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회: 1권 - 베팅의 명수 -->
그 뒤를 바짝 쫓은 녀석이 고개를 숙이면서 눈웃음을 쳤다.
“고맙습니다. 제가 마돌이답게 정말 제대로 해드릴게요.”
“마돌이?”
“예. 경마장에서 심부름 하는 사람들을 마돌이라고 불러요.”
“아. 그래.”
성진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어차피 도움이 필요해서 이 녀석을 고른 게 아니다.
피식 웃은 성진은 지폐 몇 장을 건넸다.
“대충 심부름이나 해라. 마권 구매하는 데 근처에 있을 테니까 간식 같은 거나 사 와.”
“옛썰!”
싹싹하게 경례를 올려붙인 녀석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성진은 천천히 마권 구매장으로 가서 예상했던 말들의 출전 경기들부터 미리 살폈다.
“음. 일단 확실히 하려면 말들을 미리 봐야지.”
대회 시작 전에 관객들 앞에서 기수와 말들이 한 바퀴를 천천히 도는 의식이 있었다.
여태까지 전적 분석을 통해서 두각을 드러내는 말들을 대충 추린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가 제공하는 정보를 띄웠다.
말들의 내력을 시야 한편에 띄운 채로 살펴보니 재밌는 정보들이 더러 있었다.
‘오호 이 녀석은 한참 어린데 거세된 놈이잖아. 이런 불쌍한 놈. 어? 이 녀석은…….’
그때 먹을거리를 한 아름 싸들고 온 자칭 마돌이 녀석이 성진 앞에 나타났다.
“여기요, 거스름돈.”
넉넉히 준 돈이었는데 남은 돈을 건네받으니 달랑 만원 한 장이었다.
“이거 다 네가 먹으려고 많이 사 온 거냐?”
“어? 들켰네요. 에헤헤…….”
넉살 좋게 웃는데 그게 또 굳이 밉진 않았다.
길어서 밑단을 접은 바지에 늘어진 티셔츠. 남루한 행색도 모자라 얼굴까지 핍진해 보인다.
아마도 경마장 근처에 기거하는 노숙자들과 비슷한 처지로 보였다.
‘돈 들고 안 도망간 게 기특하다, 짜식.’
대견하게 여긴 성진은 먹을 걸 나눠 들고 좌석으로 향했다.
앉아서 출전마들이 나오는 걸 지켜보는데 생각 외로 재미난 면면이 보였다.
먼저 유력하게 생각했던 5번마 폭풍룡은 오늘따라 영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폭풍룡은 일단 제껴야겠네.’
겉으로는 멀쩡한 걸음걸이에 늠름한 자태다.
하지만 성진이 인공지능 팔찌의 스캔 결과로 얻은 모습은 다리와 가슴 근육에 자잘한 파열이나 부상 등이 겹쳐 있다.
아무래도 이전 경기를 치루면서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으로 유력한 쌍노배.’
기수가 다정한 포즈를 연출하면서 뒷목을 쓰다듬는다.
“풋.”
성진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이 기수를 노려보면서 성질이 난 듯 푸르릉 콧김을 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보니 몇몇 예리한 극소수 관찰자들은 기수와 말의 감정이 영 좋지 않은 걸 깨닫고 표정이 굳었다.
‘이거 참. 고민되네.’
비록 부상을 입었지만 성적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폭풍룡.
다음으로 성적이 좋지만 유독 감정상태가 안 좋은 쌍노배.
벌써 다른 베팅 참가자들보다 훨씬 높은 정보를 손에 얻었지만 결정적인 판단은 성진의 몫이다.
‘다른 말은 없나.’
그때 8번마 번개탄이 눈에 들어왔다.
즉시 참조되는 정보 카테고리가 나열되는데 한 가지가 특이하다.
‘어라. 어린 암말이잖아?’
총 출전 경기 10회. 성적은 딱 중간 수준.
대신 기수나 조련사가 상당히 연륜 있는 베테랑들이었다.
‘말은 어리지만 기수가 베테랑이라.’
육포를 씹으면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이제 마권 사시게요?”
“왜? 마권도 사다주게?”
녀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가 눈에 번뜩이는 게 귀엽다.
“참. 너 이름이 뭐냐?”
“김영식이요. 김. 영. 식.”
“난 한성진이다. 그럼 영식아. 미리 경기장 잘 보이는 자리 맡고 있어. 내가 마권 사서 갈 테니까.”
“예. 그럴게요.”
영식이 먹을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자리를 나섰다.
마저 남은 말을 관찰하는데 옆자리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형씨. 저 녀석 마돌이로 삼은 거유?”
“예. 어쩌다 보니…….”
솔직히 쓸모는 없다.
측은지심 때문이다.
“불쌍한 놈이에요. 거 배당받으면 개평 좀 많이 챙겨줘요.”
입을 달싹이는 게 뭔가 사정을 아는 눈치였다.
성진도 사정이 꽤 궁금하긴 했다.
