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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12화 (12/185)

<-- 12 회: 1권 - 베팅의 명수 -->

나머지 말들이 엉킨 채 바짝 따라붙는 후미 대열에서 압도적인 속도로 튀어나오는 말이 보였다.

“역시! 그래야지!”

놀란 좌중 사이에서 성진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8번마 번개탄.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암말. 거기다 성적도 늘 중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번개탄은 무서운 속도로 대열에서 벗어나 선두권으로 짓쳐들고 있었다.

“어어! 저게 뭐야.”

아저씨들이 번개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함을 쳤다.

하지만 사람들의 경악어린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번개탄은 더욱더 빠르게 선두권으로 접어들었다.

강력한 추입에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

선두를 놓고 겨루는 폭풍룡, 쌍노배를 순식간에 젖히고 번개탄이 선두로 올라섰다.

“저 말에 거신 거예요?”

흥분해서 말하는 영식은 잔뜩 들떠 있었다.

“오오. 저거 분명히 일등이에요. 이제 다 끝나가는 데요.”

“그래. 이제 다 끝나간다.”

들떠있는 영식과 달리 성진은 차분하게 경기를 지켜봤다.

압도적으로 달려 나가는 번개탄의 우승은 확정적이었다.

이제 2등 싸움이 관건이었다.

“폭풍룡!”

“쌍노배!”

서로 다른 말을 연호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폭풍룡을 제친 쌍노배가 달려 나가고 2등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말들이 결승점을 통과하면서 마침내 경기가 끝났다.

즉시 대형 전광판에 경기 결과가 출력되었다.

1등 : 8번 번개탄

2등 : 11번 쌍노배

3등 : 5번 폭풍룡

    :

    :

“이야! 쌍노배!”

“우아아!”

환희와 실망이 교차되었다.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은 사람들이 결과를 보고 아우성을 칠 때 성진은 마권을 만지작거리며 다음 경마 경기를 기다렸다.

“따셨어요?”

유독 여유로운 성진이였다.

당연히 딴 것이라 짐작한 영식이 기대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따셨으면 저 뽀찌 좀 넉넉해 챙겨주세요. 히히.”

“뽀찌? 아. 경마장에서는 개평을 뽀찌라고 하지 참.”

미소를 지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넉넉하게 챙겨줄게.”

가볍게 대답하는 성진이었지만 경기가 진행되면서 속으로는 긴장했었다.

1등마로 점찍은 8번마 번개탄이 경기 초중반 생각보다 속도를 안 냈기 때문이다.

‘후우. 하마터면 틀리는 줄 알았네.’

인공지능 팔찌가 사전에 수집, 분석한 정보는 정확했다.

문제는 현장의 변수다.

성적이 뛰어난 폭풍룡은 부상.

쌍노배는 감정 상태에 문제가 있었다.

1등마로 결착하기에는 심각한 문제였다.

여기에 새로 눈에 들어온 번개탄이 눈에 띄었다.

과거 경기 영상 등을 분석해보니 번개탄은 달리 보였다.

베테랑인 기수는 늘 말의 역량을 차츰 확연히 끌어올렸다.

그런 점을 집중 분석한 인공지능 팔찌는 번개탄 텐션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변수 요인들을 분석하고, 최종 수렴한 확률로 반영한 1등마는 번개탄.

성진은 번개탄에 걸었다.

여기에 2등마를 가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다시 분석이 필요했다.

‘쌍노배는 감정상태, 폭풍룡은 부상. 어느 쪽이 크냐.’

다른 말들의 기량이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

2등마는 두 마리 말 중 하나가 틀림없다.

인공지능은 계산 가능한 변수를 모조리 넣은 시뮬레이션으로 상황변수를 체크했다.

‘폭풍룡의 부상 상태가 훨씬 더 불리하다!’

결국 2등마를 쌍노배에 건 성진은 대박을 일궜다.

