 천만 원 가량 더 비싼 모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성진은 갈등했지만 결국 구매를 결정했다.
‘내가 몰기에는 너무 큰 차 아닌가.’
아직 어린 성진의 나이에 이런 대형차를 몰고 다니는 경우는 사회에서 드물 것이다.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내가 지르고 싶으면 지르는 거지 뭐.’
성진은 최근 나름대로 거듭 성공을 거두면서 무엇보다 당당함을 가지게 됐다.
더욱이 인공지능 팔찌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면 돈 버는 건 문제가 아니다.
성진은 팔찌의 능력에 대해 점차 눈을 떠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남의 시선 따위에 구애받고 싶지 않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요즘 이게 아주 잘 나갑니다.”
“예. 그러면 이제 인도는 언제 받죠?”
“인기 모델이라서 적어도 몇 주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예에.”
“대금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부 혜택도…….”
“일시불입니다.”
성진은 가방 지퍼를 열어 보였다.
오만 원 권 돈다발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걸 본 딜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에구머니! 이게 다 뭐냐.”
집으로 돌아와 보여드린 돈가방과 통장을 본 부모님은 기쁨보다 경악이 앞섰다.
“아니, 이게 다 얼마야 대체.”
“성진아 이게 다 무슨 돈이냐.”
“총 칠억이에요.”
“칠억? 허어. 이런 세상에.”
억, 억 소리가 방송, 신문에서는 쉽게 나와도 이날 이때껏 통장에 마음 놓고 쓸 여윳돈도 없이 살아온 성진 일가였다.
천만 원쯤 되는 큰돈을 성진이 주었을 때도 가슴이 떨렸다.
헌데 수억 원이라는 현실감 없는 액수를 대뜸 현찰로 들고 온 아들 녀석이 부모님들은 영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니 네가 이, 이런 큰돈을 어디서 벌어온 거냐.”
평생을 큰돈 구경도 못하고 살아오신 부모님들이었다.
자식이 혹여 나쁜 길에 든 것인지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진 성진은 이번에도 주식을 통해 벌었다고 둘러댔다.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부모님이 경마에 대한 편견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난 번 성진이 주식에 대해 말한 까닭인지 이번에도 받아들이셨다.
“아이고. 이 녀석이…….”
갑자기 몇 억이나 되는 통장을 얻게 되신 어머니는 성진을 얼싸안고 눈물까지 보이셨다.
“에이 왜 우세요, 이런 좋은 날에.”
아버지도 고개를 돌리셨다.
“집안이 어려우니까 네가 돈 버느라 애쓴 모양인데…….”
말끝을 흐리는 아버지에게서는 미안함이 전해졌다.
“아버지.”
주름진 아버지의 손을 잡은 성진은 다정하게 말했다.
“평생 고생만 하셨으니까 이제는 아들 덕 좀 보셔야죠.”
“그래. 고맙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어렸다.
아버지께서 그간 느끼신 마음고생을 헤아린 성진은 못 본 척 방을 나왔다.
“후…….”
마음이 심란해진 성진은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절대로 고생 시켜드리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더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이 될 것이라고 결심했다. 반드시.
* * *
“가게를 열었으면 좋겠다고?”
“예. 아버지.”
“음…….”
영 꺼림칙해하는 반응이셨다.
당연하다. 아버지는 일평생 공장에서 기계만 만진 분이셨다.
기름밥을 먹던 분이 가게를 하자는 소릴 들으니 시큰둥하실 수밖에 없다.
“내가 무슨 가게를 하겠냐. 이 아부지는 영 주변머리도 없고……. 솔직히 자신이 없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 믿어보세요. 아버지한테 딱 맞는 가게를 차려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에휴. 됐다. 그 돈은 네 돈이야. 네가 필요한 데 써야지, 왜 아버지 가게를 차리는 데 쓰냐.”
“아버지…….”
성진은 단순히 돈 문제 때문에 가게를 차려드리려는 게 아니었다.
“전 아버지가 이전처럼 활기차게 생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남을 위해 일했지만 이제는 아버지 자신을 위한 일을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버지는 쉬시는 것보다는 일을 하시면서 더 즐거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나이 올해 쉰여섯이다.
남들은 이제 쉬고 놀 때라고 하지만 일없이 쉬기만 하는 생활 자체가 바깥일에만 몰두하시던 아버지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성진은 그런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서 좀 더 편하게 일하실 수 있는 가게를 차려드릴 생각이었다.
성진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네가 이 아부지를 그렇게 생각해주니 기꺼이 따르마. 그런데 너 한 가지는 틀렸다. 이 나는 이날 이때껏 남을 위해 일한 적이 없다. 내가 뼈골이 부서져라 일을 한 건 오직 우리 네 식구를 위해서 그랬던 거다.”
“예. 아버지.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성진의 어깨를 토닥인 아버지는 마저 말씀하셨다.
“네 말처럼 나도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 있다.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 무조건 따를 테니까 네가 알아서 다 해봐라.”
“예.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동의를 얻은 성진은 이후 여러 날을 곧장 가게 창업을 위해 고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