남은 맥주 캔 하나를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혹시 아시나 해서 여쭙는데 저렇게 어린 애가 왜 경마장에서 이러는 거죠?”
성진의 질문을 받은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았다.
“저 어린놈이 더 어릴 때, 한 열다, 여섯 때였나. 엄마 손잡고 경마장 왔는데 그냥 없어졌다는 거야. 물어보니까 집도 절도 없었다더라고. 사정 어려우니까 그냥 버린 거지 뭐. 다 큰 애를 말이야.”
“그럼 부모님은 아직 안 찾아온 거예요?”
“그럼. 지 엄마 기다린다고 저 나이 먹도록 경마장 심부름하면서 눈칫밥 먹고 살아. 에휴. 한번은 어른들이 소문 안 좋아진다고 고아원에 보냈는데 그걸 또 도망쳐서 여기로 왔다지. 참.”
“아. 그랬군요.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래요. 꼭 따서 개평 좀 챙겨줘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나선 성진은 혀를 찼다.
“뭐 저런 불쌍한 놈이 다 있어?”
말로만 불쌍한 게 아니라 정말 불쌍하다.
영식의 남루한 행색을 떠올리며 마권 구매처로 간 성진은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뭐가 좋을까?’
- 최종 분석을 가동하겠습니다.
즉시 인공지능은 관련된 데이터를 총 동원해 성진이 물색한 경주마들의 우승 확률을 분석했다.
그 결과를 본 성진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이거다.’
베팅마를 결정한 성진은 마권을 샀다.
딱 1마리 말만 골라서 1등을 맞추는 단승식, 그리고 3마리 말을 골라 순서 상관없이 1, 2등 중 한 마리를 맞추는 연승식과 순서대로 1, 2등을 맞추는 쌍승식, 1, 2등을 순서 없이 맞추는 복승식.
총 4가지가 있었다.
경기당 최대 10만원만 베팅할 수 있기 때문에 성진은 배당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쌍승식에 10만원을 걸었다.
마권을 손에 쥔 성진은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경기장 관람석 안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붐볐다.
그 안에서 영식이 양 손을 요란하게 흔들며 성진을 불렀다.
“여기요! 여기!”
“됐어. 그만 불러, 인마.”
다가간 성진이 자리를 맡느라 올려둔 음식봉투를 치우고 앉았다.
마침 결승점이 코앞인 명당자리다.
“좋은 자리네? 수고했어.”
“헤헤. 제가 맡은 일은 제대로 한다니까요.”
너스레를 떤 영식이 콜라 캔을 따서 건넸다.
콜라를 받아 마신 성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새 영식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춰 있었다.
‘이 녀석. 외로운가 보네.’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었다.
어머니가 다정한 얼굴로 조그만 샌드위치를 아이 손에 쥐어주고 있었다.
“영식아!”
“예?”
깜짝 놀라 돌아본 영식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내가 오늘 대박 타면 너한테 개평 두둑하게 준다. 땡 잡은 줄 알아.”
“헤헤. 예.”
얼굴이 밝아진 영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대박이니까 기대해둬.”
“그런데 무슨 말 거셨어요?”
“아주 끝내주는 1등, 2등 말.”
“에헤. 자신 있으신가 보네요. 그러니까 무슨 말…….”
“그냥 좀 있다가 1등, 2등으로 들어오는 말 있지? 그게 내가 건 말이야. 그런 줄 알면 돼.”
단호하게 말하는 성진에게서 자신감이 넘쳤다.
“예?”
황당해 하는 영식에게 씨익 웃어 보인 성진은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시작이다.”
경기 시작이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경기장으로 쏠렸다.
- 탕!
마침내 시작 신호가 울렸다.
총 14마리의 경주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격렬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으아아! 달려! 폭풍룡!”
“달려라 쌍노배! 제쳐버려!”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지르는 아저씨들이 열렬히 각자가 건 말을 응원했다.
응원소리를 추진제 삼았는지 더욱 기세를 높인 경주마들이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쏜살같은 속도로 경기장을 돌아갈 때마다 관객들의 함성소리가 더욱 커져갔다.
“으아아! 역시 폭풍룡! 너만 믿는다!”
선두는 5번마 폭풍룡이었다.
초반부터 엄청난 기세로 치고 나간 폭풍룡은 단숨에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선두를 유지했다.
“달려라! 폭풍룡!”
열광적으로 울리는 관객들의 응원.
하지만 보고 있던 성진만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리하네.”
아니나 다를까. 경기장 절반 가까이를 돈 폭풍룡은 속도가 상대적으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두자리를 놓고 각축이 벌어졌다.
11번마 쌍노배가 그 뒤를 이어 바짝 붙었다.
폭풍룡, 쌍노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신없이 선두 다툼을 벌였다.
“달려라, 폭풍룡!”
“쌍노배! 제쳐버려!”
“우아아아아.”
한 덩어리가 되다시피 맹진하는 두 마리 말들이 결승점을 눈앞에 둔 바로 그 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변이 터져 나왔다.