사실 변수가 워낙 많아 꼭 따야겠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틀렸다 해도 매 경기당 분석 데이터를 축적해서 다음 경마에 적용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되는 날인지 이번 판에 바로 초대박이 터져버렸다.

성진은 기쁘면서도 새로운 교훈 하나를 되새겼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현장정보가 중요하다.’

사전 수집된 정보는 현장에서 무의미해질 수 있다.

성진은 이번 일로 그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번에 내가 산 마권이 얼마 배당이지?’

- 예, 마스터. 쌍승식 사천육백배 배당입니다. 총합 사억 육천만 원입니다. 세금 공제 시 약 일억 천만 원을 제외한 삼억 오천만원을 수령하시게 됩니다.

‘좋았어!’

속으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10만원이 순식간에 3억 원으로 불어났다.

아무도 우승마로 점치지 않은 번개탄이 1등으로 들어오고 2등까지 정확하게 맞춘 연식 배당자는 성진밖에 없었다.

“이거 진짜 재수 좋은데? 하핫.”

“히야. 진짜 끝내줘요. 이거 진짜 대박 배당일거에요.”

영식도 덩달아 흥분한 모양이었다.

성진 자신도 단번에 맞추기 어려울 거라 예상했다.

‘설마 한 방에 될 줄이야.’

여러 번 허탕을 각오했는데 운 때가 맞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진이 모르는 건 성진 수준으로 방금 전 경기를 예측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경마에는 실제 많은 변수가 있다. 기수나 말의 건강상태, 감정, 숙련도 등등.

하지만 그런 정보를 모두 모을 수 있는 방법도 없을 뿐더러 수집된 모든 정보를 정말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경마 분석이란 결국 감이 절반인 것이다.

변수가 있다면 그걸 캐치할 수 있는 건 결국 성진뿐이고 공교롭게 방금 전 경기가 그랬을 뿐이다.

성공을 거둔 성진은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저녁때가 될 때까지 8번의 경기가 더 열렸고 4번을 제외한 나머지 경기 모두 정확하게 베팅이 성공했다.

“아싸!”

“우와! 대박! 완전 대박이에요!”

성진이 승승장구할 때마다 옆에서 보던 영식의 어깨가 덩달아 덩실거렸다.

오늘 성진이 벌어들인 돈은 모두 8억 9천만 원.

22% 세금을 제외한 실수령액은 7억 원이다.

“됐다.”

목표한 액수 이상이었다.

만족할 만하다.

성진이 돈을 건 9번 경기 중 4번을 제외한 나머지 5번 모두 완벽 베팅.

경마가 정보 분석만으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회자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늘 성진이 거둔 성과는 굉장했다.

‘다만 좀 석연찮은 경기가 몇 번 있었지.’

한창 잘 나가던 말이 갑자기 속도를 늦추거나, 처지던 말들이 갑자기 주변 말들의 교착에 힘입어 앞서 달려 나가는 경기가 있었다.

그런 경기에서 성진은 여지없이 베팅을 실패했다.

‘혹시, 설마?’

조작인가.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어차피 결과적으로는 돈을 얻었다.

거기에 인공지능 팔찌의 분석이 반드시 적중한다는 보장도 없다.

성진은 의심을 접으면서 영식을 불렀다.

“이거 받아라.”

배당을 받으면서 인출한 현금을 영식에게 내밀었다.

얼핏 봐도 두께가 상당한 오만 원짜리 묶음이었다.

긴장한 영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말 가져도 되요?”

“눈치 보지 마. 내가 기분이 내키니까 주는 거야.”

영식의 처지가 불쌍해 보이는 것도 있지만 잠깐이나마 살펴본 됨됨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돈을 품에 넣은 영식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왜 그래? 뭐 안 좋은 거 있어?”

“저…….”

영식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뭐?”

영식이 다시 한 번 매달렸다.

“아까 우승마 맞추시는 거 봤어요. 저한테 그 비결 좀 가르쳐주세요. 저도 형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하!”

어이가 없어진 성진이 이마를 짚었다.

“제발! 형님! 부탁드립니다. 제가 뭐든 할게요.”

황당하긴 했지만 영식의 표정은 너무나 간절해 보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성진은 질문을 던졌다.

“너 경마 배워서 뭐하게?”

“예? 그야……. 당연히 돈을 많이 버는 거죠. 형님처럼.”

“돈을 벌겠다? 돈은 벌어서 어디다 쓰게?”

“그게…….”

머뭇거리는 영식을 보고 한숨을 쉰 성진이 대신 말을 이었다.

“혹시 네 부모님 찾으려고 그러는 거냐?”

갑자기 놀란 표정이 된 영식이 힘없이 대답했다.

“예…….”

후-. 한숨을 내쉰 성진은 뒤돌아섰다.

“일단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예? 어, 그러면……. 예 형님! 제가 안내할게요.”

금방 넉살 좋게 웃어 보인 영식이 앞서 걸었다.

“형님은 무슨…….”

핀잔 조였지만 성진도 영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   *   *

영식이 안내한 식당은 경마공원 근처의 작은 밥집이었다.

“어머? 영식아!”

하얀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여성이 영식을 반갑게 맞았다.

“잘 왔어. 오늘 아버지 없어서 밥 먹어도 돼.”

싱글벙글 웃는 묘령의 여성이 다가왔다.

나이는 성진과 비슷할까.

갸름한 턱 선에 순한 인상과 티 없는 웃음이 매력적인 아가씨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전형적인 미인형이었다.

“미란이 누나. 오늘은 밥 안 얻어먹어요. 제가 살 거예요.”

웃으며 돈을 보인 영식을 보고 미란은 깜짝 놀랐다.

“어머, 너 그 돈은 뭐니?”

오해를 살까 싶은 성진이 나섰다.

“그 돈 제가 준 겁니다. 오늘 영식이가 저를 도와줬어요.”

그제야 성진을 본 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러셨군요. 그런데 누구시죠?”

“그게…….”

“내가 오늘부터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어!”

단호하게 말하는 영식을 본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이렇게 됐습니다. 전 한성진이라고 합니다.”

성진이 정식으로 소개했다.

“네. 저는 이미란이라고 해요.”

마주 웃으며 인사를 하는 두 사람이 순간 눈이 마주쳤다.

‘어머.’

놀란 미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서 성진을 살피는데 찬찬히 살펴본 성진은 무척 남자다운 인상이었다.

‘운동했나 보네…….’

성진의 몸이 다부지게 변하면서 몸 전체에 강인함이 두드러졌다.

본래 여자 앞에서는 다소 쑥스러움이 많았던 성진이지만 최근 심신의 변화를 겪으면서 당당한 기도가 몸에 배였다.

이런 전체적인 존재감이 미란으로 하여금 남자다움을 흠뻑 느끼게 했다.

그러한 느낌은 결국 이성적인 호감으로 다가왔다.

“자, 잘 오셨어요. 뭐 드릴까요? 저희 집은 다 맛있는데.”

미란은 말하면서도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냥 가장 맛있는 걸로 주세요.”

미란의 눈치를 모르고 무덤덤하게 말한 성진은 영식과 자리에 앉았다.

네에-. 작게 대답한 미란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성진이 영식을 마주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내가 너한테 경마를 가르쳐줄 수는 없어.”

“아……. 네.”

영식이 실망으로 고개를 떨구려는 찰나 마저 말을 이었다.

“대신 네가 날 믿고 따라와 준다면 네 어머니를 찾는 걸 도와주는 건 물론이고, 돈도 어느 정도 벌게 해줄 수 있다.”

성진은 영식을 거두기로 결심했다.

어린 녀석이 경마장에서 눈칫밥을 먹고 버티는 건 쉬운 게 아니다.

노숙자들이 곳곳에 있는 이런 곳에서 몇 년을 버틴 놈이라면 눈치와 배짱은 기본적으로 있을 것이다.

모든 걸 다 떠나서 대뜸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영식의 행동부터가 묘한 호감으로 다가왔다.

“저, 정말요? 정말 우리 엄마 찾는 거 도와주실 거예요?”

“그래. 난 경마는 더 이상 손대지 않아. 대신 조만간 다른 일을 벌일 거야. 그 때 가서는 네 어머니를 찾는 것도 수월해질 거 같기도 하고.”

“하겠습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어머니가 돌아오실까 하는 마음에 경마장을 떠나지 못한 영식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진은 그런 영식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몇 살이냐?”

“예? 어, 저…….”

“눈치 보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인마.”

“열아홉 살이요…….”

“정말?”

왜소한 체격에 피골이 상접한 영식은 열아홉 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에이 그럼요. 정말이라니까요.”

“그나저나 다른 데 살 곳은 없는 거냐?”

“예. 원래……. 집이 없었어요.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아마 엄마도 힘들었겠죠.”

“어 그래. 알았다.”

무슨 사정인지 짐작이 갔다.

집조차 없을 만큼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렸음이 느껴졌다.

“그럼. 계속 경마장에서 지낸 건데. 여기 있을 수는 없지 않냐?”

성진은 영식을 거두겠다고 한 마당에 경마장에 계속 두기가 불편했다.

영식도 그런 마음을 느꼈지만 빙긋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계속 경마장에 있는 게 편해요…….”

영식은 성진과 눈을 마주쳤다.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거짓을 곧잘 감추기 힘든 순수한 눈빛이었다.

인공지능 팔찌가 투사하는 신체스캔도 이상반응은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

영식의 믿음을 느낀 성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팔팔 끓는 해물전골을 들고 다가온 미란이 상차림을 시작했다.

“드세요. 특별서비스에요.”

생글 눈웃음을 치는 미란을 보면서 마주 웃어준 성진이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겠습니다.”

하루 종일 경마장 안을 오가느라 시장했던 둘은 먹성 좋게 음식을 먹어댔다.

순식간에 밥그릇이 비워지고 자리에서 일어선 성진이 오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아니요. 이건 서비스인데요.”

“그냥 감사의 뜻입니다. 너무 맛있게 잘 먹어서요.”

억지로 미란의 손에 돈을 쥐어준 성진은 펜을 빌려서 메모장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었다.

“이게 내 번호야. 도움이 필요해지면 연락해라.”

두 손으로 번호를 건네받은 영식은 호주머니에 소중히 번호쪽지를 넣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대신한 성진이 멀어져 가는데 가게 문을 열고 나온 미란이 영식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누구니? 저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응?”

야릇한 표정을 지은 영식이 미란을 장난스럽게 쬐려봤다.

“누나, 혹시 관심 있어?”

“어머 얘는, 관심은 무슨!”

얼굴이 빨개진 미란이 허둥거렸다.

거기에 오히려 영식이 더 꼬치꼬치 캐묻자 견디지 못한 미란이 영식의 등판을 철썩 때리고 가게로 들어가 버렸다.

“아야야.”

등판을 어루만지면서 엄살을 떤 영식은 혀를 낼름 내밀었다.

“관심 있는 거 맞구만 그러네.”

히죽 웃은 영식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쪽지를 꺼냈다.

성진이 건네준 전화번호.

오늘 성진이 준 몇 백만 원의 돈보다도 이 한 장의 전화번호를 담은 쪽지가 영식에게는 더욱 크게 느껴졌다.

‘네 어머니를 찾도록 도와주마.’

영식의 눈앞에서 베팅으로 수억을 벌어간 사람이 한 약속이다.

비록 오늘 처음 본 성진이지만 그 경마베팅 기술은 진짜였다.

비결을 알고 싶은 마음에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했지만 대신 성진은 이 번호를 줬다.

영식은 전화번호가 담긴 쪽지를 소중히 접어 넣었다.

이 작은 쪽지 한 장으로 시작된 인연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지도 모른다는 묘한 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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